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근현대사
제1장 개국과 에도 막부의 멸망
<시대개관>
개국 후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외압이 거세지고 안으로는 막부의 권위가 추락하여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유례 없는 동요와 혼란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체제의 말기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의 많은 지사들은 선조 대대로 지켜 온 쇄국의 국시를 막부가 깨뜨린 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번의 테두리를 뛰쳐나와 구국을 위한 충정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막부의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들의 사상적 토대는 존왕양이론이었다.
혼란기에 오히려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고 있던 천황과는 달리, 점차 궁지에 몰린 막부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른바 공무 합체 운동이었다.
막부는 공무 합체 운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기울어져 가는 대세를 막지는 못하였다.
막부에 저항하는 세력이 막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토막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막부는 대정 봉환을 통해 이름만이라도 남기고자 했으나 결국 반막부 세력에 의해 제거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학습목표>
1. 페리의 출현이 일본에 미친 영향.
2. 존왕양이 운동의 내용과 주체.
3. 공무 합체 운동이 일어난 과정.
4. 토막 운동과 존왕양이 운동의 차이.
5. 유신 세력이 대정 봉환을 거부한 이유.
1.1 흑선의 출현
1.1.1 막부 말기의 일본
1853년 남부번(岩手縣: 이와타현)의 태평양 연안 농민들이 번의 학정에 대항해서 잇키(一揆)를 일으키고 옆의 센다이(仙臺)로 도망쳐 들어갔다.
남부번의 산헤이이 잇키(三閉伊一揆)는 농민의 승리로 돌아갔다.
막번체제는 흑선의 출현과 농민 잇키 등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1.2 일본의 개국
산헤이이 잇키가 한창 진행중인 1853년 에도만(江戶灣)의 우라가(浦賀)에 페리(M.C. Perry)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출현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일본에 개국을 재촉하였다.
서부를 개척하여 태평양 연안에 다다른 미국은 1848년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을 계기로 본격적인 서부 개발에 나섰다.
또 석유 램프가 보급되기 이전, 고래의 기름이 등유와 초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경업은 중요한 산업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포경선이나 중국 항로의 기항지로서 일본을 개국시킬 필요가 있었다.
1854년 페리가 다시 내항하자, 로주(老中)인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개국을 결의하고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막부는 미. 일 화친 조약에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화친 조약을 맺고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館)의 개항, 영사의 주재, 편무적 최혜국 조항 등을 인정하였다.
아편 전쟁의 승리로 영국이 홍콩을 차지하고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시키는 등 유럽 열강의 중국 침략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 농민의 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고 영국은 주룽(九龍)반도를 할양받았다.
청국의 정세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에 부임한 미국 총영사 해리스(Harris)가 로주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에게 통상 조약의 체결을 독촉하자, 막부의 행정 책임자인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1858년에 미국과 미. 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다른 4개국과도 같은 조약(安政의 5개국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가나가와(神奈川). 나가사키(長崎). 니가타(新潟). 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江戶). 오사카(大板)의 개시(開市)를 약속하였다.
또 막부는 재류 외국인에게 영사재판권(치외법권)과 협정을 통해 관세율을 정하는 방식(관세자주권의 방기)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불평등한 조약이 되고 말았다.
1.1.3 안세이노 다이고쿠
페리의 개국 요구를 받았을 때, 아베 마시히로는 막정(幕政: 막부 정치)의 관행을 깨고 이것을 조정에 알린 후 각 다이묘(大名)에게 의견을 올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조정과 유력 다이묘에게 막정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부적절한 조치였다.
막부 내에서는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후계자를 놓고, 유력 다이묘들이 중심이 된 히토쓰바씨파(一橋派)와, 보수적인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이 중심이 된 난키파(南紀派)가 대립하였다.
난키파의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가 되자, 그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쇼군의 후계자로 정하고 칙허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미.일 통상 조약에 조인하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자 쇼군 후계 문제와 조약의 칙허 문제가 얽혀서 조정. 막부.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유력 다이묘의 가신과 재야의 지사들이 가담하였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유력 다이묘나 지사들을 탄압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를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の大獄)라고 한다.
