일본학개론

[스크랩] 일본학개론 워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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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개론 워크북
내용구성 및 학습방법
1. 이 워크북은 교과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방송강의를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
하였다. 강의는 교재를 토대로 기본사항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워크북에서는 강의내용을 요약해 전체적인 흐름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리고 중요개념이나 기본사항을 이해하기 쉽도록 요약하였다.
2. 보다 심층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설명을 하였다.
3. 각 강의마다 기출문제와 신규문제를 작성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학습한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로 문제를 활용하면 효과적이다.
목차
제1강 일본열도
제2강 지역사회의 구분
제3강 홋카이도지방, 도호쿠지방, 간토지방, 주부지방
제4강 긴키지방, 주고쿠지방, 시코쿠지방, 규슈지방
제5강 지역사회와 교통망
제6강 지역사회의 경제활동
제7강 지역사회의 문제
제8강 일본인의 형성
제9강 일본역사의 전개―원시․고대(1)
제10강 일본역사의 전개―원시․고대(2)
제11강 일본역사의 전개―중세(1)
제12강 일본역사의 전개―중세(2)
제13강 일본역사의 전개―근세(1)
제14강 일본역사의 전개―근세(2)
제15강 국민국가 ‘일본’의 형성
제16강 전쟁체험
제17강 현대일본국가의 출발
제18강 일본인과 천황제
제19강 국기와 국가
제20강 일본인의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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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일본열도
1. 영토
(1) 위치와 범위
*위치
일본열도는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의 4개의 큰 섬과 수천
개의 부속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에서는 보통 이 네 개의 큰 섬들을 본토라 하고 그 외의
것들을 섬이라 한다.
*영토의 범위
일본열도는 대각선으로 좁고 길게 놓여 있어, 영토의 범위가 넓다. 특히 바다에서 일본의 주
권이 미치는 수역을 고려하면, 일본의 범위는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다.
동쪽 끝은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로 무인도로서 도쿄도(東京都)의 일부이지만 도쿄보다는
괌에 더 가깝다. 서쪽 끝은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로 오키나와현(沖繩縣)에 속하는데 타이완
과 가깝다. 북쪽 끝에 대해 일본에서는 지시마열도의 일부인 북방4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
해 러시아와 영토분쟁 중이다. 일본이 남쪽 끝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오키노토리시마(沖ノ鳥島)
이다. 이 섬은 만조 시에는 해수면에 거의 잠기는 바위이기 때문에 섬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
이 많은데, 일본정부는 1987년에 300억 엔의 비용을 들여 바위가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보강
공사를 하였다.
*영토의 크기
일본의 영토 크기는 약 37만km2로 세계에서 약 60번째 정도로서 독일과 비슷하며, 영국이나
이탈리아보다 크다. 4대 섬의 면적을 보면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중에서는 혼슈가 가장
큰 약 23만 1188km2로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이다. 홋카이도는 7만 8418만 평방킬로미터로 일
본열도의 약 5분의 1크기를 차지한다. 시코쿠는 1만 8803제곱킬로미터, 규슈는 4만 4442제곱킬
로미터이다.
(2) 영토분쟁
일본은 우리나라와의 사이에 독도 문제, 중국 및 타이완과는 센카쿠(尖閣)제도 문제, 러시아
와는 북방4도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정부는 영토문제에 대해 상당히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
는데, 영토면적을 계산하는 경우에도 이들 분쟁 중인 지역의 면적을 포함해서 산출하는 경우
가 많다.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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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세력을 강화한 일본은 1905년 한국 침탈의 일환으로 독도를 시
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다. 1946년 GHQ각서에 의해 독도는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분리되었
으나, 일본 측은 이것을 점령하의 잠정적 조치라 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방4도
지시마(千島)열도의 일부인 하보마이제도(齒舞諸島), 시코단(色丹), 구나시리(國後), 에토로
후(擇捉) 등의 섬으로, 일본에서는 이들을 ‘북방영토’ 또는 ‘북방4도’라 한다. 1855년 일러화친
조약에 의해 일본은 상기 ‘북방영토’를, 소련은 그 이북을 차지하였다. 1875년 러시아와 가라후
토·지시마 교환조약을 맺어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지시마열도는 일본령으로 확정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지시마열도의 영유권을 방기함으로써 소련이 이를 점령했는데, 일본
은 이 섬들은 지시마열도에 포함되지 않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며 섬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센카쿠제도
센카쿠제도는 일본의 서쪽 끝 부분에 있는 무인도로서, 청일전쟁 이듬해인 1895년에 일본이
오키나와현에 편입시켰다. 태평양전쟁 후 미국의 통치하에 놓였다가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
으로 복귀함에 따라 다시 일본이 지배하게 되었으나, 중국‧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 자연과 풍토
(1) 바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고 북쪽 러시아와의 사이에
는 오호츠크해, 우리나라와의 사이에는 동해, 중국의 남부와 타이완 사이에는 동중국해 등의
연해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중국해 밑에는 필리핀해가 있다. 또 내해로서 혼슈와 규슈・시코쿠
사이에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가 있다.
또한 사할린과 홋카이도의 사이에 소야(宗谷)해협, 규슈와 한국 사이에 쓰시마(対馬)해협이
있으며, 혼슈와 규슈 사이에 간몬(関門)해협,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는 쓰가루(津軽)해협이
있다.
일본의 근해는 한류와 난류가 마주치고 있어 풍부한 어장을 이루고 있다. 난류인 구로시오
(黑潮)와 한류인 오야시오(親潮)가 만나는 태평양 쪽은 세계 3대 어장의 하나이며, 동해 쪽도
난류인 쓰시마 해류와 한류인 리만 해류가 교차하여 어류의 종류와 양이 풍부하다.
(2) 산지와 숲
일본은 산지가 전 국토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여 세계에서 산지 비율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환태평양조산대에 속한 일본의 산지는 대부분이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지질학적으로
젊어서 대개 험준하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지는 국토의 거의 중앙부에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특히 혼슈 중앙부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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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 히다(飛驒)‧기소(木曾)‧아카이시(赤石) 산맥에는 3천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즐비하여 ‘일
본 알프스’라 불린다. 이들은 나가노(長野)‧기후(岐阜)‧시즈오카(靜岡) 3현의 경계 지역에 집중
되어 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은 후지산(富士山)으로, 해발 3,776m로 시즈오카현과 야마나
시(山梨)현에 걸쳐 있다.
전국의 주요 산지를 보면 홋카이도에는 데시오(天塩)산지, 기타미(北見)산지, 히다카(日高)
산지가 있다. 혼슈의 동북부에는 한 가운데에 오우(奥羽)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양옆으
로 기타카미(北上)고지와 데와(出羽)산지가 있다. 니가타현 쪽에는 에치고(越後)산맥이 있으며
태평양쪽으로는 아부구마(阿武隈)고지가 있다. 그리고 혼슈의 중앙부에 간토(関東)산지, 아카
아시(赤石)산맥, 기소(木曾)산맥, 히다(飛驒)산맥이 뻗어 있다. 혼슈의 서남쪽에는 혼슈의 중앙
부를 가르는 주고쿠(中国)산지가 있다. 긴키지방에는 스즈카(鈴鹿)산맥, 기이(紀伊)산지가 있
다. 시코쿠지방에는 시코쿠(四国)산지가 가운데 동서로 뻗어 지역을 양분하고 있으며 규슈에
는 즈쿠시(筑紫)산지와 규슈(九州)산지가 있다(교재 12쪽 [그림 1-5] 참조).
(3) 평야와 하천
평지는 전 국토의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다. 일본의 평야는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이 실
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것이 많다. 산지는 대개 급경사를 이루며 해안 가까이까지 내려
와 있기 때문에, 하천은 길이가 짧고, 급류를 이룬다. 따라서 평야는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하
천을 따라 하천의 하류에서부터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입구에 발달하거나(三角洲), 산기슭에
발달했다(扇狀地).
홋카이도에는 데시오(天塩)강과 이시카리(石狩)강이 있고 이시카리강의 이시카리평야, 도카
치(十勝)강의 도카치평야가 형성돼 있다.
혼슈의 동북부에는 쓰가루(津軽)평야, 아키타(秋田)평야, 쇼나이(庄内)평야 등이 있고, 그 밑
으로 에치고(越後)평야가 있다. 이들 평야는 수자원이 풍부하여 벼농사가 발달하였는데, 이들
평야가 속해 있는 니이가타(新渴)현, 아키타(秋田)현, 야마가타(山形)현, 미야기(宮城)현 등 4개
현은 대표적인 쌀 산지로 꼽힌다. 그리고 태평양 쪽으로 센다이(仙台)평야가 있다.
간토(關東)평야는 일본 최대의 평야로 간토지방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일본 최대의 유역면
적을 자랑하는 도네(利根)강이 흐른다.
나고야에 인접한 노비(濃尾) 평야도 큰 규모의 평야로, 여기에는 기소(木曽)강이 흐르고 있
다. 오사카에는 오사카(大阪)평야가 있고 이 곳을 요도(淀)강이 흐른다. 이밖에 오카야마(岡山)
평야, 하리마(播磨)평야가 있다. 시코쿠지방에 사누키(讃岐)평야, 고치(高知)평야가 있으며, 규
슈지방에는 쓰쿠시(筑紫)평야, 구마모토(熊本)평야, 미야자키(宮崎)평야가 있다.
3. 기후
(1) 기후
혼슈지역은 온대몬순기후로 겨울에는 아시아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서계절풍, 여름에는 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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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사계절이 뚜렷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겨울에는
한랭건조하다. 그러나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기후의 차이가 크다.
일본 기후는 국토가 남과 북의 기후차가 크고, 중앙부의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동해 쪽과 태
평양 쪽의 기후가 큰 차이를 보인다. 가장 남단에 있는 오키나와(沖繩)‧아마미(唵美)제도‧오가
사와라(小笠原)제도를 포함하는 난세이(南西)제도는 연중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은 아열대
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반면 홋카이도는 아한대나 냉대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홋카이도는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추워 겨울의 월평균 기온은 영하이며, 연중 강수량이 적고 쓰유(梅雨)나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혼슈의 동해 쪽은 겨울에 눈‧비가 많고 여름은 비교적 맑은 날이 많다. 반면, 태평양 쪽은
여름에 비오는 날이 많고 겨울은 건조한 바람이 불며 맑고 쌀쌀한 날이 많다.
혼슈의 한 가운데 위치한 내륙지방은 계절풍의 영향을 잘 받지 않아 연중 강수량이 적고 여
름과 겨울,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 여름은 상당히 덥고 겨울은 상당히 춥다.
세토나이카이라는 바다를 끼고 있는 세토우치(瀨戶內)지역도 북쪽의 주고쿠산지와 남쪽의
시코쿠산지에 둘러싸여 있어 여름과 겨울에 계절풍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기 때문에 맑은
날이 많고 비가 적다.
4. 자연재해
(1) 지진
일본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진이 활발하다. 일본열도는 태평양 플레이트
와 필리핀해 플레이트가 유라시아 플레이트 아래로 들어가는 경계 부근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진‧화산활동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에 속한다.
일본에서 20세기에 발생한 가장 큰 지진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이다. 최근에 큰 피해를 낸
지진으로는 1995년에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진재(阪神‧淡路大震災, 흔히 고베지진이라 함)와
2004년의 니이가타현 주에쓰지진(新潟県中越地震)이 있다.
(2) 화산활동
일본은 화산활동도 활발하여 분화에 의해 흘러나온 용암이나 화산재 등이 인명과 집, 가축,
농지 등에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현재 활동 중인 화산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화산재해가 종종
일어나며, 대규모 분화의 가능성도 있다. 현재 기상청에서 화산활동을 주목하고 있는 화산은
모두 12개이다. 특히 규슈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아소산(阿蘇山), 운젠다케(雲仙岳), 사쿠라
지마(櫻島) 등이 있다.
운젠다케는 나가사키현에 위치하고, 시마바라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는 남북 25킬로미터의 성
층화산으로 분화활동은 중앙에 있는 후겐다케(普賢岳)에서 발생하고 있다. 아소산은 구마모토
현에 위치하며 현재는 화산활동이 낮은 레벨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쿠라지마는 원래는 섬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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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1914년의 대분화로 분출된 용암에 의해 오스미반도와 연결되게 되었다. 인구가 밀집한
가고시마시의 시가지와 가깝기 때문에 화산회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연습문제
1. 일본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은?
①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 ② 오키노토리시마(沖ノ鳥島)
③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 ④ 센카쿠제도(尖閣諸島)
정답 ③.
일본의 동쪽 끝은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이다. 이 섬은 무인도로서 도쿄도(東京都)의 일부
이지만 도쿄보다는 괌에 더 가깝다.
2.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해협은?
① 쓰가루해협(津軽海峡) ② 간몬해협(関門海峡)
③ 쓰시마해협(対馬海峡) ④ 소야해협(宗谷海峡)
정답 ①.
쓰가루해협은 홋카이도와 혼슈의 아오모리현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간몬해협은 혼슈와 규슈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쓰시마해협은 혼슈와 한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소야해협은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3.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国) 사이에 위치한 바다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① 세토나이카이 ② 동중국해
③ 오호츠크해 ④ 일본해
정답 ①.
일본은 동쪽으로는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와의 사이에 오호츠크해, 서
쪽으로는 한반도와의 사이에 동해, 서남쪽은 중국 대륙 및 동남아시아와의 사이에 동중국해
와 필리핀해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하여 한국과의 사이에 쟁
점이 되고 있다.
4. 일본 영토에서 산지와 평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어느 정도인가?
① 산지 1/5, 평지 2/3 ② 산지 1/4, 평지 3/4
③ 산지 1/3, 평지 2/3 ④ 산지 2/3, 평지 1/4
정답 ④.
일본은 산지가 전 국토의 약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세계에서 산지 비율이 높은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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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한다. 환태평양조산대에 속한 일본의 산지는 대부분이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지질
학적으로 젊어서 대개 험준하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한편 일본의 평지는 전 국토의 약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의 평야는 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하천이 실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것이 많다.
5.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富士山)이 위치해 있는 곳은?
① 시즈오카현 ② 도치기현
③ 이와테현 ④ 미야기현
정답 ①.
후지산은 해발 3,776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후지산은 시즈오카현과 야마나시현에
걸쳐 있다.
6. 북방4도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현재 중국과 영토분쟁 중에 있는 섬들을 말한다.
② 현재 영유권은 일본이 가지고 있다.
③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이 통치하였다.
④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있는 섬들이다.
정답 ④.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있는 시코탄, 하보마이, 구나시리, 에토로후등 네 개
의 섬으로 1875년에 체결된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이래 일본이 통치하다가 제2차세계대전
후 현재까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다.
7. 독도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1905년 한국침탈의 일환으로 일본에 편입되었다.
②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함에 따라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다.
③ 패전 직후 GHQ각서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④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영토로 인정되었다.
정답 ①. 독도는 일본에서는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른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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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체계의 변천
1871년 7월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3부 302현.
1871년 11월 개치부현(改置府縣)으로 3부 72현.
1888년 3부 43현으로 통폐합.
1901년 홋카이도가 지방자치단체로 편입.
1943년 47도도부현 체제 확정.
제2강 지역사회의 구분
1. 도도부현의 행정체계
(1) 행정체계의 변천
일본의 행정단위는 도도부현(都道府県)의 광역자치체와 시정촌(市町村)의 기초자치체로
나뉘어져 있다. 도(都)는 도쿄도(東京都), 또 하나의 도(道)는 홋카이도(北海道), 부(府)는 교
토부(京都府)와 오사카부(大阪府)를 말하며, 현(縣)은 43개의 현을 말한다.
*일본의 행정체계
광역자치체
1都(東京都), 1道(北海道) 2府(京都府․大阪府), 43県
기초자치체
시정촌(市町村)
이러한 도도부현의 행정단위는 메이지기에 만들어져 그 기본골격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
다. 근대 이전의 일본은 중앙은 에도막부(江戸幕府)가 지배하고 지방은 쇼군(将軍)과 주종관
계에 있는 다이묘(大名)라는 영주가 지배하는 막번체제(幕藩体制)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
서 메이지정부(明治政府)는 봉건적인 지배기반을 없애고 근대적인 행정단위를 마련하기 위
해 1871년 7월에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였다. 이는 번을 폐지하고 전국을 부(府)와 현
(県)으로 구분하여 각 부․현에 국가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한 조치이다. 이 조치에 따라 도
쿄(東京), 오사카(大阪), 교토(京都)의 3부와 302현이 탄생했다. 같은 해 11월에 개치부현(改
置府縣)이라고 불리는 조치에 의해 부현의 통폐합이 이루어져 3부 72현이 만들어졌다. 1888
년에 3부 43현 체제가 성립되었고, 1901년에 홋카이도가 지방자치단체가 되면서 47개 도부
현(道府県)이 확정되었다. 1943년에 도쿄부가 도(都)로 바뀌면서 현재의 47도도부현 체제가
확정되었다.
(2) 47개 도도부현
도쿄도는 일본의 수도로 23개의 특별구와 26개 시, 1개군, 4개 지청을 포함하는 광역행정
단위이다. 이 중에서 23개의 특별구만을 가리켜 도쿄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23개 특별구는
특별지방공공단체로 일반시와 거의 같은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홋카이도는 메이지기에 와서 일본영토로 편입되고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홋카이도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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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부현 지명 읽기
■홋카이도지방
北海道(ほっかいどう)
■도호쿠지방
青森(あおもり), 岩手(いわて), 宮城(みやぎ), 秋田(あきた), 山形(やまがた), 福島(ふくしま)
■간토지방
茨城(いばらぎ), 栃木(とちぎ), 群馬(ぐんま), 埼玉(さいたま), 千葉(ちば), 東京(とうきょう), 神奈川
(かながわ)
■주부지방
新潟(にいがた), 富山(とやま), 石川(いしかわ), 福井(ふくい), 山梨(やまなし), 長野(ながの), 岐阜
는 광역자치체의 행정단위의 명칭인데, 다른 도부현과는 달리 홋카이와 도를 분리해서 부르
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홋카이도라는 명칭자체가 고유명사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토와 오사카는 부의 명칭인 동시에 부청 소재지인 도시의 명칭이기도 하다. 교토시와
오사카시는 정령지정도시(政令指定都市)이다. 정령지정도시는 인구 50만 이상의 도시에 대해
지정한 것으로 도도부현에 속하는 사무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고,
행정사무의 편의를 위해 행정구를 설치할 수 있다.
혼슈의 가장 남단에 있는 현은 오키나와현이다. 오키나와현이 정식으로 일본영토로 편입
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류큐처분(琉球処分)에 의해 오키나와현이 정식으로 일본영토로 편
입되고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부여되었다.
(3) 주요 대도시
각 지역의 주요 대도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4년 현재 일본에서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주요 도시는 11개가 있으며, 각 도시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주요 대도시의 인구(2004년)
도쿄(東京)23구---813만 명, 요코하마(横浜)시---349만 명
오사카(大阪)시---249만 명, 나고야(名古屋)시---212만 명
삿포로(札幌)시---184만 명, 고베(神戸)시---148만 명
교토(京都)시---138만 명, 후쿠오카(福岡)시---132만 명
가와사키(川崎)시---127만 명, 히로시마(広島)시---112만 명
사이타마(さいたま)시---104만 명.
2. 8개의 지역구분
일본을 8개의 지역으로 구분하면 홋카이도지방(北海道地方), 도호쿠지방(東北地方), 간토지
방(関東地方), 중부지방(中部地方), 긴키지방(近畿地方), 주고쿠지방(中国地方), 규슈지방(九州
地方), 시코쿠지방(四国地方)으로 나눌 수 있다. 주고쿠지방과 시코쿠지방을 묶어서 7개 지
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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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ぎふ), 静岡(しずおか), 愛知(あいち)
■긴키지방
三重(みえ), 滋賀(しが), 京都(きょうと), 大阪(おおさか), 兵庫(ひょうご), 奈良(なら), 和歌山(わか
やま)
■주고쿠지방
鳥取(とっとり), 島根(しまね), 岡山(おかやま), 広島(ひろしま), 山口(やまぐち)
■시코쿠지방
徳島(とくしま), 香川(かがわ), 愛媛(えひめ), 高知(こうち)
■규슈
福岡(ふくおか), 佐賀(さが), 長崎(ながさき), 熊本(くまもと), 大分(おおいた),, 宮崎(みやざき), 鹿
児島(かごしま), 沖縄(おきなわ)
연습문제
1.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행정단위가 아닌 것은?
① 도(道) ② 부(府)
③ 촌(村) ④ 읍(邑)
정답 ④. 일본의 행정단위는 도도부현(都道府県)의 광역자치체와 시정촌(市町村)의 기초자치
체로 나뉘어져 있다. 도(都)는 도쿄도(東京都), 또 하나의 도(道)는 홋카이도(北海道), 부(府)
는 교토부(京都府)와 오사카부(大阪府)를 말하며, 현(縣)은 본토 북단의 아오모리현(青森県)
에서 남단의 오키나와현(沖縄県)에 이르는 43개의 현을 말한다. 최근 일본정부는 행정의 효
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시정촌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2002년에 3000
개가 넘는 시정촌의 수는 2006년에 1800개로 줄어들었다.
2. 다음 지명 중 43현(縣)에 해당하지 않는 지명은?
① 오카야마(岡山) ② 시가(滋賀)
③ 가가와(香川) ④ 미토(水戸)
정답 ④. 보기 중에서 47개 도도부현의 지명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미토이다. 47개 도도부현
의 명칭과 읽는 방법, 위치 등은 기본적인 사항이므로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3. 47개 도도부현 지명의 한자가 바르게 연결되지 않은 것은?
① 오이타현(大分県) ② 시가현(佐賀県)
③ 오키나와현(沖縄県) ④ 도치기현(栃木県)
정답 ②. 시가현의 한자는 滋賀県이다. ②의 佐賀県은 사가현이라고 읽는다.
4. 일본의 전 국토를 흔히 8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때 사용되는 명칭이 아닌 것은?
① 규슈(九州)지방 ② 사가(佐賀)지방
③ 주부(中部)지방 ④ 긴키(近畿)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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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②.
일본의 전 국토를 8개의 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구분이다.
8개의 지역은 홋카이도지방, 도호쿠지방, 간토지방, 주부지방, 긴키지방, 주고쿠지방, 규슈지
방, 시코쿠지방이다.
5. 다음 중 도호쿠지방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지역은?
① 아키타현 ② 후쿠시마현
③ 돗토리현 ④ 이와테현
정답 ③. 돗토리현은 주고쿠지방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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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홋카이도지방, 도호쿠지방, 간토지방, 주부지방
1. 홋카이도지방
(1) 위치와 지리적 특징
홋카이도는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소야해협을 끼고 사할린과 마주보고 있으
며 동쪽으로는 지시마열도가 있으며, 혼슈와의 사이에는 쓰가루해협이 놓여 있다.
홋카이도는 면적이 상당히 넓어서 일본열도 전체 면적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넓은 면적
에 비해 인구가 적어 인구밀도가 매우 낮다.
홋카이도의 대표적인 도시는 삿포로시로 주변에 오타루시, 지토세시, 도마코마이시 등이
모여 있어 삿포로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홋카이도에는 아름다운 산이나 호수, 온천, 숲, 습지와 같은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홋카이
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시레토코(知床)국립공원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돼 있고 리시
리도(利尻島)와 레분도(礼文島)의 사로베츠(サロベツ)국립공원의 사로베츠원야와 구시로(釧路)
습원국립공원도 유명하다. 오호츠크해에는 얼음 덩어리인 류효(流氷)가 내려와 귀중한 관광
자원이 되기도 한다.
(2) 아이누족의 문화
홋카이도에는 아이누족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아이누족은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유카라라는 불리는 구전문예를 계승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일본인은 근대 이전까지 아이누를 에조라 부르고, 이들이 사는 지역을 에조지(蝦夷地)라고
불렀다. 1868년에 메이지정부는 이 곳을 강제적으로 통합하여 홋카이도라고 칭하고 개척사
(開拓使)를 두어 개척했다. 메이지정부는 아이누의 거주지를 국유화하고, 아이누를 구토인
(旧土人)으로 칭하며 ‘홋카이도구토인보호법(北海道旧土人保護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아이누족의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금지하고 일본문화에 동화될 것을 강제하였다. 그리고 아
이누족에게 농경생활을 강요하고 이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았다.
(3) 경제활동
홋카이도에는 석탄자원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메이지기부터 수많은 탄광이 개발되었다. 그
리고 석탄자원을 생산기지로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 홋카이도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철도
가 건설되었다. 전후에 와서도 홋카이도 개발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에
너지원이 석유로 전환되면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탄광이 폐업하였고, 이
와 더불어 쓸모가 없게 된 철도선이 상당수 폐쇄되었다.
현재 홋카이도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작물들이 재배되고 있다. 농가1호당 경지면적
도 상당히 넓어서 대규모 농업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일본의 식량기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농업이 활발하다.
2. 도호쿠지방
(1) 위치와 지리적 특징
도호쿠지방은 홋카이도 밑의 혼슈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오모리현(青森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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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테현(岩手県), 아키타현(秋田県), 야마가타현(山形県), 미야기현(宮城県), 후쿠시마현(福島
県)을 포함한다.
도호쿠지방의 중앙에는 오우산맥(奥羽山脈)이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어 이 지역을 양분하
고 있다. 오우산맥을 경계로 동해 쪽이 데와(出羽)국이고, 태평양 쪽이 무쓰(陸奥)국인데 이
러한 구분은 고대에 만들어져 에도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왔다. 동해 쪽에 위치한 무쓰국은
일찍부터 해로가 발달해 호쿠리쿠(北陸) 및 긴키지방과 교류하였다. 반면 태평양쪽은 해운보
다는 육로가 발달하였고 육상교통에 의해 간토지방과 이어졌다.
(2) 경제활동
도호쿠지방은 평야가 발달하여 쌀 생산량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평야로는 쓰가루평
야(津軽平野), 아키타평야(秋田平野), 쇼나이평야(庄内平野), 센다이평야(仙台平野) 등이 있
다.
도호쿠지방은 메이지기에 공업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부분 농촌지역이었으며, 또한 추
운 지방이기 때문에 농업 생산력이 낮아 인구증가가 낮았다. 따라서 메이지기에는 공장의
직공이나 여공으로 취직해 도쿄로 이동하는 인구가 많았으며, 1930년대의 대공황을 맞이해
과잉노동력인 농가의 차․삼남이 만주국으로 집단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전후 고도성장기에는 중학생들이 졸업하자마자 집단취직해서 도쿄로 대거 이동하기도 하
였다. 따라서 오랫동안 가난한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게이힌․한신(京浜・阪神)공업지대의 과밀화와 도호쿠지방의
과소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업지역을 이곳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취하면서 일부 지역
에 공업단지가 들어섰다.
도호쿠지방의 중심도시는 센다이시로 센다이시를 중심으로 주변도시를 묶어 센다이대도시
권이라고 부른다. 센다이시는 도호쿠지방을 관할하는 중앙정부의 관청이나 기업지사 등이
몰려 있다.
3. 간토지방
(1) 위치
간토지방은 도호쿠지방의 바로 밑에 위치하며 이바라기현(茨城県), 도치기현(栃木県), 군
마현(群馬県), 사이타마현(埼玉県), 도쿄도(東京都), 지바현(千葉県), 가나가와현(神奈川県)이
포함된다.