그러나 막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자신의 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번을 뛰쳐나와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존왕양이파를 탄압하던 이이 나오스케는 1860년 미토(水戶)번의 로시(浪士: 탈번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것이 곧 사쿠라다몬(櫻田門) 밖의 변(變)이다.
1.2 막부의 붕괴
1.2.1 개국 후의 경제 변동
개국 후의 무역의 중심지는 요코하마(橫濱)였고, 당시의 무역은 수출 초과로 생사(生絲)와 차 등이 수출되었고, 모직물. 면직물과 무기 등이 수입되었다.
국내 소비용의 수공업 제품이 수출되자 물자의 부족으로 물가가 상승하였기 때문에, 막부는 고힌에도마와시레이(五品江戶廻令)를 반포하여 잡곡. 수유(水油). 밀(蠟). 포목. 생사 다섯 품목을 생산지에서 일단 에도로 회송시켜 시중의 수요를 충족시키려 하였다.
또 일본에서는 금. 은의 가격 비율이 1:5, 구미에서는 1:15였다.
이처럼 금의 가격이 구미보다 지나치게 쌌기 때문에 금이 대량으로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무사계급, 도시 하층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이런 경제적 곤란도 양이론(攘夷論)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1.2.2 공무 합체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고 존왕양이론을 억누르기 위해 고심하던 막부는 공무합체(公武合體)정책을 취하여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로주인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등은 고메이(孝明) 천황의 누이동생 가즈노미야(和宮)를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의 부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지만, 1862년 안도 노부마사는 이 정책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자 사직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사카시타몬(板下門) 밖의 변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슈번. 사쓰마번 등과 같이 일부 번의 지도층 세력은 공무 합체에 참가하여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례로 1862년 사쓰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에도로 올라가서 막정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1.2.3 양이 실행
사쓰마번과 사이가 좋지 않던 조슈번은 처음에 '항해원략설(航海遠略說)'을 주장하여 막부의 개국론을 지지하였지만, 존왕양이파의 반대로 번론이 존왕양이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조정에 공작하여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급진파 구게(公家)를 끌어들인 후 막부에 양이를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계속된 조정의 요구에 못 이겨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1863년 3월에 교토에 올라와 5월 10일을 기하여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5월 10일 양이의 명령이 막부로부터 내려지기가 무섭게, 조슈번은 그 날로 시모노세키(下關) 해협을 지나는 외국선에 포격을 개시하여 번의 위상을 높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공무 합체론에 서 있던 사쓰마번은 8월 18일에 아이즈(會津)번과 함께 조정의 주위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산조 사네토미 등 급진파의 구게를 추방하여 조정에서 조슈번의 영향력을 일소하였다.
이 사건을 8월 18일 정변이라고 한다.
다음 해 교토에서 밀려난 존왕양이파는 막부의 교토 경비대인 신센구미(新撰組)가 존왕양이파를 공격한 이케다야(池田屋) 사건을 계기로 교토로 진격하여 공무 합체를 지지하는 사쓰마번 등과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긴몬禁門의 변).
이 때 존왕양이파의 주력은 조슈의 병사였다.
1.2.4 대정 봉환
1863년에 나마무기(生麥) 사건의 보복 조치로 발발한 사쓰에이(薩英) 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은 사쓰마번은, 양이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서양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조슈번 역시 1864년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에 의해 조슈번의 포대가 파괴되고 시모노세키가 점령당하자 양이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슈와 사쓰마 두 번은 신식의 무기를 영국에서 수입하여 전력을 강화하면서 서로 접근하다가 1866년에는 삿초 군사 비밀 동맹(薩長軍事秘密同盟)을 맺었다.
1866년 막부는 다시 반막부 세력의 중심인 조슈번을 누르기 위하여 제2차 조슈 토벌군을 일으켰으나, 막부군은 근대 병기로 무장한 조슈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 중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병사하자 그것을 이유로 막부는 전쟁을 중지하였다.
이 전쟁으로, 곳곳에서 쌀값이 폭등하고, 쇼군이 출진해 있던 오사카를 비롯하여 에도 등에서 파괴와 요나오시잇키(世直し一揆)가 일어났다.
나아가 공무 합체론의 효메이 천황도 급사하자 토막(討幕)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1867년(慶應 3)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자, 구게 중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꾀하여 그 해 10월 13일에는 사쓰마번에, 14일에는 조슈번에 토막의 밀칙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14일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가 제출한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에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제출하여 수리를 받았다.
<심화학습>
* 데라다야(寺田屋) 사건 : 사쓰마번이 공무 합체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던 차에 사쓰마번의 존왕양이파는 서쪽 지방의 존왕양이파와 연대를 꾀하고 토막의 군대를 일으키기 위하여 교토에 모였다.
당시 유명한 술집의 하나였던 데라다야에는 전국에서 70명 정도의 존왕양이론자가 모여 있었는데, 이것은 막부의 감시를 피해 모인 비밀 회의였다.
당시 사쓰마번을 공무 합체 운동으로 이끌고자 했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측근을 보내어 만류하도록 하였으나, 사쓰마를 대표하는 7인의 존왕양이파가 "지금 궐기하는 것이 시마즈 히사미쓰님의 미래를 여는 길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자, 그 자리에서 7명 모두를 살해하였다.
당시는 이와 같은 혼란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토막 운동은 이러한 난세를 정리하겠다는 최후의 해결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물 및 용어해설>
히토쓰바시파(一橋派),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の大獄),
휴스켄 암살 사건, 영국 공사관(公使館) 기습 사건,
시마즈 다이묘 행차 중 영국인 살해,
8월 18일 정변과 천주조(天誅組)의 변, 이쿠노(生野)의 변,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와 삿초 동맹(薩長同盟),
요나오시잇키(世直し一揆),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사이즈 다이묘 행차 중 영국인 살해: 1862년 8월 21일 나마무기(生麥)에서 시마즈 행렬에 대하여 영국 상인이 무리하게 굴었다고 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영국은 사쓰마번에 시비를 걸어 이른바 사쓰에이(薩英)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쓰마번은 무려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시마즈 히사미쓰는 센다이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濟淋*)의 동생으로서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이기 했다.
공무 합체의 지지자로서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나가와(神奈川)의 나마무기(生麥)에서 영국인을 살상하는 나마무기 사건을 일으켰다.
제2장 메이지 유신과 부국 강병
<시대개관>
1868년에 성립한 새 정부는 보신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 이어 수도를 도쿄로 정하고 천황을 도쿄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새 정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과거의 제도들을 과감히 개혁하였다.
예를 들어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등의 조치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다이묘. 번주들은 과거의 특권과 지위를 상실하였다.
또 과거의 신분제가 폐지되고 새롭게 화족. 사족. 평민 신분이 생겨났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새 정부는 질록처분을 단행하여 다이묘와 사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일시에 해소하였다.
이처럼 정부는 과거의 구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하는 한편, 부국 강병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도들을 도입하였다.
징병령을 통해 근대적인 군대의 창설을 도모하였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국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부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지조개혁을 단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가 나타났다.
이러한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정부는 보다 손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화의 방향은 경제 개혁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화폐 제도와 은행의 설립, 방적 공장과 군수 공장의 건설, 그리고 우편 제도와 철도 교통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서구의 산업화를 본받고자 하는 메이지 새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학습목표>
1. 중앙 집권 정부의 탄생 과정.
2. 판적 봉환과 폐번 치현의 의미.
3. 메이지 정부가 실시한 근대화의 정책.
4. 지조 개혁으로 초래된 소유 형태의 변화.