(2) 경제활동
간토지방은 일본 인구의 3분의 1이 모여 있을 정도로 인구의 집중도가 크다. 이 지역은
도쿄를 중심으로 메이지기(明治期)부터 공업이 발달하여 대도시가 형성되었고, 전후 고도성
장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더욱 집중하였다. 도쿄만(東京湾) 연안에는 전전부터 게이힌공업지
대(京浜工業地帯)가 형성되었고, 게이힌공업지역 주변의 지바현에는 게이요공업지역(京葉工
業地域)이 형성되었다.
한편 간토 북부의 군마현, 사이타마현, 도치기현에는 기타간토공업지역(北関東工業地域)이
있다. 이 곳은 게이힌공업지대가 과밀해지면서 발전한 곳인데, 그 비중은 계속적으로 커져
게이힌공업지대와 맞먹는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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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도시
도쿄23구는 일본 제일의 도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국회의사당, 최고재판소, 관청
이 모여 있고 도쿄증권거래소나 대기업본사가 모여 있다. 또한 대학이나 문화시설, 출판사,
신문사, 방송국, 대사관, 외국기업, 유학생 등이 몰려있다. 대다수의 정보가 도쿄를 통해 발
신되고 새로운 문화의 흐름이 도쿄에서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도쿄 일극집중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편 인구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과밀화에 따른 문제점도 많다.
일본 제2의 도시인 요코하마시(横浜市)는 에도 말기의 개항 이래 고베와 나란히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하였다. 도쿄만에서 이어지는 게이힌공업지대의 일부를 형성
하고 있다. 한편 요코하마는 도쿄 대도시권의 배후 도시로서도 역할하고 있어 도쿄의 중심
부로 통근․통학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이밖에 가와사키시, 사이타마시도 주요 도시 중의 하나이다. 사이타마시는 사이타마현의
현청소재지로 2001년에 우라와시를 비롯한 3개 도시(浦和·大宮·与野)가 합병해 성립하였고
2005년에는 이와쓰키시(岩槻市)를 편입시켰다.
가와사키시는 가나가와현에 위치하며, 게이힌공업지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재일한국인
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4. 주부지방
(1) 위치와 지역구분
주부지방은 일본 열도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니가타현(新潟県), 도야마현(富山県), 이시카
와현(石川県), 후쿠이현, 야마나시현(山梨県), 나가노현(長野県), 기후현(岐阜県), 시즈오카현
(静岡県), 아이치현(愛知県)의 9개 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부지방은 3개의 지역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동해와 접하고 있는 곳을 호쿠
리쿠지방이라 부르고, 내륙부의 높은 산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중앙고지(中央高地) 또는 고
신지방(甲信地方)이라고 한다.
태평양에 접한 지역은 도카이지방(東海地方)이라고 부른다. 도카이라는 이름은 태평양에
면한 이 지역을 고대에 도카이도(東海道)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2) 기후
호쿠리쿠지방과 중앙의 산악지방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이는 시
베리아로부터 부는 북서계절풍이 겨울에 동해의 난류로부터 습기를 공급받아 산지에 부딪히
면서 많은 양의 눈을 뿌리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12월부터 2월까지는 눈이 많고 산간부
에는 2-4m의 눈이 쌓이기도 한다.
(3) 경제활동
호쿠리쿠지방은 예로부터 에치고평야(越後平野)를 중심으로 쌀만을 생산하는 수전단작(水
田単作) 지대를 형성해왔다. 눈에 막힌 긴 겨울 동안 일이 없는 농가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다른 지역으로 돈벌러 나가든지(出稼ぎ) 집에서 부업을 하였다. 이로 인해 전통공업이 발달
하였는데 후쿠이(福井)·가나자와(金沢)에는 고급 견직물, 와지마(輪島)는 칠기, 다카오카(高
岡)는 동기(銅器), 산죠(三条)․쓰바메(燕)에는 가나모노(金物) 등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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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에 접한 도카이지방은 인구가 집중돼 있는데,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대
규모 주쿄공업지대(中京工業地帯)가 형성돼 있다. 주쿄공업지대의 동쪽으로는 도카이공업지
역(東海工業地域)이 형성돼 있다. 메이지에 와서 도카이도본선이 정비되면서 공업지역으로
성장하였고 특히 전후 고도성장기에 도쿄 일극 집중이 강화되면서 게이한신과 도쿄를 단거
리·단시간으로 연결하는 공업지대로 더욱 발전하였다.
아이치현의 동부에서 시즈오카현에는 넓은 대지(台地)가 형성돼 있는데 이 곳은 일본 제
일의 차 생산지이기도 하다.
(3) 주요도시
대표적인 도시로는 나고야시(名古屋市)가 있는데,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나고야권을 형성하
고 있다. 수도권과 게이한신에 이은 대도시권이다.
나고야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3대도시권의 하나인 주쿄지방의 중심도시이다.
교통의 중심지로 도카이도신칸센(東海道新幹線)을 비롯해 도카이도본선(東海道本線), 중앙본
선(中央本線), 간사이본선(関西本線) 등의 철도가 지나고 있으며, 도쿄나 오사카, 중앙고지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연습문제
1. 도호쿠지방의 한 가운데를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는 산맥은?
① 아카이시산맥(赤石山脈) ② 오우산맥(奥羽山脈)
③ 에치고산맥(越後山脈) ④ 데시오산지(天塩山地)
정답 ②.
아카이시산맥은 혼슈의 중앙부에 위치한 산맥이다.
에치고산맥은 니가타현 쪽에 위치한 산맥이다.
데시오산지는 홋카이도에 위치한 산맥이다.
2. 다음 중 도호쿠지방에 위치한 평야가 아닌 것은?
① 아키타(秋田)평야
② 이시카리(石狩)평야
③ 쓰가루(津軽)평야
④ 쇼나이(庄内)평야
정답 ②. 이시카리평야는 홋카이도지방에 위치한다.
3. 근대 이전에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리던 곳으로 메이지기에 와서 일본영토로 편입되어 본
격적인 개척이 이루어진 곳은?
① 가라후토(樺太)
② 아마미제도(奄美諸島)
③ 홋카이도(北海道)
④ 오키나와(沖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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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③. 홋카이도는 선사시대부터 아이누족이 거주하였던 곳인데, 1868년 메이지정부는 이곳
을 강제적으로 통합시켜여 홋카이도라 칭하고 개척사를 두어 본격적인 개척사업을 실시했다.
4. 다음은 어느 지방에 대한 설명인가?
메이지기부터 공업이 발달하여 대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전후 고
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더욱 인구가 집중하였다. 현재 일본인구의
3분의 1이 모여 있을 정도로 인구의 집중도가 크다.
① 주고쿠(中国)지방 ② 간토(関東)지방
③ 긴키(近畿)지방 ④ 주쿄(中京)지방
정답 ②. 간토지방에는 도쿄23구를 비롯해 요코하마시, 가와사키시, 사이타마시, 지바시 등
대도시가 있으며, 이들 대도시 주변에 게이힌공업지대, 게이요공업지대, 기타칸토공업지역이
있다.
5. 다음에 제시한 현(縣) 중에서 주부지방에 속하지 않는 곳은?
① 이시카와현
② 기후현
③ 아이치현
④ 히로시마현
정답 ④. 히로시마현은 주고쿠지방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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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긴키지방, 주고쿠지방, 시코쿠지방, 규슈지방
1. 긴키지방
(1) 위치와 지리적 특징
긴키지방에는 효고현(兵庫県), 교토부, 시가현(滋賀県), 오사카부, 와카야마현(和歌山県), 나
라현(奈良県), 미에현 등이 포함된다.
이 지역은 고대부터 수도가 위치하여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긴키
의 기(畿)는 수도(都, 미야코)라는 의미로 긴키는 수도에 가까운 지역, 즉 수도권을 말한다.
고대부터 긴키지방은 수도로서 역할을 해 왔다.
(2) 주요 도시
긴키지방의 중심도시로는 교토, 오사카, 고베 등이 있는데, 이들 도시의 머리글자를 따 게
이한신(京阪神)이라고 부른다. 이 세 개의 도시를 잇는 형태로 대도시권이 발달해 있고 철도
와 사철이 발달되어 있으며 고속도로도 발달되어 있다.
오사카는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에도시대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전국의 쌀이나 특산물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직인이나 상인을 중심으로 한 조닌
문화도 발전하였다. 따라서 현재에도 도매업은 서일본이 힘을 갖고 있을 정도로 오사카의
도매상 거리(問屋街)는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오사카시의 이쿠노구(生野区)에는 많은 재
일한국인이 살고 있다.
교토시(京都市)는 794년에 헤이안쿄(平安京)로 건설되어 천 년간 일본의 수도로서 역할해
왔다. 교토에는 역사적 풍토 및 시설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많은 신사(神社)와 절, 불각(佛
閣), 일본정원 등이 있다.
고베시는 에도 말기에 개국하면서 개항지로 발달한 곳이다. 개항 이래 고베에는 유럽이나
중국 등에서 온 사람들은 많이 모여 살면서 외국풍의 생활양식을 많이 남겼다. 고베시는 한
신공업지대의 일부로 철강이나 조선, 기계공업이 발전해 있는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나라시(奈良市)는 교토에서 전철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헤이안쿄로 수도가 옮겨지
기 전인 710-794년까지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율령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고대에 중국이나 백
제로부터 영향을 깊게 받아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2. 주고쿠지방
(1) 위치와 지역 구분
주고쿠지방은 돗토리현(鳥取県), 시마네현(島根県), 오카야마현(岡山県), 히로시마현(広島
県), 야마구치현(山口県) 등을 포함한다.
주고쿠지방을 가리켜 다른 말로는 산인․산요지방이라고도 일컫는다. 주고쿠지방에는 주
고쿠산지(中国山地)가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어 주고쿠산지를 경계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해 쪽이 산인지방(山陰地方-돗토리현, 시마네현)이고,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와 닿는 지
역이 산요지방(山陽地方-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이다.
주고쿠지방은 평야나 분지가 좁고 적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교통망의 정비가 늦어지고 공
업의 발달도 뒤쳐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해 쪽은 이러한 발전으로부터 뒤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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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산요지방과의 격차가 크다. 반면 산요지방은 산요신칸센(山陽新幹線)이나 산요자동차도
(山陽自動車道)를 통해 도쿄와 규슈로 연결된다.
(2) 경제활동과 주요 도시
세토나이카이에 면한 지역은 원래 어업이 활발한 곳이다. 해안어업과 더불어 에도시대부
터 히로시마만(広島湾)에서 굴이나 김 양식을 하였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는 도미나 새
우 등의 양식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한 이 지역은 고도성장기에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세토우치공업지역(瀬戸内工業地域)을 형성하고 있다.
주고쿠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로는 히로시마시(広島시)를 들 수 있다. 히로시마는 오타가와
(太田川) 하류 삼각지에 있는 도시로 에도시대에는 일본에서 열 번째에 들어가는 조카마치
(城下町)로 성장하였다. 주고쿠지방의 거점도시로 7대도시권 중의 하나이며 히로시마시와 주
변 도시가 이어져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공업도시로서 연안부는 공업지대를 형성하
고 있다. 히로시마는 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20만 명이 넘는 사
람들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3. 시코쿠지방
(1) 위치와 지역 구분
시코쿠지방은 도쿠시마현(徳島県), 고치현(高知県), 가가와현(香川県), 에히메현(愛媛県)으
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경제발전에서 뒤쳐졌고 인구규모도
작아 시코쿠 경제는 전국에서 차지하는 경제규모가 상당히 작다.
시코쿠지방에는 시코쿠산지(四国山地)가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어 지역을 양분하고 있다.
4개의 현은 지금까지 각각 따로따로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섬내의 교류보다는 본토와의 연결
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각 현은 개별적으로 본토와의 연결을 유지해왔는데, 도쿠시마현은
긴키지방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긴키지방과 교류가 많다. 반면 가가와현은 문화, 경제
양면에서 오카야마현과의 관계가 밀접하고 에히메현은 히로시마현과 교류가 활발하다.
특히 최근에 효고현과 도쿠시마현, 오카야마현과 가가와현, 히로시마현과 에히메현을 잇는
세 개 경로의 다리가 개통되면서 시코쿠지방과 혼슈와의 연결은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2) 경제활동
세토나이카이와 면한 지역은 세토나이카이공업지역으로서 공업활동이 활발하다. 반면 어
업도 활발하다. 그리고 기후가 온난하고 비가 적기 때문에 올리브나 미캉과 같은 과일의 재
배도 활발하다.
4. 규슈지방
(1) 위치와 지리적 특징
규슈지방은 후쿠오카현(福岡県), 사가현(佐賀県), 나가사키현(長崎県), 구마모토현(熊本
県), 오이타현(大分県), 가고시마현(鹿児島県), 미야자키현(宮崎県), 오키나와현이 포함된다.
규슈지방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아시아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고대에는 대륙으로
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대에 대륙문화의 교류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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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내는 귀중한 자료가 다수 발견된다. 또한 에도시대에 쇄국을 하던 시기에도 나가사키와
같은 지역은 중국과 네덜란드와의 무역 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주요 도시
규슈의 대표적인 도시로서는 후쿠오카시(福岡市)를 들 수 있다. 후쿠오카시는 규슈지방의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규슈지방에서 가장 큰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후쿠오카시 주변을 포함
한 후쿠오카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후쿠오카시는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 가까워 교
류가 활발하다. 후쿠오카로부터 부산까지는 약 200km 떨어져 있는데 고속선으로 약 3시간
걸린다. 1980년대 이후 후쿠오카공항에서 아시아 각지로 가는 국제항공편이 늘고 고속선이
개설되어 아시아와의 교류가 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기타큐슈시도 대표적인 도시로 간몬해협에 면해 있다. 1963년에 모지시(門司市)를 비롯한
고쿠라시(小倉市), 도바타시(戸畑市), 야하타시(八幡市), 와카마쓰시(若松市) 등의 5개의 시가
합병해 탄생하였다. 기타큐슈시를 중심으로 하는 기타큐슈도시권은 기타큐슈공업지대를 형
성하고 있다. 예전에는 중화학공업이 활발하였으나, 지금은 업종전환이 일어나고 있으며
IT산업이나 자동차산업의 진출이 활발하다.
오키나와는 메이지기에 일본영토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독자적인 류큐문화를 이루어왔다.
15세기에 통일왕국을 이루었고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나 중국대륙,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였다. 이 곳에는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해 류큐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사적이
나 풍속을 볼 수 있다.
5. 지명의 옛 이름
일본에는 고대부터 사용되던 지명이 도시명이나 반도, 만, 해협 등의 지명으로 그대로 사
용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예전 지명 그대로는 아니지만 예전의 명칭에서 유래하여 사용되
는 경우가 있는데 고속도로나 철도의 노선 명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들 옛 지명은 고대에 율령국가를 확립하던 때에 행정구분시 사용되던 지명에서 유래한
다. 701년 다이호율령(大宝律令)에서는 전국을 5기(5畿)와 7도(7道)로 나누고, 이를 다시 국
(国), 군(郡), 리(里)로 나누었다. 이러한 제도에 의해 전국에 60여 개 국이 탄생하였는데 이
러한 행정구획의 명칭은 에도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져왔다.
7도는 크게 도산도(東山道), 도카이도(東海道), 호쿠리쿠도(北陸道), 난카이도(南海道), 산
인도(山陰道), 산요도(山陽道), 사이카이도(西海道)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7도의 명칭은 오늘
날의 지역구분에서도 자주 사용되며, 철도나 노선 명에서도 사용된다.
예전의 국명에 유래해서 지금도 자주 쓰이는 명칭은 고신지방 또는 고신에쓰지방과 같은
명칭이다. 고신지방은 일반적으로 야마나시현와 나가노현을 가리키며, 고신에쓰(甲信越)지방
은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니가타현을 가리킨다. 고대에 야마나시는 가이(甲斐), 나가노는 시
나노(信濃), 니가타는 에치고(越後)라고 불렀는데 고신지방이나 고신에쓰지방과 같은 명칭은
바로 예전 이름의 머리 한자를 딴 것이다.
연습문제
1. 다음은 어느 지방에 대한 설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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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화산활동이 활발하다. 최근 아소산(阿蘇山)이나
사쿠라지마(桜島)와 같은 화산에서는 분화가 일어나 주변
지역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① 규슈(九州)지방 ② 주고쿠(中国)지방
③ 긴키(近畿)지방 ④ 주쿄(中京)지방
정답 ①. 규슈지방에는 현재 사쿠라지마나 아소산, 운젠·후겐다케 등 분화 중인 화산이 많
다.
2. 주고쿠지방(中国地方)을 크게 2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때 이에 해당하는 명칭은?
① 고신에쓰(甲信越)지방 ② 산인(山陰)지방
③ 도카이(東海)지방 ④ 고신(甲信)지방
정답 ②. 일반적으로 주고쿠지방은 주고쿠산지(中国山地)를 기준으로 동해 쪽을 산인지방(山
陰地方),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쪽을 산요지방(山陽地方)으로 구분한다.
3. 다음 중 긴키지방(近畿地方)에 속한다고 보기 어려운 지역은?
① 미에현 ② 시가현
③ 와카야마현 ④ 오이타현
정답 ④. 오이타현은 규슈지방에 속한다.
4. 고대 율령국가가 확립되던 시기에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7도(道)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① 호쿠리쿠도(北陸道) ② 홋카이도(北海道)
③ 난카이도(南海道) ④ 사이카이도(西海道)
정답 ②. 고대에 사용되었던 7도의 명칭은 도산도(東山道), 도카이도(東海道), 호쿠리쿠도(北
陸道), 난카이도(南海道), 산인도(山陰道), 산요도(山陽道), 사이카이도(西海道)이다. 홋카이도
라는 명칭은 메이지정부가 홋카이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켜 개척하면서 만든 명칭이다.
5. 다음은 어느 지방에 대한 설명인가?
이 곳은 아시아대륙과 가까워 고대부터 대륙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하였다. 현재에도 이 곳에는 아시아 각지로 가는 항공로가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① 주고쿠(中国)지방 ② 규슈(九州)지방
③ 긴키(近畿)지방 ④ 시코쿠(四国)지방
정답 ②. 규슈지방은 아시아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고대에는 대륙으로부터 선진적인 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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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창구역할을 하였다. 규슈지방에는 고대에 대륙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귀중한 자
료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중국상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중국인거리가 형성되기도 하
였다. 에도시대에 쇄국을 하던 시기에도 나가사키와 같은 지역은 중국·네덜란드와의 무역
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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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지역사회와 교통망
1. 교통망 개관
메이지정부는 1870년대부터 국가가 주도하여 관영철도(官營鐵道)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철
도를 건설할 자금이 부족하자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철도를 부설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메
이지 말기가 되면 일본열도가 도호쿠지방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나고야, 오사카를 거쳐 규슈
의 남단에까지 이르기까지 철도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일본의 동맥을
잇는 이러한 간선(幹線)을 토대로 지방과 지방을 잇는 지선(支線)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전후에 와서 철도를 대신하여 교통망의 중심이 된 것은 고속도로이다. 1960년대에 자동차
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시대가 시작되면서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메이신고속도로
(名神高速道路)와 도메이고속도로(東名高速道路)가 개통되고 이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일본
열도를 종단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철도에 있어서도 재래선(在来線)을 대신하여 고속철도, 즉 신칸센의 개통이 이루어졌다.
1964년 도카이도신칸센의 개통을 시작으로 그후 일본열도를 관통하는 신칸센의 개통이 이루
어졌다. 이로써 지역간 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최근에 와서는 비행기도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대두하고 있다. 물론 여객수송에서 차지하
는 비중은 상당히 적지만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내 항공망은 주로 도쿄와 지방
의 대도시를 연결하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2. 철도
(1) 재래선
*도카이도본선(東海道本線)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노선으로 도쿄에서 고베까지 이어진다. 도카이도본선은 1872
년에 도쿄의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를 잇는 관영철도가 처음 개통되었고, 그 후 간토지방
과 간사이지방을 연결하는 간선으로 본격적으로 건설되어 1889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한편 1964년에 같은 구간을 달리는 도카이도신칸센이 개통되면서 도카이도본선은 원거리
도시 간을 연결하는 연락철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는 주로 도쿄나 나고야,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근거리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운행되고 있다.
*도호쿠본선(東北本線)
도쿄와 도호쿠지방을 연결하는 간선으로 도쿄에서 아오모리(青森)까지 이어진다. 도호쿠본
선은 1883년에 도쿄의 우에노(上野)에서 구마가야(熊谷) 간을 개통하여 영업을 시작하였고
그 후 계속적으로 구간을 연장하여 1891년에 우에노에서 아오모리까지의 전 구간이 개통되
었다.
도호쿠본선도 역시 도호쿠신칸센이 개통되면서 장거리 도시 간 수송기능을 도호쿠신칸센
에 넘겨주고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근거리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으
로 이용되고 있다.
*산요본선(山陽本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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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본선이 끝나는 지점인 고베에서 규슈지방으로 이어진다. 시모노세키(下関)역을 지
나 해저에 있는 간몬(関門)터널을 통과해 기타큐슈시에 도달한다. 1888년에 부분개통이 이루
어지고 1901년에 고베에서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1942년에 혼슈와 규
슈 사이의 바다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간몬터널이 개통하여 철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산요신칸센의 개통으로 산요본선의 기능도 주요 도시와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바
뀌게 되었다.
*가고시마본선(鹿児島本線)
산요본선이 끝나는 곳에서 가고시마본선이 시작된다. 가고시마본선은 기타큐슈에서 출발
하여 구마모토(熊本)를 경유하여 가고시마에 이른다. 1889년에 부분개통이 이루어지고 1896
년에는 야쓰시로(八代)까지 개통되어 거의 완성되었다.
(2) 신칸센
*도카이도신칸센(東海道新幹線)
도쿄올림픽 개회 직전인 1964년 10월 1일에 개통되었다. 도쿄에서 오사카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주요 도시를 통과하는 노선으로 1일 이용자 수가 가장 많은 노선이기도 하다.
*산요신칸센(山陽新幹線)
오사카에서 출발하여 고베를 거쳐 오카야마, 히로시마, 하카타로 이어진다. 1972년에 부분
개통되고 1975년에 오사카에서 하카타 간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도카이도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은 도쿄에서 출발하여 오사카를 거쳐 규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
로 두 노선을 합쳐 도카이도․산요신칸센으로 부른다.
*도호쿠신칸센(東北新幹線)
도호쿠신칸센은 도쿄에서 하치노헤(八戸)에 이른다. 1982년에 오미야에서 모리오카 간이
개통되었고, 2002년에 노선이 연장되어 모리오카에서 하치노헤 구간이 개통되었다. 2010년에
하치노헤와 아오모리 간을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될 예정이다.
*야마가타신칸센(山形新幹線)
후쿠시마에서 도호쿠신칸센으로부터 분기하여 야마가타(山形)를 거쳐 신조(新庄)에 이른
다. 건설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재래선을 개량해서 사용하는 미니신칸센 방식을 취했
다.
*아키타신칸센(秋田新幹線)
아키타신칸센은 모리오카에서 도호쿠신칸센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아키타(秋田)에 이른다.
1997년에 모리오카에서 아키타 간이 개통되었는데, 야마가타신칸센과 마찬가지로 미니신칸
센 방식을 취했다.
*조에쓰신칸센(上越新幹線)
조에쓰신칸센은 도쿄와 니가타(新潟)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오미야에서 도호쿠신칸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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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터 갈라져 나온다.
*나가노신칸센(長野新幹線)
나가노신칸센은 도쿄에서 출발하여 나가노(長野)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1997년 10월 1일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최에 맞추어 개통되었다. 나가노신칸센은 오사카에서 호쿠리쿠지방의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으로서 계획되었으며, 현재의 노선에서 연장되어 오사카에서 후쿠이,
가나자와(金沢), 도야마(富山)를 거쳐 나가노에 이르는 약 600킬로미터의 호쿠리쿠신칸센(北
陸新幹線)이 2014년 개통을 목표로 정비 중에 있다.
*규슈신칸센(九州新幹線)
2001년에 착공하여 2004년에 구마모토현의 야쓰시로에서 가고시마시(鹿児島市)의 가고시
마중앙(鹿児島中央)역에 이르는 구간이 개통되었다. 규슈신칸센은 2010년 개통을 목표로 현
재 하카타에서 나가사키 간의 구간과, 하카타에서 야쓰시로에 이르는 구간이 계획되어 있다.
*홋카이도신칸센(北海道新幹線)
삿포로시(札幌市)에서 출발하여 쓰가루해협을 지나 도호쿠지방의 아오모리시에 이르는 약
360km 구간으로 현재 건설 중에 있다.
3. 고속도로
*도메이고속도로(東名高速道路)
도쿄에서 나고야에 이르는 고속도로로 1968년에 개통을 시작하여 1969년에 전 구간이 개
통되었다. 도카이도 물류의 대동맥과 같은 노선으로 통행량이 가장 많으며, 교통정체를 해소
하기 위해 현재 제2도메이고속도로가 건설 중에 있다.
*메이신고속도로(名神高速道路)
1963년에 개통을 시작해 1965년에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고
속도로로 나고야와 오사카, 고베를 잇는 간사이지방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앙자동차도(中央自動車道)
도쿄에서 출발하여 가나가와현,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기후현, 아이치현으로 이어지는 자
동차도이다.
*도호쿠자동차도(東北自動車道)
간토지방에서 도호쿠지방을 종단하는 동일본의 대동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川口市)에서 시작하여 아오모리에 이른다.
*주고쿠자동차도(中国自動車道)
오사카부 스이타시(吹田市)에서 출발하여 효고현,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시네마현을 경
유해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 이른다. 산간부를 통과하기 때문에 급커브, 급경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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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요자동차도(山陽自動車道)
효고현 고베시에서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을 경우해서 야마구치현에 이르는 노선으로, 노
선의 대부분은 산요신칸센과 평행해서 이어지고 있다.
*규슈자동차도(九州自動車道)
규슈지방을 관통하는 자동차도이다.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출발하여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에 이른다.
*홋카이도지방의 자동차도
홋카이도를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고속도로로 도오자동차도(道央自動車道)가 있으며, 홋
카이도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고속도로로서 도토자동차도(道東自動車道)가 있다.
*아키타자동차도(秋田自動車道)·야마가타자동차도(山形自動車道)
도호쿠자동차도를 따라 가다가 동해 쪽으로 들어가 아키타로 이어지는 것이 아키타자동차
도이고, 야마가타를 경유하는 도로가 야마카타자동차도이다.
*호쿠리쿠자동차도(北陸自動車道)
호쿠리쿠지방의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이며 니가타에서 시작하여 시가현 마이바라에
이른다.
4. 항공망
*도쿄국제공항(東京国際空港)
도쿄의 하네다(羽田)에 위치하며 일본 국내 여객의 60%를 점유할 정도로 이용자 수가 많
다. 나리타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이 생기면서 국제선은 나리타공항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
내선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다. 2003년에 도쿄와 서울을 잇는 노선이 개업을 하면서 양국을
오가는 이용자 수가 상당히 많다.
*나리타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
도쿄 도심에서 약 60km 떨어진 지바현 나리타시(成田市)에 위치하고 있다. 나리타공항은
하네다공항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해 1978년에 개항하였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공항으로
세계 각국의 국제노선이 운항하고 있다.
*후쿠오카공항(福岡空港)
규슈지방의 중심 공항으로서 아시아와 가깝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류가 활발한 규슈지방의
국내외 항공이동을 담당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지로 가는 국
제항공편이 늘면서 아시아 각지와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신치토세공항(新千歳空港)
지토세시(千歳市)에 위치하고 있는 홋카이도의 대표적인 공항이다. 국내 노선으로 신치토
세와 도쿄 간의 이용자 수가 한 개 노선으로는 세계 최대라고 할 정도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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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국제공항(大阪国際空港)
원래는 국제공항으로 출발하였으나 소음문제가 심각해 주민소송이 제기되자 대체공항으로
서 간사이국제공항이 건설되었다. 간사이국제공항(関西国際空港)이 완공되면서 폐쇄할 예정
이었지만 주변 주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반대하면서 국내선 전용공항으로서 존속하게 되었
다. 현재에도 간사이지방의 중추적인 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간사이국제공항(関西国際空港)
오사카만(大阪湾) 센슈오키(泉州沖)의 인공섬을 조성하여 1994년에 개항하였다. 간사이지
방의 국제항공 노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24시간 운영하고 있다.