2.1 중앙 집권 정부의 성립
2.1.1. 왕정 복고
1867년 12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貝視),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키치(大久利通) 등은 무력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쓰마번의 군대가 경호하는 천황의 거처에서 사쓰마. 도사(土佐). 아키(安藝). 오와리(尾張). 에치렌(越前)의 5개 번이 참가하는 회의를 열고 왕정 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는 다이고레이(大號令)를 발포하였다.
그 날밤의 회의에서 도사번 등의 반대를 누르고 쇼군의 관위와 영지를 조정에 몰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고고쇼 회의(小禦所會議)라고 한다.
또 사이고는 구막부측에 시비를 걸기 위하여 에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공작을 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바(鳥羽). 후시미(伏見)의 전투에서 삿초(薩長) 연합군에게 패해 에도로 돌아갔다.
2.1.2 메이지 새 정부
왕정 복고로 총재(總裁). 의정(議政). 참여(參與)의 3직으로 이루어진 새 정부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1868년 4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지시를 받고 에도를 지키던 가쓰 야스요시(勝安芳: 뒤에 가이슈海舟로 개명)는 새 정부의 지휘관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견한 후 전투없이 에도성을 열어 주어 에도를 전화로부터 구하였다.
새 정부는 아이즈번 등 오우에쓰번(奧羽越藩) 동맹에 가담한 도호쿠(東北)의 여러 번들을 쳐부수고, 다음 해 5월에 하코다테(涵*館)의 고료카쿠(五稜郭)까지 막부의 신하 에노모토 다케아키( 本武揚) 등을 항복시켜 내란을 종식시켰다(보신전쟁; 戊辰戰爭).
이 사이 정부는 1868년 3월 천황이 신에게 맹세하는 형식으로 5개조의 서문을 반포하고 정책의 기본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민중에 대해서는 '오방(五榜)의 서문'을 반포하여 단속할 의사를 드러냈다.
이어서 삼권 분립을 지향하는 7관제의 태정관제(太政官制)를 정하고, 7월에 에도(江戶)의 명칭을 도쿄(東京)로 바꾸고, 9월에 메이지(明治)로 개원하여 일세일원(一世一元) 제도를 만들었다.
다음 해 천황은 거처를 옮겨 수도로 삼았다.
2.1.3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번은 무진 전쟁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새 정부 내에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이들 번을 대표하는 개혁파 무사들이 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기도 다카요시 등은 번을 없애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1869년 1월 삿초도히(薩長土肥) 네 번주를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판적(版籍:토지와 인민)을 봉환하게 하였다.
다른 번들도 이에 따랐기 때문에, 6월에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고 옛 번주들을 지번사(知藩事)에 임명하여 행정을 맡기고 번정을 개혁하였다.
이를 판적 봉환(版籍奉還)이라고 한다.
하지만 판적 봉환 후에도 번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7월에 태정관제를 개정하여 2관 6성제로 바꾸고, 정책을 결정하는 대신(大臣). 참의(參議)와 각 성(省)의 장관인 경(卿) 등의 관직을 만들었다.
동시에 정부는 지금까지의 신분 제도를 바꾸어 구게(公家)나 다이묘를 화족(華族)으로, 옛 막부의 신하나 번사를 사족(士族)으로, 농공상을 평민으로 삼았다.
이것은 에도 시대의 철저한 신분제에 비하면 커다란 변화였기 때문에 사민(士民) 평등이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사쓰만. 조슈. 도사 세 번의 실권을 잡은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협의하여 1871년 2월, 세 번의 병사 약 1만명을 정부의 친병(후에 근위병)으로 삼았다.
친병의 무력을 배경으로 정부는 7월에 폐번 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여 옛 번주를 도쿄로 이주시키고 정부의 관리나 부지사(府知事: 縣令)에 임명하여 행정을 맡겼다.
폐번 치현을 통해 에도 시대의 근간인 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1.4 징병령
조슈번 출신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내란을 겪으면서 무사가 근대적 군대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기헤이타이(奇兵隊) 등 민병대의 전투력이 강력했던 사실을 교훈으로 징병 제도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구파의 무사에게 암살 당하였으나, 이전에 기헤이타이의 총지휘관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서구의 군사 제도를 연구하여 징병 제도를 주장하자, 1872년에 징병 고유(懲兵告諭)가, 다음 해에 징병령이 제정되었다.
징병령은 국민 개병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면제의 규정이 많아 농가의 대부분이 그 부담을 지게 되었다.
농민 가운데는 납세 이외의 부담에 대한 반대와 징병 고유에 대한 오해가 겹쳐서 각지에서 혈세 잇키(血稅一揆)가 일어났다.
2.1.5 지조 개정
새 정부의 재정은 옛 막부의 연공 징수권을 계승한 이외에, 부족한 부분을 공채의 발행이나 호상(豪商)으로부터의 차입금, 불환 지폐인 태정관찰(太政官札)의 발행으로 보충하였다.
주된 재원인 연공은 쌀로 내는 미납이거나 시가에 의한 금납이었기 때문에 세입은 쌀값의 변동이나 풍.흉작의 영향을 받아 매우 불안정하였다.
정부는 세제의 개혁을 추진하여 1871년 전답 조성 자유화를 인정하였다.
또 다음 해에 전답영대매매금지령(田畓永代賣買禁止令)을 해제하고 지권(地券)을 교부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 개념이 도입되었다.
1873년 정부는 지조개정조례(地租改正條例)를 포고하여 지조를 지가의 100분의 3으로 정하고 6년 뒤 지조 개정 사업을 거의 마무리지었다.
지조 개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과세의 표준을 수확량에서 지가로 변경.
② 물납을 금납으로 고치고, 세율을 지가의 3%로 결정함.
③ 토지 소유자가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지조 개정으로 정부는 매년 정액의 지조를 현금으로 징수하게 되어 예산 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부담 총액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증세가 된 지역도 있었다.
1876년 미에(三重)현 등에서 지조 반대 잇키(伊勢暴動)가 일어나 정부는 다음 해 지조를 100분의 2.5로 경감하였다.
그래도 농민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아 지조 경감의 요구는 후에 전개되는 자유 민권 운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2.1.6 식산 흥업
부국 강병을 실현하고자 서두르던 정부는 옛 막부의 요코스카(橫須賀) 제철소를 해군 조선소로, 에도 세키구치(江戶關口) 대포 제작소를 도쿄 포병 공창으로 삼고, 나아가 관영 군사 공장을 신설하고, 또 1870년에는 공부성(工部省)을 설치하여 옛 막부 등에서 인수한 광산을 관영으로 삼았다.
또 나가사키(長崎) 제철소의 기계를 옮겨서 오사카(大板) 포병창을 만들고, 사도(佐渡) 금산, 미이케(三池)의 탄광, 오사카(小坂)의 동산, 가마이시(釜石)의 철산 등을 관영으로 삼았다.
정부는 주요 수출품인 생사의 품질을 개량하기 위하여 서양식의 관영 도미오카 제사(富岡製絲) 공장을 만들어 여공을 양성하고, 견사나 모직물의 수입을 줄이기 위하여 방적 기계를 수입하는 한 편, 센주 제융소(千住製絨所)를 건설하였다.
도미오카 제사 공장은 민간 공장으로, 센주 제융소는 관영 군사 공장으로 존속하였지만, 다른 공장의 상당수는 당시의 국내 사정에 맞지 않아 실패하였다.
또 1872년에 신바시(新橋)-요코하마(橫浜) 간의 철도가 개통되고, 1874년에는 아오모리(靑森)-도쿄(東京)-나가사키(長崎) 사이가 전부 개통되었다.
1871년에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편 제도를 제정하고, 1877년 만국우편연합에도 가입하였다.
이 해에 일본에 처음으로 전화가 수입되었다.
나아가 정부는 근대적인 화폐 제도를 채용하여, 1871년에 신화조례(新貨條例), 다음 해에 국립은행조례를 제정하고, 국립 은행에 금본위제에 의한 태환 은행권의 발행을 인정하였다.