*나하공항(那覇空港)
오키나와현 나하시(那覇市)에 위치한 공항으로 오키나와 지역의 허브공항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주부국제공항(中部国際空港)
2005년에 개항하였고 나고야시에서 남쪽으로 35km 떨어진 이세만(伊勢湾) 동부의 해상에
바다를 매립하여 건설하였다. 24시간 공항으로서 아이치현에서 운영하는 나고야공항(名古屋
空港)과 연계하여 주부지방의 항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베공항(神戸空港)
2006년 2월에 개항하였고 효고현 고베시에 인공섬을 매립하여 만든 공항이다.
*신키타큐슈공항(新北九州空港)
2006년 3월에 개항한 공항으로 기타큐슈시 동부 해안에 인공으로 조성된 공항으로 24시간
운행된다.
5. 교량과 터널
(1) 세이칸터널
홋카이도와 도호쿠지방을 연결하는 세이칸터널은 아오모리현의 히가시Tm가루(東津軽)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시(函館市)를 연결하는 터널로 1988년에 개통되었다.
홋카이도 신칸센과 연계해 건설되었지만 홋카이도신칸센 건설이 늦어지고 도쿄에서 홋카
이도로 오는 여객의 90% 이상이 항공기를 이용하게 되면서 이 철도노선을 이용하는 여객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홋카이도신칸센이 개통되면 4시간 안에 도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용자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된다.
(2) 혼슈시코쿠연락교
시코쿠과 혼슈를 잇는 연락교는 크게 3개의 루트가 있다. 이 세 개의 연락교를 합해 혼슈
시코쿠연락교(本州四国連絡橋)라고 하며, 이 세 개의 루트를 포함한 자동차도를 가리켜 혼슈
시코쿠연락도로(本州四国連絡道路)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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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오하시(瀬戸大橋)
세토오하시는 가가와현 사카이데(坂出)와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倉敷市)의 고지마(児島)
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도로와 철도 겸용의 2층으로 되어 있다. 1979년부터 순차적으로 개통
되어 1988년에 전부 개통되었다. 세토오하시는 5개의 섬을 연결하는 모두 6개의 다리를 총
칭한다.
*아카시해협대교(明石海峡大橋)
고베와 도쿠시마를 연결하는 다리로 모두 2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오나루토하시(大
鳴門橋)는 도쿠시마의 나루토시(鳴門市)와 아와지시마(淡路島)를 연결하는 다리로 1985년에
개통되었다.
1998년에는 혼슈의 고베와 시코쿠 사이에 있는 아와지시마(淡路島)를 연결하는 아카시해
협대교(明石海峡大橋)가 완성되어 게이한신(京阪神)과 시코쿠(四国)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세토우치 시마나미카이도(瀬戸内しまなみ海道)
1999년에는 세토우치시마나미카이도로 불리는 다리가 개통되었다. 이는 히로시마현 오노
미치(尾道)와 에히메현 이마바리(今治) 간을 연결하는 다리로 2006년에 일부 미개통 구간이
전부 개통됨으로서 하나의 도로로서 연결되었다.
연습문제
1.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철도 노선으로 도쿄에서 고베까지 이어지는 재래선의 명칭
은?
① 도카이도본선(東海道本線) ② 하코다테본선(函館本線)
③ 도호쿠본선(東北本線) ④ 간사이본선(関西本線)
정답 ①. 도카이도본선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노선으로 도쿄에서 고베까지 이어진다.
도카이도본선은 1872년에 도쿄의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를 잇는 관영철도가 처음 개통되
었고, 그 후 간토지방과 간사이지방을 연결하는 간선으로 계획되어 1889년 전 구간이 개통
되었다. 한편 1964년에 같은 구간을 달리는 도카이도신칸센이 개통되면서 도카이도본선은
도쿄나 나고야,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권을 중심으로 근거리 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운행
되고 있다.
2. 산요본선(山陽本線)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도쿄에서 출발하여 센다이를 거쳐 아오모리에 이른다.
② 규슈지방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철도 노선이다.
③ 고베에서 출발하여 시모노세키를 지나 기타큐슈로 이어진다.
④ 도쿄와 나고야의 대도시권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정답 ③. 산요본선은 도카이도본선이 끝나는 지점인 고베에서 규슈지방으로 이어진다.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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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고베에서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전 구간이 개통되었고, 1942년에 혼슈와 규슈 사이의
바다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간몬터널이 개통하여 철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3. 다음 중 홋카이도를 달리는 고속도로의 노선명은?
① 도오자동차도(道央自動車道)
② 중앙자동차도(中央自動車道)
③ 도메이고속도로(東名自動車道)
④ 간에쓰자동차도(関越自動車道)
정답 ①. 홋카이도를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고속도로가 도오자동차도(道央自動車道)이며,
홋카이도를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고속도로가 도토자동차도(道東自動車道)이다.
4. 도쿄로 이동하는 국내 여객 수가 상당히 많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과 가까워 예로부
터 아시아 각지와 교류가 활발한 규슈지방의 중심 공항은?
① 후쿠오카공항 ② 주부국제공항
③ 신치토세공항 ④ 나하공항
정답 ①. 후쿠오카공항은 규슈지방의 중심 공항으로 1980년대 이후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
아 각지로 가는 국제항공편이 늘면서 아시아 각지와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5. 도쿄올림픽 개회 직전에 개통되었으며, 간토지방과 간사이지방의 주요도시를 통과하며, 가장
이용자수가 많은 신칸센의 노선은?
① 도카이도신칸센(東海道新幹線)
② 도호쿠신칸센(東北新幹線)
③ 나가노신칸센(長野新幹線)
④ 조에쓰신칸센(上越新幹線)
정답 ①. 도카이도신칸센은 도쿄올림픽 개회 직전인 1964년 10월 1일에 개통되었다. 도쿄에
서 오사카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주요 도시를 통과하기 때문에 1일 이용자 수가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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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지역사회의 경제활동
1. 지역간 경제격차의 구조
(1) 산업별 인구구성
47개 도도부현의 산업별 인구구성을 보면, 제1차산업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 있다. 제1차산
업인구의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는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자키현, 고치현, 구마모토현,
가고시마현 등이 있다. 제1차산업에 종사하는 취업인구의 비율이 높은 지역은 대체로 도호
쿠지방이나 규슈지방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제3차산업의 비중이 높은 지역으로는 도쿄도를 비롯해 오키나와현, 후쿠오카현, 지바현,
가나가와현, 홋카이도, 오사카부 등이 있다. 오키나와현과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이들
지역은 대체로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가 발달해 있는 지역으로 대도시 주변에 대규모
공업지역이 형성돼 있다.
반면 제2차산업의 비중이 큰 지역으로는 시가현, 기후현, 도야마현, 시즈오카현, 후쿠이현,
아이치현, 군마현, 도치기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지역은 제1차산업의 비중이 상대적
으로 적거나 또는 제3차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경우인데, 대체로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공업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2) 부문별 경제규모
[표 6-1]에 따르면 농업생산액이 가장 높은 지역은 홋카이도로 그 규모는 1조 엔이 넘는
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생산액의 규모가 수천 억 엔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4000억 엔 이상의 비교적 높은 생산액을 나타내는 현으로는 지바현, 이바라기현, 가고시마현
이 있다.
[표 6-1] 농업생산액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1-5위, 2002)
높은 지역
농업생산액(백
억 엔)
낮은 지역
농업생산액(백
억 엔)
홋카이도 105 도쿄도 3
지바현 43 오사카부 3
이바라기현 41 후쿠이현 5
가고시마현 40 나라현 5
구마모토현 32 시마네현 5
자료: 二宮書店編, 2005, 『日本の地理統計要覽2005』를 인용하여 작성.
[표 6-2]에 따르면 공업 생산액의 규모가 가장 큰 현은 아이치현으로 그 규모는 34조 엔
이 넘는다. 그 외에 공업 생산액이 10조 엔을 넘는 지역으로는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오
사카부, 사이타마현 등이 있다. 낮은 지역은 고치현, 오키나와현, 시마네현, 돗토리현, 아오모
리현이다.
[표 6-2] 공업생산액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1-5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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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지역
공업생산액(백
억 엔)
낮은 지역
공업생산액(백
억 엔)
아이치현 3452 고치현 54
가나가와현 1796 오키나와현 57
시즈오카현 1618 시마네현 100
오사카부 1579 돗토리현 102
사이타마현 1276 아오모리현 119
자료: 二宮書店編, 2005, 『日本の地理統計要覽2005』를 인용하여 작성.
[표 6-3]에 따르면 상점 판매액이 가장 높은 지역은 도쿄도로 그 규모는 176조 엔에 이른
다. 그 다음이 오사카부로 그 규모는 도쿄도의 3분의 1 수준인 63조 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 상점 판매액이 10조 엔을 넘는 지역으로는 아이치현, 후쿠오카현, 홋카이도가 있다. 낮
은 지역으로는 돗토리현, 고치현, 시마네현, 도쿠시마현, 사가현이 있다.
[표 6-3] 상점 판매액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1-5위, 2002)
높은 지역
상점판매액(백
억 엔)
낮은 지역
상점판매액(백
억 엔)
도쿄도 17670 돗토리현 150
오사카부 6316 고치현 170
아이치현 4152 시마네현 170
후쿠오카현 2203 도쿠시마현 182
홋카이도 2024 사가현 187
자료: 二宮書店編, 2005, 『日本の地理統計要覽2005』를 인용하여 작성.
2. 지역간 인구 격차
(1) 인구규모의 격차
지역간 경제격차의 구조는 인구구조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대규모 공업지역이 형성
되어 있는 경우 주변 인구를 끌어들임으로써 인구증가가 일어나고 다른 지역에서는 유출이
일어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47개 도도부현의 인구규모를 지역별로 보면 인구가 500만 명이 넘는 곳은 모두 9개의 지
역으로 홋카이도, 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 아이치현, 오사카부, 효고현, 후쿠
오카현이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중에서 6개 지역이 도쿄와 오사카를 비롯한 그 주변지
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지역은 임해공업지역을 끼고 있어 대규모 공업단지 주
변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이를 가리켜 3대 도시권이라고 한다.
3대도시권은 도쿄권(도쿄도,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지바현), 오사카권(오사카부, 교토부,
효고현, 시가현, 나라현), 나고야권(아이치현, 기후현, 미에현)]을 말한다.
반면 현 중에는 인구 100만명 이하 내지는 100만명이 조금 넘는 현도 상당수 있다. 100만
명 이하의 현으로는 후쿠이현, 야마나시현, 시마네현, 돗토리현, 도쿠시마현, 고치현, 사가현
이 있다. 150만 이하의 현도 14개 현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많다.
(2) 인구증가율과 고령자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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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간 인구격차는 인구증가율과 고령자 인구의 비율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인구증가율
은 1970년에 10.5%, 1980년에 11.3%, 1990년에 5.5%로 1990년대에 와서 크게 둔화되었는데,
2004년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낮은 1.1%를 나타낸다.
[표 6-4]에서는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의 1년간 인구증가율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인구
증가율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2004년에 인구가 증가한 지역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인구증가율
이 높은 지역으로는 도쿄도, 오키나와현, 가나가와현, 아이치현, 시가현이 있다. 반면 인구
감소율이 높은 지역으로는 아키타현, 시마네현, 아오모리현, 야마가타현, 와카야마현 등이 있
다. 이외에도 인구감소지역은 다수이다.
[표 6-4] 인구증가율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1-5위, 2004)
인구증가 지역 인구증가율(%) 인구감소 지역 인구증가율(%)
도쿄도 7.1 아키타현 -7.0
오키나와현 6.6 시마네현 -5.6
가나가와현 6.2 아오모리현 -5.4
아이치현 4.2 야마가타현 -5.3
시가현 4.2 와카야마현 -5.2
자료: 二宮書店編, 2005, 『日本の地理統計要覽2005』를 인용하여 작성.
또한 전체 인구 중에서 65세 이상의 인구가 차지하는 고령자 비율에서도 지역간 격차가
있다. 일본의 고령자비율은 1970년의 7.1%에서 1980년의 9.1%, 1990년의 12.0%, 2000년의
17.3%로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2002년의 경우 고령자 비율은 18.5%이다.
고령자 비율의 지역별 격차도 큰데, [표 6-5]에 따르면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는
시마네현, 아키타현, 고치현, 야마가타현, 가고시마현이 있다. 반면 고령자 비율이 낮은 지역
은 사이타마현, 오키나와현, 가나가와현, 지바현, 아이치현 등이 있다.
[표 6-5] 고령자 비율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1-5위, 2002)
고 령 자 비 율 이
높은 지역
고령자 비율
(%)
고령자비율이 낮
은 지역
고령자 비율
(%)
시마네현 26.2 사이타마현 14.2
아키타현 25.1 오키나와현 15.0
고치현 24.6 가나가와현 15.1
야마가타현 24.0 지바현 15.5
가고시마현 23.6 아이치현 15.7
자료: 二宮書店編, 2005, 『日本の地理統計要覽2005』를 인용하여 작성.
3. 주요 공업지역
(1) 태평양벨트
이처럼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지표를 통해 볼 때 일본의 지역사회는 공업지역을 중심
으로 대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역과, 공업화로부터 탈락되어 제1
차산업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도 열등한 지위에 있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공업지역을
중심으로 대도시를 이루고 있는 지역의 소득은 높으며, 인구도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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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도 더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반면 농업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의 소득수준은
낮으며 인구감소가 일어나고 있으며 고령자의 비율도 평균보다 높다.
이러한 지역의 분포는 지도상으로 나타낼 때 태평양연안을 따라 3대 도시권 중심으로 형
성되어 있다. 일본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대체로 태평양 연안을 따라 발달되어 왔는데 이를
가리켜 태평양벨트라고 한다. 태평양벨트란 일본의 간토지방 남부에서 기타큐슈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업지역을 가리킨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도쿄만의 지바현 연안에서 시작하여 나고
야 남부와 욧카이치시, 오사카만 남부와 세토나이카이 북부 연안에 이른다.
이 지역은 바다에 면한 임해지역으로서 원료의 수출입이 유리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으
며, 매립을 통해 대규모 용지를 확보할 수 있으며, 배후에 대도시를 끼고 있어 소비시장이
발달한 것을 배경으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태평양벨트를 이루는 공업지역은 이미 전전부터 형성되었는데 전후 고도성장기에 추진된
지역개발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2) 주요 공업지역
*게이힌공업지대
게이힌공업지대는 도쿄도에서 가나가와현으로 이어지는 공업지대이다. 제품의 수출입이
편리한 도쿄항과 요코하마항, 가와사키항 등에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데, 도쿄 23구와 가와사
키시, 요코하마시와 같은 대도시의 소비시장을 배경으로 발달하였다.
*게이요공업지역
도쿄만의 해안에서 지바현의 지바항(千葉港)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형성된 공업지역으로
제2차세계대전 후 게이힌공업지대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했다. 게이힌공업지대와 이어지고 있
기 때문에 게이힌공업지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기타칸토공업지역
게이힌공업지대가 과밀해지면서 사이타마현, 군마현, 도치기현에 걸쳐 발달한 공업지역이
다. 간토내륙공업지역(關東內陸工業地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시마임해공업지역
이바라기현 남동부의 가시마우라(鹿島浦)에 위치해 있는 가시마시(鹿島市)와 근처의 가미
스시(神栖市)를 중심으로 발달한 공업지역이다. 이 곳에는 제철소나 석유화학 콤비나트, 석
유정제공장, 전력발전소 등이 많다.
*주쿄공업지대
주쿄공업지대란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아이치현 남부에서 미에현 북부로 이어지는 지역을
말한다. 이 곳은 고도성장기에 이세만 북부의 매립지인 욧카이치시(四日市市)에 철강이나 석
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의 공장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 또한 나고야시 주변의 도요타시(豊
田市)를 중심으로 자동차공업이 급속히 발전해 주쿄공업지대의 핵심 산업이 되었다.
*도카이공업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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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쿄공업지대의 동쪽에 위치한 공업지역으로 시즈오카현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발전하였
다. 도카이도의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 중부 산악지역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을
배경으로 발전했다.
*한신공업지대
한신공업지대는 오사카만을 중심으로 오사카부와 효고현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말한다.
전전에는 게이힌공업지대를 능가하는 일본 최대의 공업지대였지만 점차 게이힌공업지대에
뒤쳐지고 최근에 와서 주쿄공업지대에 뒤쳐지게 되었다.
*세토우치공업지역
세토나이카이의 연안에 위치한 주고쿠지방과 시코쿠지방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공업
지역이다. 세토우치의 수운을 비롯해 교통이 편리하며, 해안 매립에 의해 공업용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점을 배경으로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급속히 발달했다.
*기타큐슈공업지대
기타큐슈공업지대는 기타큐슈시를 중심으로 한 임해부에 형성되어 있다. 1901년에 대규모
의 관영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가 설립된 것을 계기로 공업지대로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호쿠리쿠공업지역
호쿠리쿠지방의 임해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공업지역으로 석유화학공업과 금속공업이 활
발하다.
(3) 주요 공업지역의 생산규모
2002년 현재 각 공업지역의 생산규모는 다음과 같다. 주쿄공업지대가 42조엔으로 가장 많
으며, 그 다음으로 게이힌공업지대가 29조엔을 나타낸다. 이어 기타칸토공업지역이 28조엔,
한신공업지대가 28조 엔, 세토우치공업지역이 23조 엔, 도카이공업지역이 16조 엔, 호쿠리쿠
공업지역이 11조엔, 게이요공업지역이 11조 엔, 가시마임해공업지역이 10조엔, 기타큐슈공업
지대가 7조 엔을 나타낸다.
연습문제
1. 다음 중 인구 500만 명(2004년 기준)이 넘는 지역이 아닌 것은?
① 홋카이도 ② 지바현
③ 효고현 ④ 가가와현
정답 „. 시코쿠지방에 위치한 가가와현의 2004년 인구는 150만 명 정도이다.
2. 대규모 자동차 공업단지를 형성하고 있어 일본에서 가장 공업 생산액(2002년 기준)의 규
모가 큰 지역은?
① 도쿄도 ② 오사카부
③ 아이치현 ④ 가나가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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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③. 아이치현은 도요타자동차를 비롯해 수많은 자동차 부품공장이 모여 공업지역을 형
성하고 있다. 2002년 아이치현의 공업 생산액은 34조 엔이 넘는다.
3. 도쿄만의 해안에서 지바항으로 이어지는 곳에 형성된 공업지역으로 게이힌공업지대의 연
장선상에서 발전한 공업지역은?
① 게이요공업지역 ② 주쿄공업지대
③ 도카이공업지역 ④ 기타칸토공업지역
정답 ①. 게이요공업지역은 제2차세계대전 후 게이힌공업지대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했으며,
게이힌공업지대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게이힌공업지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곳에는
석유화학콤비나트와 대형 제철소 등이 있다.
4. 다음 중 전전부터 발달한 일본의 3대 공업지역에 속하는 곳은?
① 호쿠리쿠공업지역 ② 한신공업지대
③ 세토우치공업지역 ④ 가시마임해공업지역
정답 ②. 일본의 3대 공업지역으로는 게이힌공업지대과 주쿄공업지대, 한신공업지대를 꼽는
다. 일반적으로 전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공업지역에 대해서는 공업지대라고 부르고 있으
며 전후에 형성된 지역에 대해서는 공업지역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5.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아이치현 남부에서 미에현 북부로 이어지는 공업지역을 무엇이라
하는가?
① 주쿄공업지대 ② 게이힌공업지대
③ 한신공업지대 ④ 가시마임해공업지역
정답 ①. 주쿄공업지대는 에도시대부터 섬유공업, 도자기공업이 번성하였고, 메이지기에 제
사업이나 방적업, 섬유공업이 발달하였다. 전시기에는 군수산업의 중요 거점이 되기도 하였
다.
고도성장기에 이세만 북부의 매립지인 욧카이치시(四日市市)에는 철강이나 석유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의 공장이 대규모로 건설되었다. 나고야항 주변의 매립지에도 제철소나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건설되었으며, 나고야시 주변의 도요타시(豊田市)를 중심으로 자동차공업이 급속
히 발전해 주쿄공업지대의 핵심 산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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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지역사회의 문제
1. 과밀화 문제
지역간 경제격차의 구조는 고도경제성장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정부는 1950년대 후반
부터 1960년대 후반에 걸쳐 중화학공업 콤비나트를 축으로 하는 거점개발방식을 추진하였는
데, 거점개발방식은 거점도시에 거점산업이 되는 소재공급형 중화학공장을 유치하여 그 경
제적 파급효과를 다른 산업에 확장하여 주변지역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원료수입이 수월한 임해공업단지가 건설되었는데, 도쿄만(東京湾), 이세만(伊勢湾), 오
사카만(大阪湾),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연안과 같은 태평양 연안에 있는 지역이 매립되었
다. 이들 매립지에는 주로 철강이나 석유정제, 석유화학, 알루미늄 정련, 전력 등의 산업이
유치되었다.
따라서 고도성장기에는 3대 도시권을 중심으로 인구가 대규모로 유입되고 그 이외의 지역
에서는 대량의 인구유출이 일어났다. 1960년대 이래 대도시 주변에 신시가지가 대규모로 형
성되면서 3대도시권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3대 도시권의 인구비율은 1940년에 40.2%, 1950
년에는 35.7%로 약간 줄었지만 그 이후 계속해서 증가해 1970년에 46.9%, 1990년에 49.8%,
2004년에 50.0%로 1950년부터 2004년까지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70년대가 되면 3대도시
권의 인구가 거의 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도성장이 끝난 이후에도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과밀화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특히 1990년대에 일본의 거품경
기가 꺼지면서 10년 이상의 장기불황이 지속되자 이러한 현상은 계속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고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있는 대도시에 인구가 더욱 모여들고 있는 셈이다.
특히 과밀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은 고도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늘
어난 도시근로자 세대의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대도시 주변에 조성된 대규모 신시가지가 생
겨나면서 장시간 이동에 따른 교통지옥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동차의 증가에 따른 공해문
제도 발생하였다. 또한 신시가지에는 학교나 보육소, 도로, 상하수도, 의료시설, 공원, 문화
및 오락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공공시설이 부족하였다. 정부 예산이 주로 기업의 경제활동
을 뒷받침하는 인프라 건설에 우선적으로 이루어져 주민생활과 관련된 분야에 대한 자금배
분은 미흡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심각한 공해문제가 발생했다. 공해는 석유화학 콤비나트를 중심으로 하는 3대 도시
권에서 주로 발생하였는데, 수은이나 카드뮴, 비소, 납 등의 중금속 및 기타 화학물질이 수
질오염을 일으키고, 심각한 대기오염을 초래하였다. 공업단지의 주변 대도시에서는 공해가
일상화되었는데, 도쿄나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스모그현상이 심각하여 오후가 되면
하늘이 뿌옇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날이 많았다. 공장지역에서는 4대공해병으로 불리는
미나마타병, 니가타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천식 등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르게 하였다.
- 36 -
한편 과밀화문제는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다소 완화되었다. 일본정부는 주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점차 지역주민의 생활이나 복지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
다. 공해방지에 역점을 기울에 공해 관련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공해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2. 과소화 문제
고도성장기에 대도시에 인구집중이 일어났던 데 반해 지방권의 인구비율은 계속적으로 감
소하였다. 인구가 3대도시권으로 빠져나가면서 지방권의 인구자체가 줄었다. 후쿠오카현을
제외한 규슈지방 대부분과 시코쿠지방, 주고쿠지방, 호쿠리쿠지방, 고신지방과 도호쿠지방에
서는 인구감소가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집단취직을 통해 도시로 빠져나갔고 중장년의 남성
도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과소화(過疎化) 문제가 발생했다. 과소화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지역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져 사실상 지역사회로서 존립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한다. 경
제활동을 담당할 노동력이 유출되면서 생산기능이 크게 저하되고 농어촌에서 공동으로 사용
하는 농업용수나 저수지, 어장의 관리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생활 기반인 의료나 소방, 학교,
보육소 등의 시설이 유지되기 어렵다. 또한 상하수도나 쓰레기 처리 등의 공공시설의 건설
도 문제가 된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농어촌에서는 수익성이 없어
진 의료기관이나 교통기관 등이 촌락에서 철수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남겨진
주민의 생활조건은 살아가기가 불가능할 만큼 악화되어 이들도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
고 이로써 지역사회는 해체되고 마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과소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해왔다. 과소지역을 지정하여 이
들 지역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는데, 인구감소율과 고령화의 정도, 재정적 기반 등을
고려하여 과소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인구가 계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층이 빠
져나가 고령화가 심각한 지역, 그리고 재정여건이 열악한 지역을 과소지역으로 지정하고 있
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2006년의 경우 과소시정촌으로 지정되어 있는 시정촌의 수는 739개인
데, 이는 전국 1,820개 시정촌의 약 4할에 해당한다. 과소시정촌의 인구는 약 1,064만 명
(2005년 國勢調査)으로, 이것은 전국 인구의 8%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면적은 일본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표7-1]참조)
[표 7-1] 과소시정촌의 수와 인구, 면적
과소시정촌 전국의 시정촌
시정촌 수(2006)
739개
(40.6%)
1,820개
(100.0%)
인구(2005)
1,064만명
(8.3%)
1억 2,775만명
(100.0%)
면적(2001)
204,329km2
(54.1%)
377,880km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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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서 시정촌의 합병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2002년에 3000개가 넘는
시정촌의 수는 대대적인 합병을 통해 2006년에 1800개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시정촌의 합병
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인데, 이러한 합병이 더욱 더 과소지역의 문제를 행정
적 관심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게 함으로써 과소화를 촉진시킨다는 비판도 많다.
일본정부는 1970년에 제정한 과소지역대책긴급조치법을 비롯해 여러 법을 제정해 과소지
역에 재정적 지원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과소문제의 구조적 뿌리가 깊은 만큼 쉽사리 해
결되지 않고 있다.
과소지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젊은층이 사라져 농촌의 노동력이 급속도로 고령화하고 있
다는 점이다. 젊은층이 없어지면서 다음 세대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 태어
나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는 지역이 많으며, 65세 이상 고령자의 인구비율이 50%를 넘어서
는 지역도 있다. 이렇게 고령화가 심각해지면 생산기능이 크게 저하되고, 다음 생산을 담당
할 후계자가 확보되지 못한다. 그리고 세대간 재생산이 일어나지 못해 인구감소의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야말로 지역으로서 활력을 잃게 되는 셈이다.
연습문제
1. 다음 중 고도성장기에 대도시로 인구가 대량으로 빠져나가 인구가 급속히 감소한 지역이
라고 보기 어려운 곳은?
① 도호쿠지방 ② 시코쿠지방
③ 호쿠리쿠지방 ④ 긴키지방
정답 ④. 긴키지방은 3대 도시권의 하나인 오사카권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으로, 고도성장기
에 오사카부를 비롯해 교토부, 효고현 등에서는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2. 고도성장기에 일본에서 진행된 지역개발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오사카권이 발달함에 따라 나고야권에서는 대량의 인구유출이 일어났다.
② 거점별 지역개발방식을 통해 국토의 균형발전이 이루어졌다.
③ 지역특성에 맞는 지역주민 주도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④ 태평양벨트로 불리는 지대에 대규모 중화학공업기지가 건설되었다.
정답 ④. 나고야권은 3대 도시권의 하나로 고도성장기에 인구가 대량으로 유입된 지역이다.
고도성장기에 일본정부에 의해 추진된 거점개발방식은 특정지역을 거점으로 지정해 이 곳
에 정부가 산업활동의 인프라를 제공하고 기업에 각종 혜택을 주어 기업활동을 독려함으로
써 지역간 불균형 발전을 가져왔다.
고도성장기의 지역개발방식은 지방자치체와 지역주민이 아닌 국가와 산업계가 주도함으로
써 지역특성에 맞는 개발이 되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노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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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도성장기에 일본의 농촌에서 진행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농업 노동력의 고령화, 여성화가 진전되었다.
② 농가소득이 높아지면서 전업농가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③ 농업의 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내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④ 농촌의 몰락으로 농가부채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정답 ①. 고도성장기에 농촌에서는 3대 도시권으로 대량의 인구가 유출되면서 심각한 과소
화문제가 발생했다. 과소화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지역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져 사
실상 지역사회로서 존립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젊은 세대와 남성들이 대거 도시로 빠
져나간 농촌에서는 농업 노동력의 고령화, 여성화가 진행되고 생산 활동이 위축되었다.
4. 고도성장기에 가장 인구증가율이 높았던 지역은?
① 간토(関東)지방 ② 시코쿠(四国)지방
③ 홋카이도(北海道)지방 ④ 도호쿠(東北)지방
정답 ①. 고도성장기에는 3대 도시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인구증가율이 높았다.
보기 중에서 가장 인구증가율이 높았던 곳은 3대 도시권을 포함하고 있는 간토지방이며,
시코쿠지방이나 도호쿠지방은 인구유출이 심각했던 곳이다. 홋카이도의 인구증가율도 상대
적으로 낮았다.
5. ‘마치즈쿠리’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1960년대에 일본의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② 시빌미니멈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지역개발을 추진하는 주민들의 운동을 말한다.
③ 행정과 주민이 협력하여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다.
④ 산업시설의 유치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운동이다.
정답 ③. 마치즈쿠리란 지역활성화를 의미한다. 일상생활의 공간인 지역사회를 주민 스스로
가 참여하여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마치즈쿠리는 1980년대 이후
지방자치 및 행정에 있어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현재 과소지역에서는 과소문제를 해
결하고 지역활성화를 꾀하기 위해 마치즈쿠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과소지역의 마치즈
쿠리는 지역의 특성을 살린 문화시설의 건립이라든가 문화이벤트의 개최, 도시민이 농촌생
활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건립, 지역 특산품의 개발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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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일본인의 형성
1. ‘일본인’이란 누구인가?
(1) 국적법의 일본인 규정
일본의 국적법 제1조에서는 ‘일본국민이 되는 요건은 이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라고 규
정하고 있다. 일본국민이 되는 요건이란 일본국적을 갖는 것인데, 일본국적 취득은 원칙적으로
일본국민의 부모로부터의 출생, 혹은 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1984년에 개정된 국적법에서는
‘출생 시에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일본국민일 경우’ 그 자식은 ‘일본국민이라고 한다’라고 규정
하여 그 이전의 부계혈통주의에서 부모양계혈통주의로 개정하였다. 이처럼 국적법 자체는 시
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법에서 정하고 있는 일본인이라는 범주
는 국적법에 의해 규정되는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2) 일본인과 비일본인의 경계
국민은 국적 보유를 기준으로 한 정치적‧법적 개념이다. 반면 민족은 혈통과 언어 등의 문
화에 기초한 개념으로서, 국민과 민족이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회학자인 후쿠오카 야스노리(福岡安則)는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국적’, ‘혈통’, ‘문
화’의 3요소를 기준으로 이른바 ‘순수 일본인’부터 ‘비일본인’에 이르기까지 8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플러스는 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고, 마이너스는 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표 8-1] 참조).
각 유형을 보면, 제1유형은 ‘일본민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일본문화’를 체득했으며, ‘일본국
적’을 지닌 ‘순수 일본인’인 경우이다. 제8유형은 일본혈통을 이어받지도 않았으며, 일본문화를
체득하지 않았고 국적도 일본이 아닌 완전한 비일본인 경우이다. 제1유형에서 제8유형까지 사
이에 다양한 일본인이 있는데, 이러한 3가지 요소를 통해 살펴볼 때 일본인과 비일본인의 경
계를 명확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표 8-1] ‘일본인’으로부터 ‘비일본인’까지의 유형
종류 1 2 3 4 5 6 7 8
혈통
문화
국적
+
+
+
+
+

+

+

+
+
+



+



+



자료: 福岡安則, 1988, 『在日韓国‧朝鮮人』, 中公新書, 5쪽.
후쿠오카가 이러한 8개의 유형을 제시한 것은, 일본은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동질적인
사회라는 암묵적인 전제에 대해 오늘날 일본사회는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일본이 단일민족이고 순수민족이라고 하는 주장이 다른 문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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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을 갖는 민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설
‘일본인’의 기원, 일본민족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은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반을 마련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국민국가 성립 이후 일본에서는 새롭게 도입된
근대 학문에 의해 일본인 혹은 일본민족의 기원을 밝히려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크게 혼합민족설이냐 단일민족설이냐로 나누어진다. 즉 일본
이 여러 민족의 혼합에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순수단일민족으로 이루어졌느냐를 둘러싸고 논
쟁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고고학적 조사에 기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학문적 논쟁의 차원을 넘
어 개개인의 세계관이나 신념, 잠재의식이 투영된 형태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1) 서양 학자들의 혼합민족설
메이지 초기에 일본을 방문한 서양 학자들은 일본인이 서로 다른 계통의 집단들의 혼합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인 의학자 데니츠(Doenitz)는 일본민족은 몽골리아 인종과 말레이 인종의 혼합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네덜란드 의학자 베르츠(Berltz)는 일본인의 얼굴형을 ‘사츠마(薩摩: 현재의 가고시마현)형’
과 ‘조슈(長州: 현재의 야마구치현)형’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이를 근거로 일본인에는 서
로 다른 두 계통이 섞여 있다는 설을 제시했다.
한편, 일본열도에는 선주민이 있었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집단이 이 선주민 집단을 정복했으
며, 일본인은 정복민족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이것은 모스(Morse)라는 미국인 생물학자가
발표한 것인데, 그는 일본열도에는 일본 민족 이외의 선주민이 있었으며, 남방에서 일본열도로
들어와 이들을 정복한 집단이 오늘날의 일본 민족의 선조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서양학자들은 각각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주장하는 바가 달랐지만 일본민족이 여
러 민족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혼합민족설을 주장하고 있다.
(2) 일본인 연구자들의 일본인 기원설
한편 1886년 쓰보이 세이고로(坪井正五郞)를 중심으로 ‘도쿄인류학회’가 만들어지고 이 학회
를 중심으로 일본인 연구자에 의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들도 대개는 일본열도의 선주민과
나중에 열도에 등장한 집단의 혼합에 의해 오늘날의 일본민족이 형성되었다는 혼합민족설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열도에는 일본인 이
외의 어떤 다른 민족도 존재한 일이 없고, 당초부터 열도에 거주했던 ‘원(原)일본인’이 진화해
서 오늘날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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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단일민족 신화의 기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라는 사회학자는 『일본단일민족신화의 기원』라는 책에서 일본
민족기원설에 대한 논쟁을 메이지기부터 전후에 걸쳐 방대한 자료에 기초해 검토하고 있다.
그는 일본민족기원설이 일본이 약할 때는 단일민족론으로 몸을 웅크리고, 강해지면 혼합민
족설로 외부의 타자를 취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런 논쟁이
학문적 차원을 넘어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행위는 대부분의 경우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인식의 질서
가 흔들릴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 때 민족의 역사는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행동지침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식창고로 창조된다. 특히 민족의 기원은 다른 역사분야보다
확정적인 사료가 상당히 드물어 많은 부분을 추측에 기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적합한 창
조의 대상이 된다.
(중략)
일본민족기원론에 결정적인 정설은 없다. 인간은 별을 연결하여 별자리를 그리듯이, 단편
적인 사료를 연결하여 자신의 견해를 형성한다. 다만, 이 책에서 고찰하고자 한 것은 국제관
계에서 타자와의 관계가 변화할 때마다 자화상인 일본민족론이 요동치는 모습이었다. 많은
논자들은 일본민족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실은 자신의 세계관이나 잠재의식이 투영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고고학적, 인류학적 탐구를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사의
고고학적, 인류학적 탐구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지만, 민족기원론은 이들 학문연구의 성과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본인은 태고 적부터 연면히 이어져 내려온 유구의 민족이
며, 천신(天神)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근거
로 이용되었다.
여기에서 소개한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논쟁이 제기되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일본
은 제국주의의 팽창으로 인해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었다. 총인구의 3할이 비일본계였기
때문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혼합민족설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혼합민족설은 여
러 민족의 평등이나 공생이라는 보편주의를 지향하기 보다는 차별을 애매하게 하면서 동화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혼합민족설에서는 일본이 고대에 대량의 이민족과 도래인의
동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일본민족은 이민족을 통합·동화할 능력이 탁월하므로 그
경험을 살려 영토확장과 동화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침략의 논리를 제공했다.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생각도 혼합민족설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단일민족설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식민지를 모두 잃었을 때 확립되
었다. 일본은 태고 적부터 단일민족이 살았던 곳이며, 천황가는 외래의 정복자가 아니며, 평화
로운 민족의 통합의 상징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민족의 순혈주의를 강조하면
서 이민족의 배제를 합리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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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 논자의 세계관이나 잠재의식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민족기원
론은 자신의 과거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민족 자화상 찾기이며, 하나의 신화
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현대일본인의 구성
오늘날 일본학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일본열도에는 복수의 서로 다른 종족들이 거주해왔고,
이 집단들이 이동을 하면서 혼혈이 생기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가운데 소규모의 진화를
하는 등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현대 일본인으로 발전해왔다는 견해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류학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일본열도에 거주하면서 유전적으로 단절되는 일 없이 현대까
지 내려오는 인류 집단’을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열도에 거주했더라도 어떤 연유에서
든 중간에 절멸한 집단이나 역사상 비교적 최근에 일본으로 이주해온 명확한 타지역 출신의
집단은 일본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1) 야마토인
혼슈, 규슈, 시코쿠 등 일본열도의 넓은 지역에 거주하여 본토인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일본
인의 다수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2) 류큐인
주로 류큐열도(오키나와)에 거주하며 류큐문화를 이루어왔다. 15세기에 통일왕국을 이루었
었으나 근대에 와서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
(3) 아이누
주로 홋카이도에 거주하며 수렵과 채집, 어업을 주로 한 생활을 해왔으며 아이누문화를 공
유해왔다. 아이누민족과 류큐인은 근대에 와서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가 자신들의 고유한 문
화를 부정하고 야마토민족의 문화에 동화될 것을 강요받았다.
4. 일본인의 이중구조설
도래인과 일본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하나하라 가즈로(埴原和郞)라는 인류학자가 이중구조
설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 학설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학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일본민
족을 크게 조몬인과 도래인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 B.C. 10세기경 일본열
도에 등장한 조몬인(繩文人)과 B.C. 3세기 무렵부터 열도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의 두 계
통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몬인은 수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열도에 들어온 동남아시아계 집단의 후손으로 현대
일본인의 직계 선조이다. 조몬인은 일본열도의 거의 전역에 살고 있었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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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에 걸쳐 존속하였다. 조몬인의 공통된 신체적 특징은 현대 일본인 중 오키나와인 및
아이누에게서도 발견된다.
반면, 야마토인은 야요이 시대에 등장하는 북아시아계의 도래인과 상대적으로 많은 공통점
을 갖고 있다. B.C.3세기부터 A.D.3세기까지 이어지는 야요이 시대에는 아시아대륙과 한반도
로부터 집단적으로 많은 도래인들이 일본열도에 이주해온 시기이다. 야요이시대는 아시아대륙
과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기로서 그 여파로 이들 지역으로부터 일본열도에 집단적인 이동이 활
발해졌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새로운 문화 요소들도 일본열도 서부로 유입되어 점차 동부로
확산되어 갔다.
이처럼 조몬인과 도래인의 두 집단이 접촉한 정도에 따라 일본인과 일본문화에는 이중구조
가 형성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기후, 국내의 이동, 정치적 영향 등 여러 요인들이 더해지면
서 이중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이중구조설의 핵심이다.
연습문제
1. 대륙과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기로 도래인들이 일본에 집단적으로 이동해온 시기는?
① 헤이안시대 ② 야요이시대
③ 조몬시대 ④ 가마쿠라시대
정답②. 야요이시대에는 아시아대륙과 한반도로부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왔다. 일본
열도에 이주해온 사람들을 가리켜 도래인이라고 하는데, 야요이시대는 아시아대륙과 한반도
의 정치적 격동기로 그 여파로 이들 지역으로부터 일본열도로의 집단적인 이동이 활발해졌
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새로운 문화 요소들도 일본열도 서부로 유입되어 점차 동부로 확산
되어 갔다.
2. 일본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현재 일본인이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② 류큐민족은 오키나와에 거주하며 15세기에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③ 일본인, 일본국민, 일본민족이라는 세 개의 범주는 서로 일치한다.
④ 메이지기에 야마토 민족은 본토에 의해 지배되어 동화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정답 ②. 일본학계에서 현대일본인은 야마토민족, 아이누족, 류큐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국민은 국적 보유를 기준으로 한 정치적·법적 개념이며, 민족은 혈통과 언어 등의 문
화에 기초한 개념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야마토민족은 본토에 널리 거주하며 다수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3. 하니하라 가즈로라는 인류학자가 일본인의 기원과 관련해서 제시한 ‘이중구조설’의 내용
으로 맞는 것은?
① 일본민족은 몽골리아 인종과 말레이 인종의 혼합체라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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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일본인의 얼굴형은 크게 사쓰마형과 조슈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을 근거로 일본인
에는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섞여 있다고 보는 설이다.
③ 본래 일본열도에는 일본민족 이외의 선주민이 있었으며, 남방에서 일본열도로 들어와 선
주민을 정복한 집단이 오늘날 일본민족의 선조라고 보는 설이다.
④ 일본인은 조몬인과 도래인의 두 계통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 두 집단이 접촉한 정도에
따라 일본인․일본문화에는 이중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설이다.
정답 ④. 일본인은 B.C. 10세기경 일본열도에 등장한 조몬인과 B.C. 3세기 무렵부터 열도로
이주해온 도래인의 두 계통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두 집단의 접촉 정도에 따라, 그리고 기후
나 국내의 이동, 정치적 영향 등의 여러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이중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
이 이중구조설의 핵심이다.
4. 일본인의 얼굴형을 사쓰마형과 조슈형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이를 근거로 일본인에
는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섞여 있다는 설을 제시한 학자는? (4)
① 시볼트 ② 데니츠
③ 하니하라 가즈로 ④ 베르츠
정답 ④. 베르츠에 의하면 ‘사쓰마형’은 사각형이나 둥근형의 얼굴, 크고 쌍꺼풀진 눈, 폭이
약간 넓은 코, 두꺼운 입술, 잘 발달된 귓밥 등의 특징이 있으며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일본의 서민들 가운데 많다. 반대로 ‘조슈형’은 긴 얼굴, 좁고 쌍꺼풀이 없는 눈, 폭이 약간
좁은 코, 얇은 입술, 작은 귓밥 등의 특징이 있으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여린 체격으로
소수파지만 상류계급에서 잘 볼 수 있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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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일본역사의 전개―원시․고대(1)
1. 일본역사의 시대구분
(1) 원시·고대
원시·고대란 문명 이전 시기부터 고대국가가 완성되기까지의 시기이다. 고대국가가 탄생
하기 이전에 일본문화는 선토기시대, 조몬시대, 야요이시대를 거치며 발전했다. 야마토시대
에 일본열도에는 최초의 통일정권으로서 야마토조정이 탄생하였고, 이후 야마토조정은 대륙
으로부터 율령제를 도입해 천황 중심의 율령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원시․고대
선토기(先土器)시대
조몬(縄文)시대―기원전 1만년- 기원전 3세기.
야요이(弥生)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야마토(大和)시대―3세기 말(4세기 초)-710년.
나라(奈良)시대―710년-794년.
헤이안(平安)시대―794년-1185년.
(2) 중세
중세는 고대국가가 해체되면서 천황과 귀족 중심의 지배에서 무사정권이 중심이 되는 무
사사회로 전환해 나가는 시기이다. 12세기 말에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가, 14세기 중반에
무로마치(室町)막부가 탄생하였고, 15세기 중반의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계기로 일본열도는
무사들이 실력을 겨루며 항쟁하는 센고쿠(戰國)시대를 맞이하였다.
중세
가마쿠라(鎌倉)시대―1185년--1333년.
겐무의 신정(建武の新政) : 1333년--1335년
남북조(南北朝)시대―1336년-1392년.
무로마치(室町)시대―1336년-1573년.
센고쿠(戦国)시대―1467년 경-1573년.
(3) 근세
근세는 전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시작되었다. 16세기
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고, 그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가 에도(江戶)막부를 열어 이후 260년간 대대로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일본을 통
치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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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1573년-1603년.
에도(江戸)시대―1603년-1867년.
(4) 근·현대
근대는 1868년에 천황 친정을 표방하는 메이지(明治)정부가 탄생하면서 시작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의 선진국을 모델로 하는 근대국가를 지향하였으나, 천황주
권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한하였다는 점에서 봉건적 성격을 온존시
켰다. 1945년 8월 15일의 패전을 기점으로 현대로 구분한다.
근현대
메이지(明治)기―1868년-1912년.
다이쇼(大正)기―1912년-1926년.
쇼와(昭和)기―1926년-1945년․1945년-1989년.
헤이세이(平成)기―1989년-현재.
2. 원시사회와 문화
(1) 구석기 문화
1949년 군마(群馬)현 이와주쿠(岩宿) 유적에서 갱신세(更新世) 말기의 적토층(赤土層)에서
타제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문화는 토기를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토기(先土器)문화 또는
무토기(無土器)문화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타제석기를 이용하여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20-30명 정도가 혈연
적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조몬 문화
조몬시대는 기원전 1만년 경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이어졌는데 신석기 시대에 해당
된다. 조몬토키는 저온에서 구워진 두꺼운 흑갈색(黑褐色) 내지 다갈색(茶褐色) 토기로 일본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어로, 채집생활을 하였
는데 생산방식과 생산도구는 다양하였다. 생산력이 낮아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였고, 따라서 계급적 지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3) 야요이문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야요이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조몬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구워져 강도가 훨씬 높은 야요이식 토기가 출토된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다.
야요이시대는 대륙과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으로 인해 대륙에서 일본열도로 도래인이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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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이동하였다. 도래인은 수전경작 기술을 비롯해 청동기․철기, 선진문명의 정치제도
등의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농경생활이 시작됨에 따라 정주성이
강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취락이 발달하였다.
금속기는 무기나 농기구, 수렵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되어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농업 생
산력이 증가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축적되자 빈부의 차가 생기고 신분이 분화되었다.
3. 야마타이국의 성립
농경생활이 진행되는 가운데 각지에는 수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2세기
후반에 일본열도는 100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 소국은 패권을 둘러싼 항쟁
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항쟁을 통해 소국들은 보다 유력한 정치집단에 의해 흡수․통합되면
서 30여 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이들 30여개 국의 수장들은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자를 중심
으로 연합국가인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을 수립하였다.
야마타이국은 연합국가로서 각국의 주체성이 강하고 통합의 유대도 강건하지는 못했던 것
으로 추정된다. 통합의 주요한 수단은 주술적, 종교적 권위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히미코는
주술력을 갖는 사제자였다. 이러한 통합체의 성격으로 볼 때 야마타이국은 아직은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국가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적인 존재, 즉 원시적 국
가라고 할 수 있다.
4. 야마토왕권의 성립
(1) 고분문화
3세기에서 7세기까지의 시기를 야마토(大和)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야마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야마토정권이 탄생하였는데, 이들의 세력권은 규슈(九州)에
서 동일본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렀다.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에 걸쳐 긴키지방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형태의 고분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고분은 야요이시대에 있었던 집단묘지와는 달리 특정 개인을 매장
하기 위한 것으로 야마토정권을 수립한 왕과 왕족, 유력호족을 매장한 묘였다. 고분을 축조
하는 데는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고분의 존재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
력한 정치권력이 이 시기에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2) 도래인과 문화의 전파
5-6세기에는 대륙의 선진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야마토조정이 적극적으로 도래인을 받아
들임으로써 도래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도래인을 통해 중국과 한반도
의 선진문화, 특히 백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기술자집단으로 조직했다.
도래인들은 기나이(畿内)와 그 주변에 살면서 조정의 문필이나 재정 등의 행정실무, 금속
기의 생산, 기직(機織), 제도(製陶), 토목, 건축 등의 분야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3) 야마토 왕권의 지배조직
국내 통일이 진행됨에 따라 야마토왕권의 정치조직도 정비되어 갔다. 야마토왕권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자 그 주변의 호족들은 왕인 오키미(大王) 밑에 조정을 구성하고, 예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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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국의 왕이었던 호족들이 조정의 통치조직에 편입됨으로써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탄생하
였다. 야마토 정권은 복속한 소국의 수장을 그대로 새로운 정치조직에 편입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던 토지와 백성을 통치하게 하였다.
각 호족은 우두머리인 우지노카미(氏上)와 이들의 휘하에 있는 우지비토(氏人)로 이루어
져 있었는데, 이들은 같은 조상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동족적, 혈연적 결합을 바탕으로 맺
어진 조직이다. 조정을 구성하는 호족은 그 지위를 대대로 이어받고, 오키미로부터 신분을
나타내는 우지(氏)․가바네(姓)를 부여받았으며, 야마토정권의 내부에서 다양한 직무를 세습
적으로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우지의 조직을 기초로 해서 가바네에 의해 서열화된 신분질
서를 씨성제도(氏姓制度)라고 한다.
연습문제
1. 일본의 선사시대를 연대순으로 맞게 나열한 것은?
① 선토기시대 ― 조몬시대 ― 야요이시대 ― 고분시대
② 조몬시대 ― 야요이시대 ― 선토기시대 ― 고분시대
③ 야요이시대 ― 선토기시대 ― 조몬시대 ― 고분시대
④ 조몬시대 ― 선토기시대 ― 야요이시대 ― 고분시대
정답 ①. 선토기시대는 구석기 시대이며, 조몬시대는 신석기 시대로 기원전 1만년-기원전 3
세기, 야요이시대는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이며, 고분시대는 3세기- 7세기 시기를 말한
다.
2. 야마토조정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오키나와지방에서 15세기 초에 최초로 성립된 통일정권을 말한다.
② 야마토조정은 세력을 넓혀 홋카이도지방에까지 통치권을 확대하였다.
③ 가마쿠라막부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천황 중심의 조정을 말한다.
④ 유력부족 간의 연합체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면서 탄생한 일본 열도 최초의 통일정권을
말한다.
정답 ④. 야마토조정은 야마토지방(지금의 나라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탄생하였으며, 이들의 세력권은 규슈에서 동일본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렀다.
3. 소규모 부족집단들이 큰 부족집단으로 통일되고, 부족집단들은 점차 정치적 통일체인 국
가로 발전해 간 3세기~7세기의 시기를 무슨 시대라고 하는가? (1)
① 고분(古墳)시대 ② 야요이(弥生) 시대 ③ 조몬(縄文)시대 ④ 아스카(飛鳥) 시대
정답 ①. 고분시대는 이 시기에 전방후원분 형태의 고분이 많이 만들어졌던 것에 유래한 말
로 야마토시대에 해당한다. 고분의 존재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탄생
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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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각 원호의 시작년도를 나타낸 것이다. 맞는 것은?(1)
① 메이지(明治) - 1868년 ② 다이쇼(大正) - 1910년
③ 쇼와(昭和) - 1925년 ④ 헤이세이(平成) - 1990년
해설 : 메이지1년은 1868년, 다이쇼 1년은 1912년, 쇼와 1년은 1926년, 헤이세이 1년은 1989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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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일본역사의 전개―원시․고대(2)
1. 스이코조의 정치와 문화
(1) 쇼토쿠태자의 섭정
6세기 이래 야마토 정권의 지배체제는 점차 완성되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592
년에 즉위한 스이코천황(推古天皇)은 조카인 쇼토쿠 황태자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운
영하도록 하였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아스카에 궁을 세워 아스카(飛鳥)시대를 열고 고
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쇼토쿠태자는 천황 중심의 국가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는 603년에 제정된 관위12계
(冠位十二階の制)에 잘 나타나 있다. 관위12계란 관위의 위계를 정해 지금까지 대대로 계승
되던 씨성제도와 달리 개인의 공로에 따라 관위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이는 호족을 관리로
편성해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604년에 쇼토쿠태자는 헌법17조(憲法十七条)를 제정하였다. 이는 군(君)과 신(臣), 민
(民)의 관계를 제시하고 신하로서 관리가 정치에 임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을 제시한 도덕
규범이다. 이를 통해 종래의 씨족제적 질서가 아닌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군―신―민의 관계
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2) 아스카문화
7세기 초에 나라 분지의 아스카 지방을 중심으로 꽃 핀 문화를 아스카문화(飛鳥文化)라
한다. 아스카문화는 중국의 남북조와 고구려․백제․신라 등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불교문화이다. 불교는 처음에는 왕이나 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후 점차 기나이의
호족에게 퍼져나갔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 보호에 힘써 시텐노지(四天王寺)나 호류우지(法隆
寺)를 건립하였다.
2. 율령국가의 확립
(1) 다이카개신
645년에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와 힘을 합해 오
랫동안 권력을 독점하며 전횡을 일삼았던 소가씨를 타도하고 고토쿠(孝德)천황을 세웠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고토쿠 천황의 황태자가 되어 조정의 조직을 정비하고, 중국을 모방하
여 처음으로 다이카(大化)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
(難波)로 옮기고 646년에 4개조로 이루어진 개신의 조칙(改新の詔)을 발포했다. 이것은 공지
공민제를 통해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자 한 것이다. 또한 647년에는 관직과 위계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가리
켜 다이카개신(大化の改新)이라고 한다. 그 후 나카노 오에 황자는 덴지천황(天智天皇)으로
즉위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2) 다이호 율령
덴지천황의 사망 후에 황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한 자는 덴지천황의 동생은 673년
덴무천황(天武天皇)으로 즉위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모든 호족을 제압하고 율령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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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덴무천황의 사후에 즉위한 지토천황(持統天皇)은 덴무천황의 사업을 계승하여 689년 아스
카기요미하라령(飛鳥浄御原令)을 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694년 아스카에서 후지와라쿄(藤原京)로 궁을 옮겼다.
이어 즉위한 몬무천황(文武天皇)은 701년 다이호율령(大宝律令)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중
국의 당 율령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로써 덴무천황에서 시작되어 지토천황을 거치고 몬무
천황에 이르러 일본은 율령국가의 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다이호율령에서는 중앙 관제와 지방행정기구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전국을 5기(五
畿)와 7도(七道)의 행정구로 나누고 이를 다시 국(國), 군(郡), 리(里)로 세분하였다.
율령제하에서 토지제도는 공지공민제를 기본 원칙으로 하였는데 대다수 인민은 호적에 등
록되어 6세 이상이 되면 반전수수법에 의해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이라는 토지를 나누
어 받았다. 이에 따라 농민은 국가에 대해 수확량의 일부와 용역, 군역을 제공하는 조(租),
용(庸), 조(調), 잡요(雜徭)․병역(兵士役)의 의무를 졌다.