2.2 문명 개화와 복고
2.2.1 소학교의 탄생
메이지 유신 전후부터 종래의 개인이 운영하던 데라코야(寺子屋)와 달리, 지역의 유지들이 발기하여 공립의 향학을 설립하고 교원을 초빙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 각지에서 실시되었다.
향학은 데라코야와 달리 공공성. 개방성과 교육의 계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근대 학교 교육의 선구가 되었다.
폐번 치현 직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정부 수뇌가 많은 수행원과 함께 구미를 순방하여 구미의 제도 문물을 시찰하고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에 참가한 육군 고관은 학교 교육과 징병제를 중시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1872년 학제를 발포하여 국민 모두가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학제는 전국적으로 단일한 제도였기 때문에 각 지방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점도 있고 설립비나 수업료의 부담도 컸다.
1879년 교육령으로 의무 교육이나 취학 조건은 완화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개정되었다.
이처럼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 착오와 제도의 수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2.2.2 국가 신도
왕정 복고에서 출발한 정부의 내부에는 복고주의적인 경향도 여전히 강해, 천황 친정. 제정 일치 등을 주장하며 신도(神道)를 국교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70년에는 대교 선포(大敎宣布)의 조칙을 내려 신도에 의한 국민 교화정책을 취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황실의 조상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사하는 이세 신궁(伊世神宮)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를 서열화하고 천황이 최고의 제사장으로서 국가가 제사를 관장하고 신직(神職)을 정부가 임명한다고 하는 국가 신도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정부는 막부의 기리시탄 금지정책을 계승하여, 에도 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왔던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기리시탄을 적발. 탄압하여 우라카미 구즈레(浦上崩れ) 사건을 일으켰다.
2.2.3 사민 평등과 문명 개화
판적 봉환 후 정부는 평민에게 성씨를 허락하고, 거주나 직업 선택의 자유, 신분을 넘어선 혼인. 문무 관리가 되는 것을 인정하였다.
또 1871년에는 종래의 에타(穢多). 히닌(非人)의 호칭을 폐하고 평민으로 부르게 하여 형식상 황족을 제외하고 사민 평등이 실현되었다.
1872년에는 태음력을 폐하고 태양력의 채용을 포고하여 시각의 표시를 하루 24시제로 통일하고, 관청에서는 일요일 휴일제를 채용하였다.
민간에서도 도시에는 문명 개화의 풍속이 들어왔지만, 도쿄의 서민층이나 농촌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종래와 거의 바뀌지 않아서, 여러 가지 민속 행사를 행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지켰으며, 농경 생활 속에서는 음력을 계속 사용하였다.
2.3 메이지 초기의 대외 관계
2.3.1 국경의 확정
통일 정부를 갖고 주권 국가가 된 일본은 국경의 확정을 서둘렀다.
1854년의 러.일 화친 조약은 에토로후(擇捉)섬 서쪽의 제도를 일본령으로 하고 가라후토(樺太: 사할린)에 대해서는 소속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일 양국 사이에 종종 분쟁이 일어나 러.일 관계를 긴장시켰다.
정부는 교섭의 결과, 사할린을 러시아에 양보하고 1875년에 우룻푸(得撫)섬 동쪽의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전부를 일본령, 가라후토를 러시아령으로 하는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을 맺었다.
2.3.2 류큐 처분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류큐 왕국(琉球王國)은 동시에 청나라와도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1871년에 상호 평등한 청.일 수호 조약을 맺었지만 류큐의 귀속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는 1872년에 류큐번을 설치하고, 류큐의 표류민이 대만의 선주민에게 살해당한 1871년의 사건을 이유로 1874년에 청국령의 대만에 출병하여 류큐가 일본령인 것을 청나라에 알렸다(대만 출병).
1879년 정부는 군대를 류큐에 보내 무력을 배경으로 번과 왕부(王府)를 폐하고 오키나와(沖繩)현을 설치하였다.