(5) 하쿠호문화
다이카 개신으로부터 왕도가 후지와라쿄에 천도한 8세기 초까지의 문화를 하쿠호문화(白
鳳文化)라고 하는데 이는 초기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국가가 형
성된 것을 배경으로 궁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아스카시대부터
융성한 불교는 이 시기에 와서 더욱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절로는 다이칸다이지(大官大寺), 야쿠시지(薬師寺)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회화로는 호류지의
금당벽화(金堂壁畵)가 있다.
3. 나라시대의 정치와 문화
(1) 정치
710년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은 후지와라쿄(藤原京)에서 헤이조쿄(平城京)로 수도를 옮겼
다. 다이호율령의 제정으로 율령국가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이에 걸맞는 새로운 도성을 건
설할 필요가 높아지면서 천도하게 된 것이다. 이후 헤이안쿄(平安京)로 수도가 옮겨지는 794
년까지 약80년 동안을 나라시대(奈良時代)라고 한다.
이 시기는 율령국가로서의 기반을 더욱 확립하여 천황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712년에 『고사기(古事記)』,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여 천황의 권위를 높
이고자 하였다. 또한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8세기 초에 도호쿠지방에는 데와국(出羽国)을 세
워 에미시(蝦夷)에 대한 지배도 강화하였다. 규슈 남부에는 오스미국(大隅国)을 세우고 다네
가시마(種子島)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8세기에 와서 농촌에서 경지부족 문제가 발생하자 743년에 조정은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
年私財法)을 시행하여 개간지의 영구적인 사유를 인정하였다. 그 결과 재력이 있는 중앙귀
족이나 사원들이 지방호족과 결탁하여 산야를 개간하고 농민의 개간지를 사들여 사유지화하
였다. 개간된 토지는 장(莊)이라고 불리는 영주의 별장이나 창고를 중심으로 경영되었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어 농산물을 생산하는 개간한 토지를 장원(荘園)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를
초기장원(初期荘園)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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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덴표문화
8세기의 문화는 헤이죠쿄를 중심으로 번창하였는데 이 시기의 문화를 쇼무(聖武)천황의
연호를 따서 덴표문화(天平文化)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웅장한 수도가 만들어지고 율령국
가가 번영한 것을 배경으로 귀족문화가 꽃피었으며,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국제색이 풍부
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탄생시켰다.
또한 천황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서로서 『고사기(古事
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완성되었다.
8세기 말에 편찬된 『만요슈(万葉集)』는 하쿠호 시대에 수집된 고대가요를 비롯해 율령
국가의 건설을 추진한 천황이나 귀족의 노래가 다수 실려 있으며 일반민중의 노래도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으로는 도다이지(東大寺)의 법화당(法華堂)이나 쇼소인(正倉
院), 도쇼다이지(唐招提寺)의 금당(金堂) 등이 건립되었다.
4. 헤이안시대의 정치와 문화
(1) 헤이안 천도와 율령제 개혁
간무(桓武)천황은 794년에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사원 등의 구세력이 강한
나라(奈良)에서 수륙교통이 편리한 헤이안쿄(京都)로 수도를 옮겼다. 이후 헤이안쿄는 정치
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 때부터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頼朝)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 때까지의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라고 부른다.
간무천황은 흐트러진 율령정치를 재정립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우선 지방관의 부정을
막기 위해 고쿠시(國司)와 군지(郡司)를 엄격히 통제하였다. 그리고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는
조세의 부담자로서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경작을 장려하고 부역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도호쿠 지방의 지배에도 힘을 쏟아 수차례에 걸쳐 군을 파견하여 에미시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2) 고닌·조간문화
헤이안 천도부터 9세기말까지의 문화를 고닌․조간(弘仁․貞観)문화라고 한다. 이 시기에
는 율령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귀족과 관인에게는 유능한 위정자로서 교양과
식견이 요구되면서 귀족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꽃피었다.
이 시기에는 당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시와 한문학이 더욱 발달하였다. 귀족 사이에서는
한문학이 유행하여 칙찬한시집(勅撰漢詩集)으로 『료운슈(凌雲集)』, 『분카슈레이슈(文華秀
麗集)』, 『게이코쿠슈(経国集)』등의 한시집이 편찬되었다. 한편 가나문자가 탄생하고 목
조조각이 발달하는 등 일본적인 국풍문화의 전제가 되는 조건도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로서 밀교가 번성하였다. 승려로서 사이초(最澄)와 구가이(空海)
가 불교활동을 주도하였다.
(3) 섭관정치의 전개
9세기 전반에는 천황이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반이 되면서 귀족인 후지와라씨
(藤原氏) 계열의 북가(北家)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의 정치를 섭관정치라고 하는데, 섭관이란 섭정(摂政)과 관백(関白)의 줄인 말이
다. 섭정은 천황이 나이가 어려 정치를 행하기 어려울 때 천황을 대신해서 정무를 집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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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고, 관백은 천황이 성인이 된 뒤에도 천황을 도와 정무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섭관정치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道長)이다. 미치나가는 4
명의 딸을 계속해서 천황이나 황태자의 비로 만들어 조정의 권세를 누렸다. 뒤를 이은 아들
요리미치도 3대 천황에 걸쳐 약 50년 간 섭정과 관백의 지위에 올라 권세를 누렸다.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이 되고, 성인이 된 후에는 관백이 되었는데 섭관정치에 의해 정치는 사적인
성격으로 변질되고 무기력화하였다.
(4) 장원과 무사
섭관정치가 행해지고 있던 시대는 바로 사무라이가 사회에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사
무라이는 쓰와모노또는 무사(武士)라고 불렸는데, 쓰와모노(兵)는 원래 무기를 의미하는 말
로, 사회에서 무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 즉 전투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호칭한다. 이
러한 쓰와모노가 공적인 기구에 조직되면 무사라고 불렸고, 귀족과 같은 사적인 신분이나
조직의 부하가 되면 사무라이라고 불렸다.
쓰와모노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나라 시대 이래의 에미시에 대한 정책에서 비롯된다. 에
미시가 살고 있던 일본의 도호쿠지방 일대에는 진수부(鎭守府)라고 하는 군사기구가 설치되
어 있었는데, 이 군사기구의 병력은 대개 동국 지방의 무사들로 충당하였다.
이 진수부의 장군이나 장수로는 예전부터 중앙의 관료사회에서는 고관으로 출세할 수 없
는 왕족이나 귀족, 특히 천황의 자손으로 미나모토(源) ․ 다이라(平)라는 성을 받은 자들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진수부에서 임기가 만료되어도 동국지방에 잔류하면서 재지 호족과 중앙에서 파견
된 고쿠시가 서로 다툴 때와 같이 현지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이를 해결하는 일종의
해결사로서 활약했다. 이들을 학계에서는 군사귀족이라고 부른다.
(5) 국풍문화
후지와라씨가 번성하였던 10-11세기 무렵의 문화를 국풍(国風)문화라고 한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견당사(遣唐使)가 폐지되어 대륙문화의 영향이 적어지면서 일본적
인 사상이나 의식이 표면에 등장하여 문화의 국풍화가 진행된 시기이다. 일본에서는 7세기
이래로 중국과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 헤이안시대에 들어와 대륙문화
를 토대로 일본의 풍토와 사상을 조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화의 국풍화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는 가나문자이다. 가나문자가 사용됨에 따라 한시
와 한문학 대신에 와카(和歌)나 모노가타리(物語), 일기가 새로운 문학으로 등장하였다. 기
노 쓰라유키(紀貫之)가 편찬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는 최초의 칙찬와카집(勅撰和歌
集)으로 귀족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모노가타리의 대표적인 작품으
로는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세이쇼나곤(清少納言)의 『마쿠
라노소시(枕草子)』등이 있다.
연습문제
1. 다음 중 아스카․하쿠호 문화의 특징에 해당하는 것은?
①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② 무가의 성쇠를 그린 역사서나 역사문학이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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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일본적인 사상이나 의식이 표면에 등장하여 문화의 국풍화가 진행되었다.
④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한적함과 간소함을 추구하는 문화가 발전하였다.
정답 ①. 7세기 초에 나라 분지의 아스카지방을 중심으로 꽃핀 문화를 아스카문화라 하며,
그 뒤 8세기 초까지 이어진 문화를 하쿠호문화라고 한다. 이 시기에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
로부터 선진문명을 도입해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2. 헤이안쿄로 건설되어 천년 간 일본의 수도로서 역할을 해왔으며 역사적 유물이나 풍토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① 교토 ② 고베
③ 나라 ④ 요코하마
정답 ①. 간무천황은 794년에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나라에서 헤이안쿄로 수
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미나모토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 때까지의 약 400
년간을 헤이안시대라고 부른다.
3. 일본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책은?
① 일본서기(日本書紀)
② 해체신서(解体親書)
③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④ 황실전범(皇室典範)
정답 ①. 일본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책은 712년에 편찬한 『고사기』와 720년에 편
찬한 『일본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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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강 일본역사의 전개―중세(1)
1. 원정과 중세의 개막
11세기 후반 고산조(後三条) 천황은 섭정을 두지 않고 스스로 정치를 행하였다. 뒤이은 시
라카와(白河)천황도 스스로 정치에 임하였고, 1086년에는 아들인 호리카와(堀河)천황에게 양
위하고 자신은 상황(上皇)이 되어 원청(院庁)에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는 원정(院政)을 시
작했다. 이리하여 약 140년 동안 원정이 이어졌다.
상황은 지금까지 섭관가에 억눌려 있던 중하급 귀족이나 측근을 중심으로 정치를 행하고,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의 무사를 임명해 군사적 기반
으로 삼았다.
1156년에는 천황가와 귀족이 얽혀 패를 갈라 분쟁하면서 난이 일어났는데, 다이라노 기
요모리(平淸盛)를 끌어들인 고시라카와천황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호겐의 난(保元の亂)이라
고 한다. 이 난에 동원된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양 무사단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1159년에는 미나모토노요시토모가 난을 일으켰으나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진압
되었다. 이를 헤이지의 난(平治の亂)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기요모리는 요시토모
를 누르고 무가 최고 실력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2. 가마쿠라막부
(1) 가마쿠라막부의 탄생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전제정치가 극에 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카와(後白河)법황
의 황자와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는 다이라씨를 타도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가 군대를 일으켜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 간
의 5년에 걸친 오랜 싸움인 겐페이갓센(源平合戰)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최종 승리한 자
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 그는 1185년에 다이라씨를 멸망시켰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가마쿠라막부를
열었다. 이로부터 140년 동안 가마쿠라막부가 멸망할 때까지를 가마쿠라(鎌倉)시대라고 한
다. 이로써 천황과 귀족 중심의 지배에서 무사정권이 중심이 되는 무사사회로 전환하게 되
었다.
(2) 가마쿠라막부의 지배구조
막부 지배의 근본이 된 것은 쇼군(將軍)과 고케닌(御家人)의 주종관계였다. 요리토모는 무
사단에서 보이는 주인(主人)과 종자(從者)의 주종관계를 막부의 근본에 두어, 쇼군은 고케닌
이라고 불리는 종자에게 은혜를 주고 고케닌은 쇼군에게 봉공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러
한 주종관계에 기초한 사회제도를 봉건제도(封建制度)라고 한다.
요리토모는 조정을 위협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사들을 각국의 장원이나 공령에 슈고와 지
토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장원은 장원영주가 임명한 장관 외에 막부가 임명한 지
토가 설치되어 이원적 지배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지토에 임명된 고케닌 중에는 장원영주와
대립하여 연공을 바치지 않고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들을 게닌(家人)으로 삼아 세력을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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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는 자도 있었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는 고쿠시와 슈고, 장원에서는 장원영주와 지토 간
의 이중지배로 인해 양자가 갈등하였다.
요리토모 사후 막부의 실권은 싯켄(執権)이라고 불리는 직위가 장악하였다. 막부의 주도권
은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가 장악하였고, 이후 가마쿠마막부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호조
씨 일족이 싯켄으로서 정치를 장악하였다.
한편 교토의 고토바(後鳥羽)상황은 강력한 원정을 행하며 서국(西國)의 무사들을 모아 군
사력을 키워 조정의 권위를 만회하려고 하였다. 1221년 상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상황 중심
의 정치를 행하기 위해 거병하였는데 결국 호조씨가 승리하였다. 이를 조큐의 난(承久の亂)
이라고 한다.
조큐의 난 이후 막부는 상황을 유배시키고 조정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조정 편에 가담한
귀족이나 무사의 영지 3천여 개소를 몰수하고 전투에 공을 세운 고케닌을 그 지역의 지토로
임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막부의 전국지배가 달성되고 막부는 황위 계승까지 간섭하게 되었
다.
(3) 무사단의 세계
이 시기 각 지방에서는 무사들이 지역에 토착하여 소령(所領)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대부
분 장원이나 국아령(国衙領)에 거주하면서 장관이나 지토로서 현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무사들은 일족의 단결을 위해 우두머리인 소료(惣領)의 강력한 통제를 따랐는데 군사행동의
단위는 이에(家)와 일족(一族)이었다.
무사단은 지토나 장관으로서 장원촌락의 경찰․재판의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농민으로부
터 연공을 징수하여 장원영주에게 납입하였다. 장원영주는 대부분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교
토, 나라에 살고 있었고 무사단은 장원촌락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지배
권은 점차 무사단에게 옮겨갔다.
3. 가마쿠라문화
이 시대는 귀족지배의 전통이 남아있는 가운데 무사가 힘을 강화해나갔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우아한 귀족문화가 계승되면서 한편으로 무사나 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소박한 문화가 성장하였다. 적극적인 무사의 기풍을 반영한 생동감 있고 실용적인 문
화가 생겨났다. 그리고 송나라, 원나라의 문화도 활발하게 도입되어 생활문화에 새로운 요소
를 가미시키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귀족문학의 대표적인 예로서 『신코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가 있으며, 수필
로는 가모노 조메이(鴨長明)의 『호조키(方丈記)』,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쓰레즈레구
사(徒然草)』가 있다. 무사문학으로『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있으며, 또한 막부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서 『아즈마카가미(吾妻鏡)』가 있다.
4. 몽골의 침입
1274년에 원나라는 약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쓰시마(対馬), 이키(壹岐)를 거쳐 하카타만
(博多湾)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거센 비바람으로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다.
그 후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1281년에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규슈의 하카타만에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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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카타만 일대에 축조한 방어용 석루(石壘)와 대량으로 동원된 무사
들의 강한 저항으로 고전을 거듭하였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도 폭풍우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고 다시 물러났다.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원군의 공격을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 고안노
에키(弘安の役)라고 한다.
몽골 침입 이후 막부와 고케닌 사회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원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고케닌이 동원되었는데, 몰수한 영지가 없기 때문에 고케닌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고케닌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또한 막부 내부에서 호조씨의 힘이 더욱 강
해지고 독재성향을 나타내게 됨에 따라 불만을 갖는 고케닌이 늘어갔다. 이로 인해 막부정
치의 특징인 고케닌의 협력을 중심으로 한 싯켄정치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연습문제
1. 겐페이갓센(源平合戦)에서 다이라씨를 무너뜨리고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가마쿠라막
부를 연 사람은?
① 아시카가 다카우지
②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③ 오다 노부나가
④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답 ②. 1185년 겐페이갓센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에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
2. 고토바상황이 1221년 막부를 타도하고 상황 중심의 정치를 하기 위해 서국의 무사들을
모아 거병하였으나 결국 막부인 호조씨가 승리한 사건을 무엇이라 하는가?
① 조큐의 난(承久の亂) ② 호겐의 난(保元の亂)
③ 헤이지의 난(平治の亂) ④ 오닌의 난(応仁の乱)
정답 ①. 조큐의 난 이후 막부는 상황을 유배시키고 조정을 감시하였으며, 조정 편에 가담한
귀족이나 무사의 영지를 몰수해 전투에 공을 세운 고케닌을 그 지역의 지토로 임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막부의 전국지배가 달성되고 막부는 황위계승까지 간섭하게 되었다.
3. 가마쿠라문화의 특징에 해당하는 것은?
① 우아한 귀족문화가 계승되면서 무사나 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소박한 문화가 성장하
였다.
② 불교색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현실의 생활을 즐기는 청신하면서도 화려한 문화가 꽃피
었다.
③ 일본적인 사상이나 의식이 표면에 등장하여 문화의 국풍화가 진행되었다.
④ 서민문화가 발전해 하이카이나 우키요조시, 닌교조루리,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정답 . 가마쿠라시대는 귀족지배의 전통이 남아 있는 가운데 무사가 힘을 강화해나간 시
기로 이러한 시대적 특징이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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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일본역사의 전개―중세(2)
1. 남북조의 동란
14세기에 조정은 황위와 황실령의 장원을 둘러싸고 지묘인통(持明院統)과 다이카쿠지통
(大覚寺統)의 두 개의 황통이 대립하였다. 이에 대해 막부는 양통이 교대로 황위에 오르는
방식을 제창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고다이고(後醍醐)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
의 정치를 부활시키고자 두 번의 토막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두 번 다 실패로 끝났다.
막부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를 파견하였으나 그는 막부
를 배반하고 호조씨 일족을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1333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였다. 고
다이고천황은 아시카가의 공을 인정해 그에게 고다이고천황의 이름 중의 한 자인 다카(尊)
를 하사하였고,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로 바꿨다.
고다이고천황은 천황 친정을 이상으로 하여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의욕적인 새로운 정치
를 추구하였다. 1334년에 연호를 겐무(建武)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러한 새 정치를 겐무의 신
정(建武の新政)이라고 한다. 겐무의 신정은 귀족과 무사의 양쪽을 절충한 공무(公武)절충 정
치였다.
1335년 호조 도키유키(北条時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향한 아시카가 다카
우지는 무가정치의 재흥을 꾀하며 신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1336년 교토에서 지묘인통
의 고묘(光明)천황을 세우고 겐무시키모쿠(建武式目)을 정해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다카우
지는 1338년에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막부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고다이고천황의 신정치는 3년 만에 무너지고, 천황은 1336년에 야마토 남부
에 있는 요시노(吉野)로 도망가 황위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이후 조정은 요시노의 남조와
교토의 북조가 대립하여 전란이 계속되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지방의 무사들도 두 세
력으로 나뉘어 이후 60년에 걸쳐 싸웠다.
남북조의 동란이 심화되는 가운데 세력을 넓혀간 것은 각 구니별로 임명된 슈고이다. 막
부는 지방의 무사를 조직하기 위해 슈고의 권한을 강화했기 때문에 슈고는 이것을 이용해
장원침략을 반복하여 고쿠진(國人)이라고 불리는 신흥무사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혀나갔다.
한편, 1352년에 다카우지는 격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지역에 장원이나 공령에서 나오는 연
공 중의 절반을 군량미로 징수하여 이를 무사들에게 나누어주는 권한을 슈고에게 주었다.
이를 반제령(半濟令)이라고 한다. 이처럼 슈고의 권한이 강화되자 장원과 공령의 연공징수를
슈고가 떠맡는 슈고우케(守護請)가 번성하게 된다. 무로마치시대의 슈고는 반제령과 슈고우
케를 이용하여 자기 관할 지역에 존재하는 장원과 국아령을 자신들의 영지로 만들었으며,
관할지역의 국아의 기능도 흡수해 일국 전체에 미치는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를 가마쿠라
시대의 슈고와 구별해서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부른다.
2. 무로마치막부의 정치와 문화
(1) 정치체제
막부의 지배가 안정된 것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에 와서이다. 그는 교토
의 무로마치(室町)에 하나노고쇼(花の御所)라고 불린 화려한 저택을 짓고 정치를 하였으므로
아시카가씨의 막부를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고 부른다. 요시미쓰는 1392년에 남조 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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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해서 남북조 합체(南北朝の合体)를 실현하고 슈고다이묘를 눌러 막부의 전국 지배를 완
성하였다.
무로마치막부는 각 지방에 있는 슈고(守護)의 영국(領国) 지배를 기초로 하였다. 이들 고
케닌 중에는 수개국의 슈고를 겸하는 다이묘도 있어 쇼군은 슈고다이묘의 실력 앞에서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요시미쓰는 보다 큰 힘과 권위를 얻기 위해 조정이나
사원세력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의 자리에 올라 조정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교토의 행정․재판권을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요시미쓰의 사후 슈고다이묘는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막부의 권위는 더욱 저
하하였다.
(2) 기타야마문화
남북조의 합체가 이루어진 3대 쇼군 요시미쓰 시대의 문화를 가리켜 요시미쓰가 교토의
기타야마에 만든 별장에 유래해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라고 부른다. 이 별장에 세워진 화려
한 금각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귀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신덴즈쿠리(寝殿造) 양
식, 2층은 무사들의 취향인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 3층은 선종 양식의 불당으로 되어 있
다. 기타야마문화는 수백 년 동안 축적된 귀족문화에 선종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생겨
난 새로운 무가문화라고 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에는 귀족과 무가의 성쇠를 그린 역사서나 역사문학이 탄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마스카가미(増鏡)』,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태평기(太平記)』등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집단의 예능으로서 렌가(連歌)나 노(能), 교겐(狂言) 등이 발달하였다.
3. 센고쿠시대
(1) 하극상의 시대
요시노리의 사후 막부는 슈고다이묘의 세력 투쟁의 장이 되었다.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
는 정치에 의욕을 잃고 재위 중에 동생에게 쇼군직을 양위하려고 하였는데, 호소카와 가Tm
모토(細川勝元)와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 양대 세력은 쇼군의 계승을 놓고 격렬하게 대
립하였다. 또한 유력한 슈고다이묘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도 대립하였다. 이러한 양파의 싸
움은 지방의 여러 슈고다이묘가 가세하면서 전국적인 전란으로 발전하였다.
전란은 1467년에 시작되어 1477년까지 11년간 지속되었다. 이를 오닌의 난(応仁の乱)이라
고 한다. 이 싸움에는 수십 만의 병력이 가담하여 교토에는 무사들로 넘쳐났다. 전란은 지방
에도 펴져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귀족이나 사원을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막부와 슈고다이묘의 몰락을 결정적
인 것으로 만들었다. 교토에 올라와 싸운 슈고다이묘의 영국에서는 점차 가신이었던 슈고다
이(守護代)나 고쿠진에게로 실권이 옮겨가고 있었다. 가신이 예전의 지배자를 쫓아내고 슈고
가 된 곳도 있다. 이 난을 시작으로 천황과 장군의 권위는 실추되고 각 지역별로 독립적인
정권이 나타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오닌의 난 이후 100년 이상 계
속된 전란과 하극상의 시대를 센고쿠(戦国)시대라 한다.
(2) 센고쿠다이묘의 시대
오닌의 난 이후 하극상의 풍조는 전국으로 퍼져 각 국에서는 실력에 의해 영국을 지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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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다이묘가 탄생해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이들을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라고 하는데, 이들
이 대두한 센고쿠시대는 신구 세력이 교체되는 동란의 시대였다. 이들은 대체로 슈고다이나
고쿠진 출신에서 올라간 사람으로 독자적인 실력으로 슈고다이묘가 되었다. 센고쿠다이묘들
은 약 100년간 싸움을 계속하면서 천하통일을 추구하였다.
센고쿠다이묘의 영국을 분국(分國)이라고 한다. 센고쿠다이묘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분국
통치의 제1목표를 부국강병에 두고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군사적인 측면뿐
만 아니라 산업발전에도 힘썼는데 부국을 위해 치수(治水)․관개사업에 힘을 쏟아 논밭을
개척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검지(檢地)를 실시해 영내 파악에도
힘을 기울였고, 산업개발에도 힘써 금은 등의 광산개발이나 면화재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5-16세기에 걸쳐 각지에서는 강한 세력을 가진 센고쿠다이묘가 전투를 반복하면서 패권
을 다투었다. 이 중에 천하통일의 첫 걸음을 내디딘 사람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이다.
(3) 소손과 도시의 발전
이 시기 농촌에서는 소농민이 성장하였다. 14세기 후반에 농촌은 소(惣) 또는 소손(惣村)
라고 불리는 자립적인 단위를 형성해 영주의 부당한 요구에 대항하기 위한 실력을 길렀다.
소는 유력농민과 소농민이 결합한 것으로 요리아이(寄合)라는 회의를 통해 촌락의 운영을
자치적으로 하고 규약을 정해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신사를 중심으로 제례의
식을 통해 공동체적 단결을 꾀하였다. 소는 사회적․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하나
의 단위로 행동하게 되었다.
소를 형성한 농민들은 서로 협력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집약화와 다각화를 모색
했다. 또한 농민들은 주변의 촌락과 연합해서 고(郷)나 구미(組)라는 연합조직을 만들어 장
원영주에게 연공 감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공업자도 점차 장원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주문생산이나 시장에서 팔기
위한 상품생산을 하였다. 직인이나 상인의 동업자 조합인 자(座)도 규모가 커지고 그 종류도
증가하였다.
교통의 발달과 함께 미나토마치(港町)․슈쿠바마치(宿場町), 신사참배의 유행과 함께 몬젠
마치(門前町)나 지나이초(寺内町) 등이 각지에서 발전하였다. 도시의 상공업자는 크게 성장
하고 도시의 자치운영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4) 히가시야마 문화
8대 쇼군 요시마사(義政)는 오닌의 난 이후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은각(銀閣)을 세우
고 조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은각은 2층으로 된 간소한 건물로 간소함 속에 소란한 세상
에서 벗어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자 한 취향이 엿보이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이 시
기의 문화를 히가시야마문화(東山文化)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가레산스이(枯山水) 수법을 이용한 일본 특유의 정원도 만들어졌다. 료안지
(龍安寺)의 석정(石庭)은 가레산스이의 수법으로 선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백지 위에 먹의 농담으로 자연이나 인물을 표현하는 수묵화도 선의 정신을 잘 나타
낸다.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와비차(侘茶)의 형식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에 와서이
다.
이처럼 히가시야마문화는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한적함과 간소함 속에 유현(幽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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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추구하고 있는데, 노나 수묵화, 다도, 화도(華道), 쇼인즈쿠리로 된 건물과 산수를 표현한
정원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일본인의 생활문화로 이어진다.
한편 서민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이들이 즐기는 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제아미가 완성시킨
사루가쿠노(猿楽能)는 상류사회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널리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소박
하고 오락성이 강한 덴가쿠노(田楽能)도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또한 본오도리(盆踊
り), 넨부츠오도리(念仏踊り), 후류오도리(風流踊り), 교겐(狂言), 렌가(連歌)도 유행하였다.
연습문제
1. 막부와 슈고다이묘들이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싸우고, 이 싸움이 결국 전국적인 전란으로
발전하면서 장기화되었다. 이로써 센고쿠시대의 시작을 가져오게 된 이 전란은 무엇인가?
① 호겐의 난 ② 오닌의 난
③ 조큐의 난 ④ 헤이지의 난
정답 ②. 오닌의 난은 1467년에 시작되어 1477년까지 11년간 지속되었는데, 장기간에 걸친
이 싸움은 귀족과 사원, 막부와 슈고다이묘를 몰락시키고 각 지역별로 독립적인 정권을 등
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호조씨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막부를 배반해 호조씨
일족을 멸망시키고 무로마치막부를 연 사람은?
① 다이라노 기요모리
②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③ 아시카가 다카우지
④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정답 ③. 가마쿠라막부를 멸망시킨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가정치의 재흥을 꾀하며 고다이
고천황의 신정부에 반기를 들어 1336년 교토에서 지묘인통의 고묘(光明)천황을 세우고 rps
무시키모쿠(建武式目)를 정해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338년에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무로마치막부를 열었다.
3. 다음 설명 중 히가시야마문화의 특징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①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와비차의 형식이 등장하였다.
② 선종의 영향을 받아 한적함과 간소함 속에 유현미를 추구하고 있다.
③ 서민들 사이에서 사루가쿠노, 덴가쿠노, 본오도리, 교겐, 렌가 등이 유행하였다.
④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무사문학의 걸작으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있다.
정답 ④. 『헤이케모노가타리』는 가마쿠라시대의 문학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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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일본역사의 전개―근세(1)
1. 통일정권의 성립
(1) 유럽인의 내항
일본에 처음으로 서양인이 도달한 것은 1543년의 일로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에 포르투
갈 사람을 태운 중국배가 도착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사람들은 일본과의 무역이익이 큰 것
을 알고는 매년 무역선을 규슈에 파견하였다. 포르투갈 사람보다 40년 뒤늦게 스페인 사람
도 히젠(肥前)의 히라도(平戸)에 내항하였고 이후 일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남만인(南蛮人)이라 불렀다.
남만인은 신병기인 조총(鉄砲)과 기독교를 가지고 왔는데, 이는 일본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쇼쿠호 정권
센고쿠시대의 격렬한 쟁란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계속되는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통일은
완성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배하였던 정권을 앞의 글자를 따서 쇼
쿠호(織豊)정권이라고 하며, 이들이 성을 쌓아 거주하였던 곳의 지명에 유래해 이 시대를 아
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라고 부른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0년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에서 이마카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을 쓰
러뜨리고 급속히 힘이 강해져, 1568년에는 교토로 올라와 13대 쇼군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
시아키(足利義昭)를 15대 쇼군으로 세웠다. 1573년에는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된 요시아키를
추방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1582년에 주고쿠지방의 모리를 공격하기 위
해 출진하는 도중에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반
으로 사망하였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완성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히데요시는 노부
나가의 가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장대
한 오사카성(大坂城)을 세워 그곳을 본거지로 하여 활동하였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정치체제나 경제질서에 도전하여 새로운 체
제를 만들었다. 그는 검지(検地)와 가타나가리(刀狩)를 통해 전국의 토지를 정확히 파악함으
로써 근세 봉건제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농민으로부터 무기를 몰수해 병농분리를 추진하였
다. 또한 사카이(堺), 교토, 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 나가사키(長崎) 등의 주요도시를 직
할로 하여 재정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한 주요 가도를 정비하고 화폐를 주조하였다. 그리
고 주요 광산을 직할령으로 하여 금․은의 생산을 독점하였다.
(3) 모모야마 문화
노부나가․히데요시 시대의 문화를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전국통
일이 이루어지고 하급무사나 농민 출신에서 출세한 새로운 다이묘가 여럿 탄생하였으며, 상
공업이 활발해져 부를 축적한 호상이 다수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흥세력의 대두는 문화에도
반영되어 이 시기에는 청신(淸新)하면서도 화려한 문화가 꽃피었다. 또한 사원세력이 약해졌
기 때문에 불교색이 현저하게 줄고 현실생활을 즐기는 경향이 강해졌다. 또한 남만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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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남만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는 다이묘들이 거주하던 성으로 아즈치성(安土城), 오사카성(大坂
城), 후시미성(伏見城), 히메지성(姫路城)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성이다.
또한 부유한 상공업층을 중심으로 한 문화도 꽃피었다. 신흥 무장이나 부유한 서민들은
다도(茶道)나 꽃꽂이(花道)를 즐겼다.
민중오락도 풍요로워져 온나가부키(女歌舞伎)나 노, 교겐 등이 유행하였다. 류큐로부터 샤
미센(三味線)이 전래되어 거기에 맞춰 인형을 조작하는 닌교조루리(人形浄瑠璃)도 유행하였
다. 이와 더불어 서적출판도 활발해졌다.
남만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남만에서 들어온 의복, 과자, 담배 등이 유행하였다. 유럽의
천문학이나 의학, 지리학 등의 학문이 전해지고, 활자인쇄술이 전해져 기독교 관계 서적도
간행되었다.
2. 막번체제의 확립
(1) 에도막부의 성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이다. 그는
1603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에도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이때부터 메
이지유신으로 메이지정부가 등장하기까지의 260년간을 에도시대(江戸時代)라고 한다. 이후
도쿠가와 집안이 대대로 쇼군직을 세습하면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통치하였다. 반면 에도
시대에 와서 천황은 더욱 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에도막부는 중앙은 쇼군이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지방은 쇼군과 주종
관계에 있는 다이묘(大名)라는 영주가 통치하는 자율성을 가진 체제였다. 다이묘의 영지와
그 지배기구를 총칭해서 번(藩)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에도시대에는 쇼군(幕府)과 다이묘
(藩) 사이의 주종관계를 중심으로 전국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는데, 이
를 막번체제(幕藩體制)라고 한다.
도쿠가와 쇼군은 일본 열도의 지배자이지면 최대의 다이묘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이묘와
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하였다. 쇼군은 덴료(天領)라고 부르는 직할령을
보유하였는데, 17세기 말에 직할령은 약 400만석을 넘었다. 여기에다 가신인 하타모토(旗本)
에게 나누어준 영지 약 300만 석을 더하면 도쿠가와 쇼군에 속한 영지는 약 700만 석에 달
한다. 이는 전국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또한 군사력 면에서도 쇼군은 직
속 가신단과 많은 다이묘의 군역으로 압도적인 힘을 보유하였다.
쇼군의 가신으로서 1만석 이상의 영지를 갖는 자를 다이묘라 한다. 전체 260-270명에 이
르는 다이묘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
(外様) 다이묘로 분류되었다.
막부는 막번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이묘를 강력히 통제하였다. 1615년 막부는 다이묘
의 거성(居城)을 하나로 제한시키는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을 발포하였다. 그리고 무가제법
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여 다이묘가 지켜야 할 사항을 제시하였다. 3대 쇼군 이에미쓰 때에
는 산킨코타이세이(參勤交代制)를 의무화하여 다이묘가 격년으로 1년간 에도에 머물고, 처자
가 인질로 에도에 머물도록 하였다.
반면 다이묘는 쇼군이 영지를 하사하거나 이미 지배하고 있는 영지의 지배권을 승인한 대
가로 쇼군에게 군역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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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막부는 조정과 사원의 통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5년에 금중
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천황과 귀족의 행동을 통제하였다.
사원도 사원법도(寺院法度)를 제정하여 통제하였다.
(2) 신분질서
에도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이 있어 신분질서가 엄격히 유지되었다. 이는 막번체제
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근간이었다.
무사는 사민의 최상위에 있는 계급이다. 무사에게는 성(苗字)을 사용할 수 있으며, 칼을
찰 수 있는 특권(帯刀の特権)이 부여되었으며, 농민이나 초닌의 무례함에 대해 그 자리에서
칼로 베어버릴 수 있는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라는 특권이 인정되었다.
농민은 연공과 부역의 부담자로서 중시되었는데, 막번권력은 일상생활까지도 세세하게 지
도할 정도로 농민을 가혹하게 통제했다. 농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무라(村)라고 하는데, 농
민들은 관개시설이나 산림 등을 공유하며 농사를 도우며 같은 조상을 제사 지내는 등 공동
체로서 생활하였다.
도시에 사는 직인(職人)이나 상인(商人)은 조닌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직업별로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였다. 이들에 대한 통제는 농민에 비해 느슨하였다. 이들은 영주에게 영업세를
납부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부담을 지지 않았다.
이들 밑에는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불리는 천민계급이 있었다. 에타는 주로 짐승을
잡아 피혁제품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히닌은 시체를 처리하거나 걸식하는 사람이다.
3. 쇄국정책
이에야스는 해외무역에 관심이 많아 서양과의 자유무역을 허락하고 일본인의 해외진출도
장려하였다. 이에야스는 1609년에 네덜란드에, 1613년에 영국에 무역을 허가하여 히라도에
상관(商館)을 두도록 하였다.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복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1607년 쓰시마(対馬)의 소씨(宋氏)의 노력
으로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한 이래, 이후 쇼군이 바뀔 때 마다 조선통신사가 방일하였
다. 이후 조선통신사는 약 200년간 12회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사절규모는 300-500명에 이르
렀다.
그러나 1613년 막부는 크리스트교의 포교가 스페인․포르투갈의 침략을 부른다고 두려워
하여 전국에 기독교 금교령을 내렸다. 기독교의 금교와 더불어 해외무역도 통제해 1633년에
제1차 쇄국령을 내린 이래 조선과 류큐 이외에 일본에 오는 외국선은 네덜란드와 중국배로
제한되고 그 내항지도 나가사키에 제한됐다.
연습문제
1. 센고쿠다이묘 간의 전투에서 계속적으로 승리하고 무로마치막부를 무너뜨림으로써 전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① 오다 노부나가 ② 도요토미 히데요시
③ 도쿠가와 이에야스 ④ 이시다 미쓰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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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①. 오다 노부나가는 1560년 오케하자마전투에서 승리한 후 급속히 힘이 강해져, 1568
년에는 교토로 올라와 13대 쇼군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세웠다. 그
후 기나이 제압에 나서 사원세력을 타도하였고, 1573년에는 요시아키를 추방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렸다.
2. 에도시대의 막번체제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는 막부가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② 1만석 이상의 영지를 갖는 자를 다이묘(大名)라고 한다.
③ 다이묘의 영지와 그 지배기구를 총칭해서 번(藩)이라고 한다.
④ 에도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
(外様) 다이묘로 구분하여 차이를 두었다.
정답 ①. 금중병공가제법도는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황과 귀족을 통제하기 위해 만
든 것이다.
3. 노부나가․히데요시 시대에는 전국통일이 이루어지고, 하급무사나 농민 출신에서 출세한
새로운 다이묘나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호상이 다수 등장하면서 청신하면서도 화려한 문
화가 꽃피었으며, 남만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이 시대의 문화를 무엇이라 하는가?
① 가세이문화(化政文化)
②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
③ 겐로쿠문화(元禄文化)
④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
정답 ②.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배하였던 시대를 이들이 성을 쌓아 거주
하였던 곳의 지명에 유래해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라고 부르며, 이 시대의 문화
를 모모야마문화라 부른다.
4. 에도시대에 마치의 거주자인 상인과 수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은?
① 조닌(町人) ② 햐쿠쇼(百姓)
③ 요리아이(寄合) ④ 야쿠닌(役人)
정답 ①. 에도시대에 상인과 수공업자를 조닌(町人)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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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강 일본역사의 전개―근세(2)
1. 막정의 안정
(1) 문치정치
에도막부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막부는 무력에 의거하는 무단정치에서 법과 제도에 따
라 통치하는 문치정치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다이묘에 대한 통제정책을 완화하고 주인이 죽
으면 가신이 뒤따라 죽는 순사를 금지하고 유력 다이묘에 대해 인질제도를 폐지하였다.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직접 정무를 관장하였는데, 무가사회의 무사안일주의와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신상필벌주의(信賞必罰主義)를 채택하고, 다이묘에 대한 감사기능을
강화하였으며, 관료조직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조닌의 사치풍조도 엄벌하였다. 그리
고 유학의 장려에 힘써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을 세웠으며, 각종 의례를 정비하였다.
한편 제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가 취임하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를 발탁하였는데,
아라이는 6대, 7대 쇼군에 걸쳐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뛰어난 주자학자로 유교와 정치를
조화시키려 하였는데, 문치주의는 아라이에 의해 현실정치의 이념으로 정착하였다. 그는 유
학에 근거하여 제도와 의례를 정비하였는데, 조정의 의례를 도입하고 복제와 관위를 비롯한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여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2) 산업의 발달
에도시대에는 농업과 어업, 상공업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막부와 각 번에서는 적극적으로
신전개발을 진행하여 경지를 확대하였다. 특히 도시의 유력상인이 자본을 투자하여 치수․
관개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민이 경작에 힘쓰고 작물의
품종개량, 비료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및 발명이 이루어져 농업생산력은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과 더불어 어업이나 광업, 수공업 등 여러 산업이 발전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수공업
도 발전하였고, 각지의 특산품 생산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3) 교통의 정비와 상업의 발달
에도나 오사카, 교토에는 다이묘가 연공으로 징수한 쌀이나 특산물 등이 집산하였다. 다이
묘들은 연공으로 수취한 미곡과 특산물을 에도나 오사카로 운송하여 금전으로 교환한 후 여
러 가지 물자를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을 팔기 위해 창고를 두어 상인에게 팔도
록 하였는데 보관과 판매를 맡은 상인은 금융업을 겸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따라
상품유통망이 전국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도시도 발전하였다. 교토와 오사카, 에도는 삼도(三都)라고 불리
어 크게 발전했다. 교토는 전통과 문화의 도시로 전통적인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으로 불릴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에도는 크게 번성하여 인구 100만 명
의 일본 최대의 소비도시가 되었다. 이들 도시에는 환전상을 비롯해 상업활동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호상이 출현했다.
한편 막부의 전국지배가 달성되고 상품유통이 진전됨에 따라 전국적인 교통망도 정비되었
다. 또한 상품의 대량수송을 위한 해상교통도 발달하였다.
2. 겐로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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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전기의 문화를 겐로쿠(元禄)문화라고 한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는
막부체제가 안정되면서 문화의 주요 담당자층으로서 조닌(町人)이 부상하였다. 교토나 오사
카의 부유한 상인이 이 시기 문화의 주요 담당자였다. 또한 쇄국에 의해 외국의 영향을 받
는 일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유학의 발전은 눈부셨다. 문치주의가 대두하면서 학문과 사상은 더욱 발전했다.
특히 주자학(朱子学)은 막부와 다이묘의 보호 속에서 발전하였다. 유학은 군신(君臣)과 부자
(父子)의 분별을 중시하고 상하질서를 존중하며, 대의명분을 중시했기 때문에 막부와 다이묘
는 이를 장려하였다. 막부는 주자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을 에도로 불러 유학을 장려하였
다.
한편 서민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인간성을 추구한 조닌문예(町人文芸)가 가미
가타(上方)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렌가에서 현실적이며 해학적인 서민의 시가로 하이카
이(俳諧)가 발전하였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유현한적(幽玄閑寂)을 특징으로 하는 쇼후
하이카이(蕉風俳諧)를 확립하였다.
서민의 읽을거리로서 소설도 발달하였는데,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는 조닌생활을 실감
나게 표현하여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연극도 인기가 있었다.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은 교토의 무사 출신으로 닌교죠
루리나 가부키의 각본을 썼다.
미술분야에서 서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우키요에(浮世絵)이다.
3. 막번체제의 동요
(1) 교호개혁
18세기에 들어 막부와 각 번은 재정난에 허덕였다. 상품경제가 계속 팽창하면서 소비지출
이 커지게 되자 연공수입만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막부와 번은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연공수입에 의존하는 무사들의 생활도 더욱 궁핍해져 갔다.
한편 화폐경제가 침투하면서 농촌의 분해현상도 심각했다. 특히 18세기에 와서는 천재지
변의 영향으로 만성적인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면서 영세농민 중에는 파탄한 농민이 속출하
였다.
이러한 체제동요의 위기 속에서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는 이에야스시대의 정치를 이상
으로 내걸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 막정을 재건하고자 하는 개혁에 착수했는데, 이를 교호
(享保)개혁이라고 한다. 이들 시책에 힘입어 막부의 재정은 겨우 호전됐다.
(2) 다누마 시대의 정치와 사회
요시무네의 개혁은 일단 성과를 얻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막번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
다. 18세기에는 여러 차례 재해가 발생하면서 수십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계속되는
흉작과 기근은 농민과 도시민의 생활에 타격을 주었으므로 각지에서 농민들은 영주에게 요
구사항을 내걸고 저항하였다. 도시에서도 하루하루의 생계가 어려운 빈곤층들이 증가하였고,
빈곤과 물가폭등의 영향으로 살기 어려워진 도시빈민들은 쌀가게나 부잣집을 습격하고 파괴
하였다.
10대 쇼군 이에하루(家治)는 직접 정치를 하지 않고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를 기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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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다누마는 20년간 막부의 정치를 담당하였는데, 그가 정치를 담당
했던 시대를 가리켜 다누마시대라고 한다.
오키쓰구는 재정을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상인자본을 이용하였다. 그는 막부 직영의 좌
를 만들어 동이나 철, 조선인삼을 전매하고, 일반 상공업자의 가부나카마(株仲間)를 적극적
으로 공인하여 이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나고, 그는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실각하였다.
(3) 간세이개혁
다누마 이후에 등장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11대 쇼군 이에나리(家斉)를 보
좌하여 막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간세이(寬政)개혁이라고 한다.
사다노부는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해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식목과 개간을 장려하였다. 또
한 농민이 벼농사에 주력하도록 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농민이 다른 곳으
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도시에 일하러 온 농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빈곤한 농민에게
는 농기구를 살 수 있는 돈과 식량을 주어 자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엄격한 검약령을 내리고 조정의 경비를 대폭 줄이도록 하였다. 무사나 서민도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퇴폐적인 풍속도 강력히 단속하여 호색적인 출판
물을 금지하고, 남녀혼욕도 금지하였다. 또한 정치에 대해 비판하지 못하도록 언론이나 사상
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서민들뿐만 아니라 쇼균과 쇼군의 주변 사람
들로부터 심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끝났다.
(4) 덴포개혁
사다노부가 퇴진한 이후 19세기 초에 정치를 장악한 것은 11대 쇼군 이에나리(家斉)이다.
이에나리는 쇼군직을 아들인 이에요시에게 넘긴 다음에도 오고쇼(大御所)로서 정권을 장악
하였다. 그의 50년간에 걸친 치세를 오고쇼시대라고 한다.
1830년대에는 심한 흉작이 이어져 농촌에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덴포의
대기근(天保の大飢饉)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 도시에서는 식료가 급상승해 아사하는 자가 속
출하였다.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시에서는 폭동이 빈번히 발생
했다.
1841년에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로쥬인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는 막부의 권력 강화를
위해 덴포(天保)의 개혁을 감행하였다. 그는 엄격한 검약령을 내려 무사나 서민의 사치를 금
하고 풍속을 규제하였다. 또한 물가의 앙등은 가부나카마에 의한 가격통제 때문이라고 보고
이들을 해산시켜 자유경쟁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농촌을 재건하기 위해 히토가에시법(人返
しの法)을 공포하여 농민이 도시에 돈벌이를 하러 오는 것을 금지하고 에도에 있는 빈민을
농촌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에도나 오사카 주변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영토를 막부의 직
할령으로 만들어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미즈노 다다쿠
니는 2년 만에 실각하였고 덴포개혁도 중단되었다.
(5) 가세이문화
에도시대 후기에는 에도가 번영함에 따라 문화의 중심이 점차 교토․오사카에서 에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문화는 19세기 초의 분카분세이시대(文化․文政時代)에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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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가세이(化政)문화라고 불린다. 가세이문화는 막부의 엄격한 통제 속에
서 활기를 잃고 퇴폐와 무기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서민이 대두함에 따라 서민문화가
꽃피었다. 서민의 교육기관으로 데라코야가 늘어나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서민은 직접 와카나 하이카이를 만들고 소설을 읽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주요 담당자층
으로 하는 서민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문학에서는 서민을 대상으로 오락을 제공하는 소설이 번창하였다.
미술에서는 우키요에(浮世絵)가 서민들에게 널리 인기를 얻었다.
도시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도시에는 미세모노고야(見世物小屋)나 극장
(劇場) 등의 오락장이 많이 만들어져 서민을 대상으로 한 라쿠고(落語)나 고단(講談) 등의
공연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학과 양학의 발달도 현저했다. 막번체제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학(国学)이라는 새로운 학
문도 등장하였는데, 국학자들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고대인의 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사상은 서양배가 일본 근해에 출현해 개국을 요구하는 등 대외정
세가 긴박해지자 외국 것을 배척하고 천황이 통치하던 고대를 이상사회로 생각해 고대로 돌
아가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서양학술을 연구하는 양학도 발전했는데, 요시무네 시대에 양서 수입이 허용되자 아
오키 곤요(靑木昆陽) 등이 네덜란드의 학문인 난학(蘭学)으로 발전시켰다. 다누마 시대에는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沢)․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이 『해체신서(解体新書)』를 번역하
면서 난학은 의학․어학․천문학 등 실용 학문으로 급속히 발달했다. 19세기에는 막부도 반
쇼와게고요(蛮書和解御用)를 설치하여 양서를 번역하도록 하고, 유럽 각국의 학술을 받아들
였다.
연습문제
1. 다음 보기의 역사적 사건을 일어난 시대순으로 나열할 때 두 번째에 오는 것은?
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웠다.
② 오닌의 난이 장기화되면서 각 지역별로 독립적인 정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③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정권인 야마토조정이 성립하였다.
④ 관동지방 무사들에 의해 가마쿠라막부가 성립되었다.
정답 ④.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정권인 야마토조정이 성립한 것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이다.
가마쿠라막부가 성립된 것은 1185년의 일이다. 오닌의 난이 일어난 것은 1467년으로 이
난은 11년간 지속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세운 것은 1603년의 일이다.
2. 에도시대의 무라와 마치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을 총칭하여 햐쿠쇼(百姓)라 불렸다.
② 수공업자가 사는 지역을 마치(町)라고 불렀다.
③ 마치(町)는 직업별로 거주지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④ 연공은 개별농가에 부과되지 않고 지역단위인 무라(村)별로 부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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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①. 햐쿠쇼는 농민을 지칭하는 말이다.
3.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곳으로 무사나 상공업자의 거주지, 신사, 절 등으로 이루어진
곳을 무엇이라 하는가?(4)
① 무라(村) ② 부락(部落)
③ 쇼(庄) ④ 조카마치(城下町)
정답 ④. 무라(村)는 에도시대 농촌지역의 지역생활의 공동단위로 공납, 부역, 조세를 부과하
는 기본단위이기도 하였다. 무라의 중요한 일은 요리아이(寄合) 라는 농민의 자치적 회합을
통해 결정했다. 부락(部落)은 에도시대의 신분규정상의 천민인 에타(穢多)․히닌(非人)의 집단거
주지역을 말한다.
4.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이에야스 시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내걸고 막부의 재정재건에 힘쓴
개혁을 무엇이라 하는가?
① 다누마개혁
② 덴포개혁
③ 교호개혁
④ 간세이개혁
정답 ③. 요시무네는 재정재건을 위해 지출감소와 경비절감을 모색하고, 무사나 조닌에게 검
약령(倹約令)을 내려 검소한 생활을 명하였다. 한편 수입부족을 메우기 위해 다이묘의 산킨
고타이의 기간을 반으로 줄이고 대신 연공미를 상납하게 하는 아게마이(上げ米)를 명령했다.
그리고 연공증진책의 일환으로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한 양의 연공을 수취하는 정면법(定
免法)을 시행하였으며, 상인의 자본력을 빌려 신전을 개발하였다. 이들 시책에 힘입어 막부
의 재정은 가까스로 호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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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국민국가 ‘일본’의 형성
1. 국민국가
전형적인 국민국가는 역사적으로 근대 서구에서 성립되었다. 18~19세기에 서유럽에서는 봉
건적인 지배 단위들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창출하고 영토 내의 모든 거주자들을
‘국민(nation)’으로 만들어 그 존립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국민국가를 탄생시켰다. 국민국가
(nation-state)란 ‘국민적 또는 민족적 일체감에 기초하여 성립된 통일주권국가’라고 할 수 있
다.
국민을 창출하는 과정은 정치적 통합과 문화적 통합을 포함한다. 정치적 통합은 영토 내 거
주자들을 신분, 종교, 언어, 관습 등을 초월하여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자 주권자로 규정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문화적 통합은 교육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언어라든가 문화를 표준
화하고 역사성을 공유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 문화적 동일성은 사실상 지배집단의
언어‧종교‧문화를 소수집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일본은 서구와 비슷한 국민국가 탄생의 과정을 거쳤다. 일본에서 국민국가가 탄생한 것은
메이지기에 와서이다. 에도시대에 일본은 중앙에는 막부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띠
면서도, 지방에는 쇼군과 주종관계에 있는 다이묘라는 영주가 각 번을 지배하는 막번체제였다.
막부는 어디까지나 다이묘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할 뿐이었다. 따라서 에도시대에 일본인들
은 각자가 속한 번의 질서 속에서 살았고, 번을 넘어선 일본민족이라든지 일본국민이라든지
하는 의식을 갖지는 못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탄생한 메이지정부는 근대국가를 형성
하고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한 여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2. 메이지유신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은 거대한 흑선을 끌고와 일본에 대해 개항을 요구했다. 여기에
대해 막부는 거부하려 했지만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운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다음 해인 1854년에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개국하였다.
1858년에는 미국과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에 대
해서도 일미조약에 준거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2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
었던 쇄국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지배층내에서는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친정(親政)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급
진적인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을 전개하였다. 양이론자들은 교토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사쓰에이(薩英)전쟁이나 4국 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下關) 포격을 통해 서구의 근
대적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따라서 서구화를 통해 서양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는 현실론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토막(討幕)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슈(長州), 사쓰마(薩摩), 도사(土佐), 히젠(肥前)
등 서남지역 유력 번에 있던 하급 무사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토막파는 1868년 보신(戊
辰)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도를 점령했으며, 1868년 15세의 메이지(明治) 천황이 에도성에 입성
하여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이로써 에도막부는 260여 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천황 친정
을 표방하는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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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국가의 설계
(1) 행정체계의 재편
1869년 메이지정부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을 단행하였다. 판적은 토지와 인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봉건영주들로 하여금 영지를 조정에 헌상토록 하고, 이들을 그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
여 다스리게 한 조치이다. 이로써 형식적인 의미의 봉건제도는 폐지되었다.
이어 2년 후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였다. 이것은 지사로 임명된 봉건영주들을 면
직시켜 도쿄로 소환하고, 봉건적 지배단위인 번(藩)을 없애고 근대적 행정단위로서 현(縣)을
설치한 것이다. 현의 행정은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사가 맡게 되었다.
(2) 국경의 확정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고 홋카이도 위의 가라후토(樺太, 사할린)와
지시마(千島)열도에 대한 영토경계를 확정했다. 이 곳에는 원주민인 아이누 외에 일본인과 러
시아인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메이지정부는 1875년 러시아와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
을 맺어, 사할린은 러시아령으로, 지시마열도는 일본령으로 확정하였다.
한편 오키나와도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청나라의 힘이 약한 것을 틈타 1879년 일본 정부
는 무력을 동원하여 오키나와에 있는 류큐왕국을 일본 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이를 류큐처분
(琉球處分)이라 한다.
(3) 신분제 폐지
메이지정부는 에도시대의 귀족 및 다이묘에 대해 화족(華族)이라는 신분을 부여하였다. 또
한 무사계급에게는 사족(士族)의 신분을 부여하고 폐도령(廢刀令)을 내려 사무라이가 칼을 찰
수 있는 특권을 박탈하였다.
한편 농공상 신분을 총괄하여 평민으로 하고 평민이 성을 가지는 것을 허락했다.
천민 신분이었던 에타(穢多), 히닌(非人)에 대해서도 해방령을 내려 평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하였다.
또한 서로 다른 신분간의 통혼을 인정하고 직업과 거주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은 사민평등(四民平等)이라 불리는데 실제로는 황족, 화족, 사족, 평민이라는 새
로운 신분을 창설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4) 징병제 실시
사민평등의 기반 위에서 1873년에는 징병령이 발포되었다. 그동안 병역은 사족의 전권사항
이었으나 징병령에 의해 군복무를 전 국민에게 확대하는 국민개병제도가 확립되었다.
(5) 근대적 교육제도의 도입
메이지정부는 1872년에 학제(學制)를 도입하였다. 학제는 근대적 학교제도의 기본을 정한
것으로 이를 통해 근대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기초해 학제 시행 3년
후인 1875년에는 일본 전역에 2만 4,225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6) 경제적 기초의 확립
1873년에는 지조개정(地租改正)에 의해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지가를 확정하여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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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의 안정을 도모하고 근대적 재정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식산흥업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서양의 근대산업을 일본에 이식하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근대적인 은행제도와 통화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관
영공장을 상인자본에 싸게 불하하여 대자본의 축적을 도왔고, 자본투자를 통해 근대적인 대규
모 공장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국가체제의 확립과 제국주의의 길
(1) 대일본제국헌법
메이지 유신에 의해 수립된 신정부는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을 발포
하고 1890년 11월 29일에 이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근대국가의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은 2원제, 책임내각제, 사법권의 독립, 신민(臣民)의 권리와 의무 등을 규정
하여 일본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헌법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국민주권 대신 신성불가침한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하는 천황주권을 기본원
칙으로 하여, 추밀원, 귀족원 등 특권적 기관이 설치되고, 대신도 천황에 의해 임명되고 천황에
대해 책임을 지는 등 의회제의 기능이 제약되어 있었다. 민중은 국민이 아닌 신민으로 규정되
었으며, 신민의 권리는 법률에 의해 제약되었다.
한편 독립명령, 긴급칙령, 비상대권 등 의회에 의하지 않는 입법수단이 천황대권으로서 광범
위하게 인정되었다. 또 군은 내각의 통제 밖에 두어져 있어(통수권의 독립), 이를 근거로 군부
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2)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제국주의화
메이지 헌법의 시행으로 일본은 국내적으로 국민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외적
으로는 여전히 서구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영토와 인민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제대
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제사회에서 자립적인 국가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헌법 시행 후, 메이지정부는 불평등 조약의 개정에 최대의 힘을 쏟았다.
1894년에 일본은 영국과의 조약 개정에 성공하였다. 이 개정에 의해 일본은 영사재판권 등
의 불평등 조항을 폐지시켰고 부분적이나마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였다. 관세 자주권의 완전한
회복은 1911년의 신조약에 의해 달성되었다.
이러한 조약 개정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진전된 일본의 제국주의화 과정과 표
리일체를 이루며 진행되었다. 영국은 이 두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일본은 1902
년에 맺은 영일동맹을 배경으로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에 승리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
은 극동의 소국이었던 일본이 유럽의 대국 러시아를 무찌른 세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타이완과 한국을 식민지로 거느린 ‘제국’으
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고, 일본 민중은 승리에 도취해 ‘일등국’ 국민이라는 자부심
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유럽을 모델로 하여 근대화를 추구해갔던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추
구하면서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연습문제
1.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메이지정부가 취한 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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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① 러시아와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을 맺어 영토경계를 확정하였다.
② 류큐처분을 통해 오키나와를 강제로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③ 판적봉환을 통해 봉건영주와 무사계급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이들을 몰락시켰다.
④ 지조개정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하였다.
정답 ③. 판적봉환(版籍奉還)이란 1869년에 봉건영주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그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조정에 헌상토록 하고, 이들을 그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한 조치이다. 이
로써 형식적인 의미의 봉건제도는 폐지되었다. 메이지정부는 막부체제하의 지배세력이 반발
하지 않도록 특권계급의 지위를 부여하고 가록을 지급함으로써 기득권을 보장하였다.
2. 존왕양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서양과의 전쟁을 통해 양이론자들은 개국론으로 전환하였다.
② 조슈, 사쓰마, 도사, 아이즈 번(藩) 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주도하였다.
③ 지방의 호농층이 입지사(立志社)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막부를 타도하고 근대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답 ①. 에도 말기에 막번체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가운
데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급진적인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났다.
서양과의 전쟁(사츠에이전쟁, 4국함대에 의한 시모노세키 포격)을 통해 근대적 무기의 위력
과 양이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양이론자들은 개국론으로 전환하여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막운동은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등 서남지역 유력
번의 하급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 ③의 입지사(立志社)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3. 메이지헌법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흠정헌법이다.
② 국민주권을 명시하고 있다.
③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중심이 되어 헌법제정을 추진하였다.
④ 영국의 의회제 중심의 정치체제를 참고로 하여 제정되었다.
정답 ①. 메이지헌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유럽에서 1년간 조사하여 주로 독일계의
군주제헌법을 참고로 하여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천황이 만들어서 이것을 국민에게 하사한
다는 흠정헌법의 성격을 갖는다. 2원제, 책임내각제, 사법권의 독립 등을 규정한 근대적 헌
법체제를 갖추었으나 천황의 신격성과 절대권력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국민주권을 부
정하고 있다.
4. 메이지 정부의 사민평등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사족의 신분을 철폐하였다.
② 남성과 여성의 지위를 평등하게 하였다.
③ 화족의 신분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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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이에제도를 폐지하였다.
정답 ③. 메이지정부는 에도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를 타파하고 사민평등정책을 시행하여 화
족과 사족의 신분을 창설하고, 농공상 신분을 평민으로 하였으며 평민이 성을 가지는 것을 허락
했다. 에타․히닌이라는 천민을 해방하여 평민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고 다른 신분간의 결혼
을 인정하고 직업선택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5.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 이 조약의 체결은 존왕양이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② 같은 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나라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③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본격적으로 개국을 하게 되었다.
④ 이 조약은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에게는 평등한 조약이었다.
정답 ④.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부정하는 불평
등조약이었다. 불평등 조약에 의한 개항으로 일본은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 직
면하게 되었다.
6. 메이지정부가 봉건적인 지배기반을 없애고 근대적인 행정단위를 마련한 조치를 무엇이라
하는가?
① 폐번치현(廃藩置県) ② 판적봉환(版籍奉還)
③ 지조개정(地租改正) ④ 질록처분(秩祿處分)
정답 ①. 폐번치현은 판적봉환에 이어 취해진 조치로 봉건적인 지배기반이었던 번(藩)을 없
애고 근대적인 행정단위로서 현(縣)을 설치한 것이다. 기존의 봉건영지를 분할・합병하는 방
식을 통해 거의 같은 규모의 현들이 탄생했으며, 현의 행정은 중앙정부가 직접 임명한 지
사가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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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강 전쟁체험
1. 피해체험으로서의 전쟁체험
일본인의 전쟁 체험은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피해체험이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전쟁은 총
력전을 치르기 위해 오랫동안 생활이 궁핍했다는 것, 전쟁으로 인해 가족 중 누군가를 이별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과 같은 어두운 피해체험이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한 피해는 피해의식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런데 일본인에게는 이렇게 직접적인 전쟁체험에 의한 피해의식 외에 또 하나의 피해의식
이 존재한다. 그것은 일본 민중은 국가‧천황제 파시즘의 피해자라는 의식이다. 이것은 일본 국
가와 국민을 분리시켜 국가를 가해자로, 국민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
면 민중들은 강제 또는 교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협력하거나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전선에서는 퇴각도 항복도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죽는 ‘옥쇄(玉碎)’가 강요되었고,
일본정부와 군부는 ‘국체호지’ 즉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 항복을 마지막까지 미룸으로써 원폭피
해와 같은 참사를 야기했다. 이런 것들은 일본국민들이 자신을 전쟁 피해자로 여기게 하는 배
경이 되었다. 이 같은 피해체험으로서의 전쟁체험은 전후 계속 반추되면서 현대 일본의 사회
심리 형성에 중대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이처럼 피해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전쟁체험을 그리는 전쟁관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민중에게 가한 가해의 측면은 무시하고 있다.
2. 전쟁의 명칭과 역사인식
(1) 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은 미국 측이 사용하는 명칭이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을 계기로 1945년 8월까지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말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일
환으로 파악된다. 미·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합군은 이 전쟁을 ‘반파시즘 연합’과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전쟁의 역사적 평가 문제가 재론되면서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과 거기에 내포된 관
점, 이른바 ‘태평양전쟁사관’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양측에서 제기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태평양 전쟁사관이 이긴 자에 의해 강요된 승자의 논리로서, 일본을 악역으
로 만들어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는 비판을 제
기하였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은 아시아대륙에서의 전쟁을 포함하지 않기 때
문에 명칭 자체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전쟁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아시아에 대
한 침략사실에 대해 직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2) 대동아전쟁
1941년 12월 대미 전쟁이 개시된 직후 일본 정부는 각료 회의에서 ‘대동아전쟁’을 공식 명칭
으로 결정하고, 중일전쟁까지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대동아전쟁’이란 ‘대동아의 신질서 건설’
을 목적으로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아시아 식민지의 독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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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서양의 노예인 동아시아를 유일한 독립국인 일본이 해방시켜, 서
양의 문명과 무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대동아의 협동체=‘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한다는 것이 일
본 측이 내세운 전쟁의 명분이었다.
대동아전쟁관은 전후 일본의 보수층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발
언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는 ‘태평양전쟁사관’ 혹은 ‘도쿄재판사관’을
‘자학(自虐)사관’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자유주의사관’이 대두하여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하였다. 1996년 결성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
임’은 이런 입장을 교과서에 반영하고자 한 모임이다.
(3) 십오년전쟁
‘십오년전쟁’이란 명칭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만주사변 발발 시기인 1931년부터 태평양전쟁 종결 시기인 1945년까지 15년간을
하나의 연속된 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이 명칭은 1956년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가 처
음 사용한 것으로, 태평양전쟁은 독립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개되어온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탈의 귀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한국인으로서 십오년전쟁이라는 말도 결국은 만주사변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이전의 메이지국가하에서 취해진 제국주의 침탈의 과정은 생략하
고 있다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메이지국가가 제국주의 침탈의 일환으로 타이완과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은 빠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도쿄대교수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십오년전쟁이
라는 명칭이 갖는 한계에 대해 지적하며,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타이완 침략, 조선침략 등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과정부터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최근의 변화
(1) 일본인의 전쟁관을 형성한 대내외적 요인
이처럼 전후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일본인에게 전쟁의 피해체험만이 강조되고
전쟁의 침략성이나 가해성이 충분히 의식되지 못했던 요인으로 요시다 유타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으로 구분해 논의하고 있다.
첫째, 일본의 경우에는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체제 강화가 국민생활의 궁핍과 맞물리면서 진
행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전쟁시대는 물자가 없는 어두운 시대로 기억되었다.
둘째, 거대군부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전쟁을 수행했고, 전후처리 과정에서도 모든 전
쟁책임을 군부에 전가시켰기 때문에 군부 이외의 다른 세력이 전쟁에 동조하고 협력했다는 점
은 불문에 부쳐지게 되었다.
셋째, 중일전쟁의 직접적인 연장선 위에 곧 바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생하였고 미국이라
는 거대한 군사력에 의해 일본 국력의 근간이 파괴됨으로써 15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것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항전한 아시아민중의 항전의 의미를 망각하도록 하
고 있다.
넷째, 연합국의 점령이 사실상 미국의 단독점령이 되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대해서와는
달리 일본의 경우 점령관리체제의 근거가 되는 국제적인 협정이나 약속 없이 맥아더의 점령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점령은 미국의 적나라한 국익이 점령정책에 짙게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관과 같은 가치관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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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냉전으로 이행되는 가운데 일본을 서방진영으로 끌어넣기 위한 정치적 배려가 우선
시되었고, 이에 따라 대일강화는 점차 전후처리의 성격을 상실해갔다. 그 결과 대일강화는 전
쟁책임 문제의 처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명백히 일본에게는 관대한 강화였다.
여섯째, 아시아 각국의 국제적 지위가 낮은데다 극동에서 미국의 압도적 패권이 확립되어
있던 국제환경에서 일본의 전후처리는 서둘러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침략전쟁의 최대 희생자
였던 아시아 각국의 독자적인 요구는 그 과정에서 거의 무시되었고 이들 각국은 미국의 냉전
정책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일본인은 최대의 희생자들이 보내는 비판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도 가해자로서의 자기를 인식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경제부흥과 그 후
의 고도경제성장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2) 최근의 변화
이러한 상황들은 1990년대에 와서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 시기에 와서 아시아의 전쟁피해
자로부터의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인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인의 가해책임을 인정하고 아시아민중과의 연대를 추구하
려는 노력들이 진보적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요시다 교수는 이러한 전환을 직시하면서 『일본인의 전쟁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일본인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망각이라는 기술에 특히 뛰어나서도, 어떠한 것도 반성하지 않는 국민성을 특질로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최대 원인은 일본내 전후처리의 특수한 양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카소네 전 수상처럼 얘기한다면, 냉전이라는 훈풍이 불어왔기에, 일본인은
역사인식 문제를 방치한 채 고도성장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막을 내리고 일본 내 전후처리의 특수성을 지탱해왔던 제반 조건들이 변화한
지금, 일본인은 새삼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서 있다. 말을 바꾸자면
우리들의 역사인식을 스스로 획득하기 위한 산고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물론 1990년대 후반 이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대표되는 네오내셔널리즘 운동
이 대두하고, 앞에서 본 NHK 여론조사에서도 젊은 세대 중에 ‘모르겠다’고 답하는 사람이 늘
고 있는 것과 같은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일본만의
역사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주저와 불안, 초조와 동요 등으로, 전체적으
로는 일본인 자신의 내적 갈등의 표현이며, 그 갈등 자체가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를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연습문제
1.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명칭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 십오년 전쟁이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관점에서
제시된 명칭이다.
② 태평양전쟁이란 ‘미국 제국주의 대 아시아 식민지’라는 대립구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본군부가 사용한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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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십오년 전쟁에서 십오년이란 만주사변 발발 시기인 1931년에서 태평양전쟁 종결 시기
인 1945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④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에는 아시아대륙에서의 전쟁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시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답 ‚. 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은 미영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이 사용한 명칭이다.
2.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시대 순으로 나열할 때 네 번째에 오는 것은?
① 러일전쟁 ② 청일전쟁
③ 진주만 기습 ④ 만주사변
정답 ④. 위에서 열거한 전쟁이 시작된 연도는 청일전쟁 1894년, 러일전쟁 1904년, 만주사변
1931년, 진주만 기습 1941년이다.
3. 전시기에 전시행정을 말단에서 지원한 주민조직은? (3)
① 산업보국회(産業報国会) ② 고닌구미(五人組)
③ 도나리구미(隣組) ④ 요리아이(寄合)
정답 ③. 도나리구미는 조나이카이의 하부조직으로 이웃하는 10호 내외의 집들이 모여 결성
된 주민주직이다. 일본정부의 방침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전시행정의 말단으로서 각종 물자의
배급업무를 비롯해 전쟁을 찬양하고 정부의 정책에 비판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색출하는 일
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4.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격전장이 되어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많이 사망한
곳은 어디인가?(3)
① 오사카 ② 나가사키
③ 오키나와 ④ 히로시마
정답 ③.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격전장이 되어 군인뿐만 아니라 민
간인도 15만명이나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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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현대일본국가의 출발
1. 전후개혁
(1) 점령의 방식
패전 후 일본은 연합국군(GHQ)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 GHQ(GHQ/SCAP)는 ‘General
Headquarter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의 약칭으로 연합국군 최고사령
관 총사령부를 뜻한다. 점령은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
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지속되었다.
일본점령은 미군에 의한 단독점령 방식을 취했다. 일본을 연합국 4개국이 분할통치하자는
안도 있었으나 종전 직후 미국정부는 미국인 최고사령관에 의한 사실상의 단독점령으로 방
침을 변경하였다.
또한 점령은 기존의 행정기구를 그대로 이용하는 간접통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점령정
책은 미국정부의 대일정책에 기초해서 GHQ가 구체적인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일본정부에
명령하면 일본정부에 의해 집행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개혁을 집행하는 데 기존의
행정기구와 관료조직이 그대로 이용되었다.
한편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직접통치가 이루어졌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군의 직접통치를 받았다.
(2) 전후개혁의 내용
미점령군은 일본이 다시는 세계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점령의 목표를 일본
의 민주화와 비군사화에 두었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대
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전전과는 다른 민주적인 제도적 기반을 갖
추게 되었다.
*인권지령과 5대개혁지령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인권지령을 내려 전전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투옥되어 있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전의 탄압기구를 해체하도록 하였고 치안유지법 등
의 탄압법규를 폐지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5대개혁지령을 내려 부인해방, 노동자의 단결권 보장, 교육의 자유주의화, 억압적 제
도의 폐지, 경제기구의 민주화를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신헌법의 제정
이러한 지령에 이어 GHQ는 신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는데, 헌법제정은 전후개혁의 핵심
이다. 헌법을 통해 전후 일본의 정치체제, 사회체제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고 일본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시되었다.
신헌법의 특징은 주권재민과, 평화주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헌법에서는 국민주권을 기본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천황은 실질적인 통치권을 갖
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또한 평화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 헌법 제9조에서
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무력행사를 포기하며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입각하여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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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 인권을 광범위하게 보장하고 있다.
*정치개혁
여성의 참정권이 실현되어 여성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면적인 행정기구 및 관료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고, 국가공무원제도가 마련되어
공무원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복(公僕)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어 지방자치제도가 확립되었다.
*경제개혁
재벌해체가 이루어지고 독점금지를 위해 독점금지법과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이 제정되었
다.
노동개혁을 통해 노동 3권이 보장되고 근대적인 노사관계가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이 크게 줄어들고 자작농 중심의 농업구조가 마련됨으로써 농업경
영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회개혁
전전의 천황제 지배체제를 말단에서 지탱해온 이에제도(家制度)가 폐지되었다.
교육개혁을 통해 교육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교육기회가 개방되었다.
그 밖에 종교개혁이라든지 사회복지 분야의 개혁, 언론 및 출판, 방송, 영화와 관련된 개
혁 등 광범위한 차원에서 사회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 냉전체제와 전후처리
(1) 냉전체제의 형성과 역코스
제2차세계대전에서 서로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은 194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서서히 자본주
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은 대일정책을 급속히 바꾸게 되었는데, 초기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라는 대일정책의 목표를 크게 수정하여 일본의 재무장화와 경제부흥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전후개혁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것이었는데, 이
것을 가리켜 일본의 매스컴에서는 역코스(reverse course)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 재군비‧경제부흥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
진했다. 1950년 8월 맥아더의 지령에 의해 경찰예비대가, 이어 1952년 4월 해상경비대가 창설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이들을 통괄하는 기관으로서 보안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모태로 해서 1954년 7월 자위대가 발족되었다.
(2)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점령의 종식
1952년에 미군의 일본점령은 종식되고 일본은 주권국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일강화회의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한 국가는 48개국으로
소련, 체코, 폴란드와 같은 공산주의국가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조약은 냉전
구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공산주의 국가와의 국교회복을 미해결의 과제로 남겨 두었으
며, 냉전체제하에서 일본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된 것을 사실상 확인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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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강화조약을 둘러싸고 일본의 보수세력들은 자유주의 진영과의 단독강화를 주장한 반면,
혁신세력은 공산주의 진영을 포함한 전체 연합국과의 전면강화를 주장하여 첨예한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평화조약은 단독강화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는 전쟁이 끝난 것만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 전쟁이 무슨 전쟁이었는
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3) 배상문제
일본의 배상문제는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미국이나
영국은 이미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의 시점에서 배상청구를 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아시
아 국가 중에서 타이완의 장개석 정권은 1952년에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條約)을 체결하면서
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소련도 1956년의 일소공동선언(日ソ共同宣言)에서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중국도 1972년에 일본과 국교회복을 하면서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아시아국가와는 배상문제가 개별적으로 처리되었다. 이렇게 해
서 일본의 배상부담은 크게 줄었고 전전의 시설을 경제부흥에 이용할 수 있었다.
(4) 일미안보조약의 체결
평화조약이 조인된 그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또 하나의 중대한 조약으로서 일미안전보장조
약이 체결되었다. 안보조약은 일본이 미군의 일본주둔과 기지사용을 허용하고, 미군은 외적의
침략이나 내란시에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라 출동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은 국가방위를 미국에 의존하는 군사적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3. 전후 정치의 형성과 경제부흥
(1) 전후 정치지형의 형성
GHQ는 ‘군국주의자의 권력 및 세력을 영구히 배제한다’는 포츠담 선언의 방침에 따라, 1946
년 2월부터 전쟁수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을 공직에서 추방하였는데, 그 인원은 20만
명을 넘었다. 또한 선거법 개정을 통해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고, 선거제도도 바뀌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전후 일본의 정치지형을 새롭게 짜기 위한 것으로, 기본적인 조치
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46년 4월 10일에 패전 후 최초의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선거를 앞
두고 정당들이 결성 또는 재편되어 전후 정당정치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1946년 4월에
실시된 첫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제1당이 되었고 자유당과 진보당의 보수계 2개 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으며, 사회당은 제3당이 되었다. 이후 각 정당은 전후의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수차례의 분열과 통합을 겪게 되며, 1955년에 이르러서 안정된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일본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시행되었던 군국주의 세력의 공직 추방은 대일점령정책의
전환과 더불어 완화되었고, 역으로 1950년에는 공산당원 및 그 동조자들을 공적조직과 직장으
로부터 배제하는 레드 퍼지(Red Purge)가 시작되었다. 1951년 대규모의 추방 해제가 시행되어
공직추방령에 의해 퇴출되었던 구세력들이 상당수 복귀했으며, 1952년 평화조약의 발효와 동
시에 추방령은 자동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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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제부흥
패전 직후 일본경제는 거의 붕괴된 상태로 생산설비와 원료부족으로 생산 활동이 사실상 마
비되었다. 식량부족은 매우 심각했고 인플레와 물가고, 실업문제도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전전에 발전한 중화학공업의 설비들을 보수하고 원재료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 생산
은 급증하게 되었다. 또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3법 등 일련의 경제개혁정책은 경쟁적인 시
장경제체제의 성립을 촉진시킨 동시에 농민과 노동자의 소득 개선에 기여함으로써 내수 확대
를 가져왔다. 경사(傾斜)생산방식을 비롯한 정부의 산업부흥정책도 경제부흥에 기여했다.
이러한 순경제적 요인에 못지않게 정치적 요인도 일본 경제의 부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
다. 미국의 대일 원조는 경제부흥을 위한 주요 자본공급원이 되었고, 태평양전쟁에 대한 배상
부담의 완화도 경제부흥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전쟁도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9년 일시적인 불황에 빠졌던 일본경제는 이 한국전쟁 특수에 의해 불황에서 빠져
나와 호황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6-55년에 일본의 GNP 성장률은 연평균 8.9%에 달했고, 1955년의 1인당 실
질국민소득은 전전 최고였던 1934-1936년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연습문제
1. 평화주의 이념을 구체화하여 일본이 전쟁과 무력행사를 포기하겠다는 규정을 담고 있는
헌법 조문은?
① 헌법 전문(前文) ② 헌법 제1조
③ 헌법 제7조 ④ 헌법 제9조
정답 ④. 전후개혁의 일환으로 제정된 일본국 헌법 제9조에서는 모든 전쟁의 포기와 전력
불보유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9조에서는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
화를 성실하게 희구하여,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밖의 전력을 갖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2. 미점령군의 일본점령과 관련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점령 초기에 미점령군은 사회안정을 위해 전전의 사회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침
을 취했다.
② 점령은 미군에 의한 직접통치방식으로 이루어졌다.
③ 점령은 미군에 의한 단독점령으로 이루어졌다.
④ 미점령군은 미국의 산업정책을 모델로 하여 일본의 경제부흥을 추진하였다.
정답 ③. 일본점령은 미군에 의한 단독점령과 간접통치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연합국 4개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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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통치하는 계획도 있었으나, 종전 직후 미국정부는 미국인 최고사령관에 의한 단독점령
으로 방침을 변경했으며, 직접군정을 시행하려던 당초 방침도 일본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일본정부는 존속되어 최고사령관의 지시 하에 국내 행정상의 모든 사
항에 관해 통상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오키나와에서는 직접군정이 시행
되었다.
3. 미점령군의 점령정책이 바뀌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① 동서간의 냉전체제가 성립하였기 때문에
② 일본국민들의 점령정책에 대한 저항이 강했기 때문에
③ 일본 내에서 체제전복을 꾀하는 급진세력이 대두하였기 때문에
④ 일본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기 때문에
정답 ①. 1947년 이후 미국의 점령정책은 초기의 개혁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제2
차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 및 한반도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정면대립을 하게
되고, 1949년에는 중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고 소련이 원폭을 개발하는 등 공산권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방공의 보루로
삼고자 재무장‧경제부흥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점령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다.
4. 일본국헌법은 1946년에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몇 차례나 개정되었는가?
① 한 번
② 두 번
③ 세 번
④ 지금까지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정답 ④. 1946년에 제정된 이해 일본국 헌법은 아직까지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이것은
전후개혁을 통해 만들어진 헌법을 지지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
후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많아지면서 일본사회에서 점차 개헌의 움직임은 본격화되
고 있다.
5. 전후에 제정된 신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은?
① 일본은 국민주권을 기본원리로 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② 황위계승의 절차 및 순위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③ 일본은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유함을 명시하고 있다.
④ 메이지헌법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정답 ①. 황위계승의 절차 및 순위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 것은 황실전범이다.
메이지헌법은 국민주권 대신 신성불가침한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하는 천황주권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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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의 배상문제는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① 막대한 배상액은 일본의 경제성장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② 배상요구가 완화되어 일본은 배상부담에서 벗어나 전전의 시설을 경제부흥에 이용하
였다.
③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일본이 부담해야 할 배상액은 커졌다.
④ 배상문제는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정답 ②.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일본의 배상문제도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귀결되었다. 샌프
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존립이 가능한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배상을 지
불하도록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대일 배상요구는 크게 완화되었고 일본은 배상 부담에서
벗어나 전전의 시설을 경제부흥에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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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일본인과 천황제
1. 국민형성과 천황제 이데올로기
(1) 천황칭호의 기원
천황(天皇)은 일본 군주에 대한 공식적인 칭호이다. 천황이 공식 명칭으로서 제도화된 것
은 7세기 말엽으로, 그 전에는 군주를 오키미(大王)라고 칭했다. 고대국가가 율령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해나가면서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율령국가체
제의 완성과 더불어 천황과 귀족 중심의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런데 중세로 넘어오면서 고대국가가 해체되고 무사정권이 중심이 되는 무사사회로 전환
해나가게 되었다. 가마쿠라막부와 무로마치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천황의 지위는 크게 약화
되고, 무로마치막부 시대에 들어와 천황은 명목상의 권위만을 갖게 되었다.
에도시대에 천황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어 천황은 막부에 의해 공적․사적 행동의 제
약을 받았고 국정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메이지기에 와서 천황은 다시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군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시대를 열었던 개국공신들은 강력한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통합을 하고자 하
였고, 절대군주로서 천황을 추대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대외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도구로 천
황이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국민국가 형성과 근대 천황제
1868년 15세의 메이지 천황이 에도성(江戶城)에 입성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함으로써 천
황 친정체제가 성립되었다. 메이지 헌법에서는 천황이 입헌군주임을 명기함으로써 천황의
법적 기반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메이지헌법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천황제를 고대천황제와 구
별해서 근대천황제라 부른다.
메이지 헌법에서 천황은 국가원수로서 국가를 통치하고, 군대의 통수, 선전포고 및 강화,
조약체결, 관리의 임명과 파면, 긴급 칙령의 발포 등 광범위한 대권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독립명령, 긴급칙령, 비상대권 등 의회에 의하지 않는 입법수단이 천황대권으로서 광범위하
게 부여되었다. 국가의지의 최고 결정은 모두 천황의 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나아
가 이러한 천황의 지위에 대해 일반민중은 신민으로 규정되었다.
메이지 정부에 의해 발포된 군인칙유와 교육칙어는 천황에 대한 민중의 충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덕적 지침으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침투시켜 나갔다. 군인칙유는
1882년 메이지천황이 군인에게 내린 것으로 군 통수권자인 천황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역설하였다. 교육칙어는 1890년에 발포한 메이지천황의 칙어인데, 충효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 덕목을 기초로 삼아 국민들이 충군애국할 것을 강조하였다.
(3) 민중과 천황제 이데올로기
메이지정부는 다양한 국가 의례를 만들어 내고 천황과 관련된 경축일을 제정함으로써 천
황제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천장절은 1868년에 정해진 일본 최초의 국경일이다. 이 천장절은 천황의 탄생일인데, 천황
의 장수를 축원하는 의미에서 천장(天長)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1873년에는 기원절이라
는 경축일을 제정하였다. 이는 『일본서기』에 기술된 초대 진무천황의 즉위일인 1월 1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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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한 것이다. 1927년에는 메이지천황 탄생일인 11월 3일을 경축일로
정하여 명치절이라 했다. 이러한 경축일에는 신사나 궁전, 학교에서 기념식전이 거행되었는
데, 히노마루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가 제창되고, 교육칙어가 봉독되었다.
1880년대에는 황거, 이세신궁, 야스쿠니신사, 교토 등 천황과 관련된 역사적인 장소를 찾
아보는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천황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황실
의 결혼식, 장례식 등의 화려한 의례와 행사를 통해 천황과 황실의 존재가 국민들에게 드
러나게 되었다.
2. 현대일본의 상징천황제
(1) 천황의 법적 지위-국가·국민 통합의 상징
전후개혁을 통해 새롭게 제정된 신헌법에서는 상징적 존재로서 천황을 규정하고 있다. 천
황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아니라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
다. 따라서 천황은 헌법이 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고,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갖지
않는다.
(2) 상징천황제의 성립배경
상징천황제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상징천황제의 성립에는 미국의 대일점령방침, 당시
의 국제여론, 일본정부의 자세, 일본 국내여론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헌법제정 당시
일본정부는 천황의 통치권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구태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반면 패전 직후의 국제여론은 어떤 형태로든 천황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연합국 정부 및 국민들의 입장도 대체로 천황은 군의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로서 전쟁책임
을 지고 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며, 천황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일본국민의
여론은 절대적으로 천황제 존속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점령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이
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치적 판단을 하였고, 이를 위해 상징천황제와 일본의 전쟁포기와
전력불보유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3) 상징천황제의 정착과 상징의 정치성
전후에 와서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는데, 이것은 상징
천황제의 정착에 기여하였다.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는 주로 매스컴을 통해 형성되었
는데, 여기에서는 전후 새로운 가치에 부합되는 이미지로서 천황가의 민주적이고 근대적이
며 인간적인 이미지가 부각되었다. 쇼와천황의 경우 전전에 군국주의체제의 통치권자라는
얼굴은 사라지고 검소하고 민주적이고 평등을 존중하는 천황이라는 것이 선전되었다.
그런데 상징천황제가 대중들 사이에 정착된 것을 기반으로 해서 보수정권은 착실히 천황
제 복권을 추진해왔다. 1966년의 축일법 개정에 의한 건국기념일 제정, 1968년의 메이지 100
년 기념식전, 1975년의 천황 재위 50년 식전, 1979년의 원호법제화, 1985년의 천황 재위 60
년식전 등 일련의 조처들은 상징천황제의 역사적 의의를 형해화시키고 전전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작업이었다.
현재 일본의 경축일에는 천황과 관련된 휴일이 많다. 2월 11일은 건국기념일로 진무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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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즉위했다고 하는 것을 기념한 날로 전전에는 기원절이라고 불렀다. 4월 29일 ‘녹음의 날
(緑の日)’은 쇼와천황의 탄생일로 최근에 보수세력의 운동에 의해 쇼와의 날로 바뀌었다.
11월 3일은 문화의 날(文化の日)로 메이지천황의 탄생일이다. 11월 23일은 근로감사의 날(勤
労感謝の日)로, 원래는 니나메사이(新嘗祭)라고 해서 천황이 그 해에 거두어들인 음식을 처
음을 맛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날이다. 12월 23일은 현재 천황의 탄생일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천황의 지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신헌법 제정 시점을 뛰어넘어
오늘의 천황제를 과거의 절대주의적인 천황제에 연결시키고 있는 조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연습문제
1. 천황의 인간선언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메이지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메이지천황의 선언을 말한다.
② 이 선언에서 천황은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③ 단일민족으로서 일본국민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④ 천황 스스로가 천황의 신격성(神格性)을 부정한 것이다.
정답 ④. 1946년 1월 1일 천황 히로히토는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를 통해 인간선언을 하
였는데, 여기에서 천황 스스로가 천황의 신격을 부정하였다. 이 조서에서 천황은 “나와 국민
사이의 유대는 항상 상호 신뢰와 경외에 의해 맺어지는 것이지 단지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
겨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아키쓰미카미(現御神)라 하고, 일본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
한 민족이어서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하
였다. 천황이 스스로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규정하고 난 뒤, 곧이어 상징천황제를 포함한 신
헌법 초안이 제출되어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천황은 신적인 존재에서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
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법적인 지위가 변경되게 되었다.
2. 신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천황이 행하는 국사행위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천황의 국사행위에 대해서는 내각이 책임을 진다.
② 천황은 국회의 지명 없이 내각총리대신을 임명할 수 있다.
③ 천황은 내각의 승인 없이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다.
④ 천황은 국회의 의결 없이 황실재산을 양도할 수 있다.
정답 ①. 전후 헌법에서 천황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한다. 천황은 헌법이 정하는
국사행위만을 하고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헌법에 정해진 국사행위는 ① 헌법개
정‧법률‧정령‧공약 등의 공포, ② 국회 소집, ③ 중의원 해산, ④ 국회의원 총선거 공시, ⑤
국무대신 및 법률이 정하는 그 외의 관리의 임면, 전권 위임장 및 대사‧공사의 신임장 인증,
⑥ 대사(大赦)‧특사‧감형‧형 집행 면제‧복권 등의 인증, ⑦ 영전(榮典) 수여, ⑧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그 밖의 외교문서 인증, ⑨ 외국 대사‧공사의 접수, ⑩ 의식 거행 등 10가지
로, 천황의 국사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3. 일본의 원호(元號)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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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원호란 천황의 재위를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② 메이지시대에 한 천황의 대에 하나의 원호를 쓰는 일세일원제도가 실시되었다.
③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로 원호가 바뀐 것은 1989년의 일이다.
④ 패전 후에 원호의 법적 근거가 없어져 현재 원호는 관습적으로 쓰이고 있다.
정답 ④. 패전 후 원호의 법적 근거가 없어졌으나, 타성적으로 쇼와가 사용되어 왔다. 1960
년대 후반부터 민간에서 원호법제화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1975년 천황 재위 50년을 계기로
차기 천황의 등장에 대비해서 원호의 공백을 만들지 않기 위한 운동이 활성화되어 지방의회
는 속속 원호법제화 추진 결의를 했다. 결국 1979년에 일본정부는 국회에 원호법안을 제출
했고, 중‧참의원을 통과한 후 같은 해 6월 11일 이를 공포.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4. 메이지기에 세워진 신사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자를 호국영령으로 모심으로써
천황숭배와 군국주의의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한 신사는?
① 이나리신사(稲荷神社) ② 메이지신궁(明治神宮)
③ 이세신궁(伊勢神宮) ④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정답 ④.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 메이지정부군의 편에 서서 에도막부와 싸우다 희생된 사람
들을 추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쿄쇼콘샤(東京招魂社)에서 출발하였는데,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로 그 이름을 바꾸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추도하는 신사로 격상되었다. 패전
때까지 야스쿠니신사는 육군성과 해군성이 관할해왔는데, 여기에는 타이완 침략전쟁, 강화도
사건,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
쟁 등 근대 이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서 싸운 250만의 전쟁희생자들이 합사되어 있다. 이
런 점에서 단순히 전쟁희생자를 추도하는 시설을 넘어 전전에 군국주의를 보급하는 총본산
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5. 패전 직후에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볼 때 일본국민의 천황제에 대한 생각은 어떠
했는가?
① 절대 다수가 천황제 존속을 희망하였다.
② 혁신계인 사회당에서는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③ 대부분의 국민은 천황제의 폐지를 희망하였다.
④ 천황제 존속과 폐지를 둘러싸고 일본국민의 여론은 양분되어 있었다.
정답 ①. 패전 직후 국제여론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던 반면,
일본국민들은 천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압도적이었다. 1945년 12월 23일자《일본주보(日本週
報)》에 의하면 천황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95%에 달했으며, 1946년 5월 27일《마이니치신문
(每日新聞)》에 실린 조사결과도 천황제 지지가 85%였다. 혁신계인 사회당도 천황제에 대해 애
매한 입장을 취했으며, 유일하게 공산당만이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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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국기와 국가
1. 히노마루․기미가요의 기원
(1) 히노마루
‘히노마루(日の丸)’는 일본의 국기, ‘기미가요(君が代)’는 일본의 국가이다. 히노마루와 기미
가요가 법률에 의해 일본의 국기‧국가로 공식 제정된 것은 1999년으로 그 이전까지는 법적
근거가 없이 실질적인 국기・국가 역할을 했다. 이들은 본래 국기와 국가로서 만들어진 것
이 아니었으나, 국민국가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기와 국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국가로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전부터 있었지만 이에 반대하
는 입장도 강해서, 이 문제는 현대 일본사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히노마루’란 본래 태양을 기호화한 그림을 뜻한다. 히노마루의 기원은 붉은색 비단에 금
색으로 태양을 그리거나 수놓은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라고 하는 것인데, 가마쿠라 시대
무렵부터 조정에 대항하는 적군을 토벌하러 나갈 때 관군의 표시로 사용되었다. 특히 센고
쿠시대 말기에 이르면 천황의 권위를 배경으로 천하를 통일하려는 무장들이 히노마루가 그
려진 깃발을 사용하였다.
에도 시대에 와서는 히노마루가 관선(官船)=막부를 표시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정부는 우편선과 상선이 해적선 취급을 받지 않도록 히노마루를 ‘국기’로서
게양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히노마루는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2) 기미가요
기미가요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작자 불명의 가사에 곡을 붙인 것으로 천황을 찬
미하는 의례용 곡으로 만들어졌다. 기미가요의 가사는 “그대여, 작은 돌이 큰 돌이 되어 이
끼가 낄 때까지 오래 사십시오”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가사에 처음 곡을 붙인 사람은 영국인인데 평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해군성은 궁내성
아악과에 작곡을 의뢰했고, 여기에서 제작된 곡들 중의 하나에 해군의 외국인 교사였던 독
일인이 서양음악풍의 화성을 붙여 완성시켰다. 이것이 기미가요이다. 이 곡은 1880년 10월에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의 곡’으로 발표되었고, 같은 해 11월 3일 천장절에 궁중에서 처음으
로 연주되었다.
이후 기미가요는 점차 학교에서 불리게 되었고, 1893년 문부성이 이를 소학교의 ‘축일대제
일창가(祝日大祭日唱歌)’로 지정함에 따라 이후 소학교의 기념식전에서는 반드시 기미가요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의례용 곡이었을 뿐 국가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2. 이데올로기적 통합과 히노마루·기미가요
메이지정부는 국민들에게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일본 국가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함으
로써 국민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이는 우선 소학교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황국신민의
육성을 목표로 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각 소학교에는 천황‧황후의 사진과 교육칙
어가 배포되었고 각 학교는 사진을 받는 의식과 교육칙어 봉독식을 거행했다. 이 의식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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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내 행사를 넘어서서 마을 전체의 행사로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이때
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집집마다 히노마루를 내걸어 경축했다.
이어서 문부성은 ‘소학교 축일대제일의식 규정(小學校祝日大祭日儀式規程)’(1891)을 발포하
여 축일(祝日)‧대제일(大祭日)에 학교에서 의식을 거행할 것과 이러한 의식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학교 운동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 때 히노마루를 게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학교에서는 국어‧수신‧창가 등의 교과를 통해 히노마루・기미가요 교육을
했다. 음악 교과서에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노래가 수록되었고, 국어교과서와 수신교과서에
도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 대한 문장이 수록되었다.
이렇게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민의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위한 상징물로서 국기‧국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나아갔기 때문에 자연히 히노마루‧기미가요도 제국주의적 침략과 관련된 상징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학교교육에서의 히노마루․기미가요 논쟁
미점령이 끝나고 일본정부는 꾸준히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정착시키기 위
한 노력을 학교현장에서 추진해왔다.
1958년에 문부성은 소·중학교 학습지도요령에서 국민 경축일의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 국
기 게양과 국가제창이 바람직하다고 하며, 각 교과에서 국기를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고 지
도하라는 지도방침을 세웠다.
1985년 히로히토의 천황 재위 60년에 즈음해서 자민당과 일본정부는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국기와 국가로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1989년에 개정된 학습지도요령에서는 입
학식과 졸업식에서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의 제창을 의무화하였다. 1990년에는 이것이
고등학교로 확대되었다.
학습지도요령 개정에 의해 히노마루 게양, 기미가요 제창이 의무화되자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의 비율은 크게 높아졌다. 또한 감독이 강화됨에 따라 위반으로 처벌된 교직
원 수도 크게 증가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 히노마루 게양은 거의 100%에 달하게
되고 기미가요제창은 80%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대해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의 반발도 있었다. 위헌소송이 제기되기
도 하였고 기념식에서 교사들의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학생들이 집단
적으로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대 논거는 첫째, 국기・국가의 법적 근거가
없다, 둘째, 제국주의적 침략의 이미지가 있다, 셋째, 히노마루・기미가요를 강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등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2005년 도쿄도가 입학식・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하지 않은 교사들을 직
무명령 위반으로 처분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커지고 있다. 교육현장의 보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 반대하는 소수자는 더욱 고립되고 있다.
4. 오키나와와 히노마루
일본에서 오키나와는 히노마루‧기미가요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태평양전쟁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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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격전장이 되어 군인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
인들이 사망했다. 이는 결국 천황과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인을 희생시킨 것이
어서, 전후 오키나와인들은 천황과 본토 혹은 일본국가에 대해 피해의식과 저항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후에도 오키나와만이 1972년
까지 20년간을 미군의 직접통치하에 놓이게 되자, 오키나와에서는 ‘본토복귀운동’이 전개되
었다. 이 때 히노마루가 사용되었는데, 히노마루는 오키나와의 식민상태에 대한 저항의 표시
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교직원조합을 중심으로 히노마루 게양운동과 일
괄구입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토 복귀가 실현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미군기지를 존속시킨 가운데 이루어진
본토 복귀는 일본이 다시 한번 오키나와를 본토 방위의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히노마루‧기미가요에 대한 저항감이 커졌다.
5. 국기‧국가의 법제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법제화 움직임이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이다. 냉전체제
가 붕괴되고 전반적인 보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후 일관되게 히노마루‧기미가요를 부정
하는 입장에 서 있던 사회당은 1994년에 히노마루‧기미가요를 용인하는 쪽으로 방침을 전환
했다. 또 일교조도 1995년에 더 이상 이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추세 속에서 1999년 ‘국기‧국가법’이 성립되어,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일본의 국기‧국
가로서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연습문제
1.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일본인들 사이에 보급되어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로서 인
식되기에 이른 것은 언제부터인가?
① 헤이안 초기 ② 에도시대
③ 메이지기 ④ 쇼와 초기
정답 ③.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일본 국민들 사이에 보급되어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와 국
가로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은 메이지기부터이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보급하려는 노력은
먼저 학교교육에서 강조되었고 점차 일반 민중들에게 확대되었다. 메이지기부터 다이쇼, 쇼
와초기에 걸쳐 소학교에서는 국어, 수신, 창가 등의 교과를 통해 히노마루 및 기미가요를 교
육하였다.
2. 기미가요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가사의 원형은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에 실려 있는 작자 불명의 노래이다.
② 천황이 신의 자손으로서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③ 메이지헌법에서는 기미가요를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④ 각종 의례에서 국가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문부성이 작곡을 의뢰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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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①. 가사의 원형은 905년에 만들어진 고킨와카슈에 실려 있는 작자 불명의 것으로 천
황의 장수를 축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곡은 궁내성 아악과의 악장인 모리 히로모리(森広
守)와 과원들에 의해 만들어진 곡에 해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독일인 F. 에케르트가 서양음
악풍의 화성을 붙여 완성시켰다.
3. 히노마루의 기원과 관련된 설명이다. 맞지 않는 것은?
① 근대 이전에 히노마루의 색과 바탕색은 일정하지 않고 청색, 흑색, 백색, 적색, 금색 등
다양한 조합이 있었다.
② 히노마루의 기원은 가마쿠라시대부터 조정에 대항하는 적군을 토벌하러 나갈 때 관군
의 표시로 사용되었던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센고쿠시대 말기에는 천황의 권위를 배경으로 해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무장들이 히노
마루가 그려진 군기와 노보리를 사용하였다.
④ 에도시대에 히노마루는 민중들 사이에서 관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국기로 인식되
게 되었다.
정답 ④. 에도시대에 민중 사이에 국기라는 관념은 없었다. 일본인들에게 히노마루와 기미가
요가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로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은 메이지기의 학교교육을 통해
서이다.
4. 일본에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국기와 국가로 법적으로 규정되게 된 것은 언제인가?
① 메이지기 ② 쇼와 초기
③ 전시기 ④ 1990년대
정답 ④. 1999년 6월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규정하는 법률이 제정됨
으로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정식으로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인정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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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강 일본인의 생활문화
1. 출산과 육아
(1) 하쓰미야마이리
탄생한 아이를 처음으로 신사에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하쓰미야마이리(初宮参り)라고 부른
다. 보통 생후 30일 전후에 아이의 부모나 할머니가 함께 간다. 이는 태어난 곳의 씨족신인
우지가미에게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신의 가호를 빌기 위한 것이다. 우지가미에게 인사함으
로써 아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2) 하쓰젯쿠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절기를 하쓰젯쿠(初節句)라고 한다. 남아는 5월 5일에
단고노셋쿠(端午の節句), 여아는 3월 3일에 모모노셋쿠(桃の節句) 또는 히나마쓰리(雛祭り)라
고도 불리는 의례를 한다.
하쓰젯쿠에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주로 인형을 선물한다. 남아에게는 고이노보리나
투구를 쓴 인형이나 활이나 화살과 같은 장난감을 선물한다. 여아에게는 히나마쓰리 인형을
선물한다.
(3) 시치고산
시치고산(七五三)의 행사는 7세, 5세, 3세(남자는 5세와 3세. 여자는 7세와 3세)에 부모를
따라 신사에 참배하는 의례이다.
11월 15일은 우지가미에게 그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날인데, 시치고산은 우지가미의 가호
를 받고 자란 어린이의 존재를 우지가미와 지역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승인 받고
축복을 받는 축제였다. 이 날 남자 어린이는 하카마(袴)를 입고, 여자 어린이는 후리소데(振
袖)를 입는다.
2. 성인식
성인식을 계기로 젊은이들은 어린이집단에서 나와 남녀별로 각각 젊은이집단에 가입하였
다. 여기에서 친분을 쌓으며 어른으로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사교의 기술이나 기타 기능을
익혔다.
남자는 전통적으로 15세 경에 원복(元服)을 입고, 머리모양을 바꾸고, 관을 썼다. 농촌에서
는 훈도시(褌)를 차기도 하였다. 이 의식을 거침으로써 젊은이는 노동이나 행정, 혼인 등의
여러 방면에서 공동체의 당당한 성원으로 인정되었다.
한편 여자의 경우 13세경 또는 초조(初潮)를 시작으로 성인식이 이루어졌다. 이 때 속치마
의 긴 천을 허리에 감는 고시마키(腰巻)의 의례라든가, 철을 술이나 차 등에 담가 산화시킨
가네(鉄漿)라는 액체에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가네쓰케(鉄漿つけ)의 의례를 하기도 하였다.
1948년부터는 매년 1월 15일을 성인의 날이라 하여 국정 공휴일로 지정해 놓고 성인이 되
는 나이도 남녀 만 20세로 정했다. 이 날 전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는 만 20세가 된 지역의
젊은이들을 공회당이나 구민회관에 초청하여 성인식 의례를 치룬다. 이 날 대체로 남자들은
양장을, 여자들은 후리소데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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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약혼식과 결혼식
(1) 약혼식
전통적으로 일본인들은 혼례에 앞서 약혼식을 가졌는데, 전통적인 약혼식을 가리켜 유이
노(結納)라고 부른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서구식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유이노의 풍습은
남아 있다. 유이노는 본래 혼인에 의해 새롭게 맺어진 집안 간의 상호결합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전통적으로 약혼식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유이노킨(結納金)으로 불리는 돈을 비롯해 유이
노 품목을 보낸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유이노킨을 없애고 반지나 시계 등 기념품을 교환하
는 경향이 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7할의 남성이 유이노킨과 혼약기
념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의 돈과
기념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 결혼식
예전에 결혼식은 집에서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혼례에 종교적 색채가 보이는
예는 드물고 친척이나 마을사람들에게 새롭게 탄생한 부부를 피로한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었다.
그러나 최근 결혼식에서는 종교적 색채를 중시하고 있다. 최근의 경향을 보면 예식스타일
로 신전식(神前式)과 기독교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전식은 신사에서
신도식으로 하는 것이다. 기독교식은 교회나 성당과 같은 예배당에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결혼과 같이 신에 맹세하는 일 없이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진젠식(人前式)이나 불교식으로 하는 결혼식의 비중은 상당히 낮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결혼식은 근대에 와서 행해지기 시작했다. 신 앞에
서 결혼식을 올리는 신도식 결혼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최근에 결혼식은 호텔이나 전문 예식장이 주도하면서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피로연은
호텔에서 하는 경우가 절반을 넘는다.
4. 장례와 제례
일본에서 장례와 제례는 대부분 불교식으로 이루어진다. 출생이나 성장과 관련된 의식이
신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반면 장례와 제례는 불교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데라우케제
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도시대에 막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모
든 사람을 이에를 단위로 하여 하나의 절에 등록해야 한다는 데라우케제도(寺請制度)를 만
들었다. 이 때문에 절은 지역의 주민을 대상으로 장례나 선조공양과 같은 의식을 행하게 되
었고, 흔히 ‘장례불교’라는 말이 일컬어질 정도로 절은 장례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장례식
예전에 장례식은 소시키구미(葬式組)로 불리는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시키구미는 마
을에 상이 났을 경우 상부상조하기 위한 마을의 조직으로 여기에서 장례절차는 물론 장례용
물품도 준비하였다. 그렇지만 점차 장의사가 생겨나면서 전문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전담하
는 경우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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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의례는 구체적인 사자의 시신처리와 관념적으로 사자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양 작업이
병행해서 이루어진다. 장의의 순서는 사망확인에서 납관(納棺), 철야(通夜), 장례식, 고별식의
순으로 진행된다.
장례식이 끝나면 망자에 대한 공양을 한다. 불교의 영향으로 일본인에게는 7일 동안은 엄
중한 근신이 필요하고 49일째가 되어야 비로소 평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49재는 아직까지 보편적인 관습으로 남아 있다. 이 기간은 결혼식과
같은 경사스런 일에 참가할 수 없는 기간이기도 하다. 또한 연하장을 보내거나 새해인사를
주고받지 않으며, 신사참배도 삼간다. 지금도 이러한 관습은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2) 제례
제례는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이다. 일본인들은 죽은 조상의 자손들이 계속해서 의례를
올림으로써 죽은 인간의 혼이 격을 높여간다고 믿었다. 죽은 인간의 혼은 처음에는 죽은 혼
으로서 단순한 사령(死靈)의 위치에 머물러 있지만 후손들이 제사와 같은 의례를 함으로써
신(神)이나 부처(佛)로서 격을 높여가게 된다. 즉 후손들의 제사와 같은 공양 행위가 죽은
조상을 신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제사를 연기(年忌), 또는 연기공양(年忌供養), 연기법요(年忌法要)라고 부르는
데, 불교식으로 이루어져 7일, 14일, 21일, 28일, 35일, 42일, 49일, 100일, 1주기(周忌), 3회기
(回忌), 7회기, 13회기, 17회기, 23회기, 27회기, 33회기 등으로 행해진다. 연기는 보통 사후
33년째의 마지막 제사를 끝으로 종료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50년째에 종료되기도 한다. 이
러한 과정을 거쳐 죽은 혼은 조상신인 선조(先祖)의 위치로 승격한다.
한편 일본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된 조령은 제사를 지내고 있는 조령보다 오히려 자
손들이 살고 있는 이에에 늘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정기적으로 들러준다고 믿었다. 우리가
추석 때의 차례와 성묘를 중시하듯이 일본인들은 지금도 음력 7월 15일 전후의 오본(お盆)
을 중시한다. 오본의 관습은 원래 자신들의 죽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 이전의 조상들이 돌
아온다고 믿는 불교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본은 선조를 모셔와 접대하고 다시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선조와 자손의 교류를 상징하는 행사이다.
연습문제
1. 다음 중 어린이의 탄생 및 육아와 관련된 의례가 아닌 것은?
① 오시치야
② 하쓰미야마이리
③ 오쿠이조메
④ 가네쓰케
정답 ④. 가네쓰케는 철을 술이나 차 등에 담가 산화시킨 가네라는 액체에 치아를 검게 물
들이는 풍습을 말한다. 전통사회에서 여자들이 성인식을 치를 때 성인이 된 것을 나타내는
의례로 행해졌다.
2. 원래 이 행사는 우지가미에게 그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우지가미의 가호를 받고 자란 어
린이의 존재를 우지가미와 지역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알려 사회적으로 승인 받고 축복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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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서 시작되었다. 현재도 일본에서 널리 행해지는 이 의례를 무엇이라 하는가?
① 시치고산
② 하쓰젯쿠
③ 하쓰미야마이리
④ 도시이와이
정답 ①. 시치고산의 행사는 7세, 5세, 3세(남자는 5세와 3세. 여자는 7세와 3세)에 부모를
따라 신사에 참배하는 행사이다. 지금도 매년 11월 15일이 되면 일본의 어느 신사에 가더라
도 화려하게 차려 입은 남녀 어린이들을 볼 수 있다. 이 날 남자 어린이는 하카마를 입고,
여자 어린이는 후리소데를 입는다.
3. 전통사회에서 남자들이 치르는 성인식을 지칭하던 말이 아닌 것은?
① 겐푸쿠 이와이
② 훈도시 이와이
③ 에보시 이와이
④ 고시마키 이와이
정답 ④. 전통적으로 남자는 15세 경에 성인식을 치렀는데, 이 때 관을 쓰고 원복을 입거나
에보시(烏帽子)를 썼다. 또한 농촌에서는 훈도시(褌)를 차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식에서 유
래하여 성인식을 가리켜 겐푸쿠․에보시 이와이, 훈도시 이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일본에서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신도식 결혼이 행해지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
① 무로마치시대
② 에도시대
③ 메이지기
④ 전시기
정답 ③. 신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신도식 결혼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신
전결혼식은 1890년대에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서 기독교의 결혼식을 모델로 만든 것이라
는 설이 있으며 다른 신사가 보급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신전결혼식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00년의 다이쇼천황이 황태자 시절에 도쿄다이진구(東京大神宮)에
서 올린 결혼식에 의해서이다. 이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 신전식은 도시부에 먼저 퍼지고 전
후에 와서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출처 : 林光植(韓國放送通信大學校 日本學科)
글쓴이 : 임광식 원글보기
메모 : 2008.1학기 워크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