2.3.3 조.일 수호조약
일본과 조선은 에도 시대에 국교를 맺어 양국 간에 국경 문제는 없었다.
정부는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조선의 지위를 낮게 보고 국교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조선과의 외교권을 쓰시마(對馬)번으로부터 접수하고 막부가 맺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조선은 일본을 '무법의 나라'로 비난하였고, 이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1873년 불평 사족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하였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외유하던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 등 남아서 정부를 지키던 자들이 정한으로 기울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 우선을 주장하여 정한에 반대하였다.
정한론에 패한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참의를 사임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오쿠보 도시미치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킨 후 함대를 파견하고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1876년 조.일 수호 조약을 맺고 조선을 개항시켰다.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인천. 원산)를 개항하고,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도 가혹한 조건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2.3.4 임오 군란과 갑신 정변
조선은 그 후에 구미 각국에게도 개국하여 청국. 일본. 미국.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서 이권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구미 상품의 중개 무역을 주로 하였던 일본으로 조선의 금이 유출되자, 조선에서는 물가가 폭등하고 재정이 궁핍하여졌다.
치외 법권을 악용하는 일본 상인도 적지 않아, 조선에서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1882년(壬午年)에 구식 군대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을 덮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조정으로 일본은 공사관의 경비를 위하여 군대를 상주시킬 권리를 얻었지만, 그 결과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는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1884년(甲申年) 일본의 근대화정책을 배운 김옥균 등 개혁파가 청나라를 등에 업은 보수파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개혁파의 정권수립을 돕기 위해서 일본은 주류하고 있던 군대를 움직였지만, 청국군에 패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한다.
그 결과 청.일 간에는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파병시에는 사전 통고를 한다고 하는 톈진 조약(天津條約)이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맺어졌다.
1889년의 방곡령 사건의 배후에 청나라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 일본 정부는, 청나라와의 개전을 신중하게 검토하게 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 간의 군사적 대립이 깊어 갔다.
<심화학습>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유신 초기에는 햇병아리 새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 세력이 아직도 전국에 잔존하고 있었고, 새 정권의 내부에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요직과 감투를 놓고 각 파벌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내부 분열의 위험 속에서도 신출내기 메이지 정부는 서양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문명개화’의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메이지 유신의 핵심 멤버와 유학생, 수행원을 포함하여 106명으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2년에 걸쳐서 미국과 유럽을 둘러볼 예정으로 1871년 9월 요코하마를 출발하였다.
아직 정부의 정통성과 정치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의 핵심들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결심한 것은 서양의 문명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불안한 정부를 동료들에게 맡기고 장기간 나라를 비운다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태정관제(太政官制), 징병령, 지권(地券), 지조개정(地租改正),
기독교의 전래, 차별 부락민 문제, 서구 문명의 도입, 북방 영토 문제,
재정 문제와 위관군 사건(僞官軍事件),
지권(地券): 지권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증서로서 연공 부담자에게 주어졌다.
이로써 근대적 토지 소유의 개넘이 도입되었지만, 1886년에 새롭게 등기법이 실시되자 폐지되었다.
지조개정(地租改正): 지조 개정은 연평균 수확량 또는 소작료를 토지의 이자로 보고 그 근본에 해당하는 땅값을 산정하여 지조와 민비(民費; 지방세, 지조의 3분의 1)를 징수하는 제도였다.
서구 문명의 도입: 짧은 머리에 중산모, 양복.구두.양산을 사용하고 소고기 전골을 먹는 등의 풍속이 유행하였다.
도쿄 긴자(銀座)의 벽돌 건물로 된 시가지를 마차가 달리고, 거리에서는 가로등으로 가스등이, 실내에서는 석유 램프가 불을 밝혔지만, 이러한 변화는 대도시 일부의 현상이었다.
제3장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
<시대개관>
일본은 1870년대 중반에서 188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자유 민권 운동으로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자유 민권 운동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정한론 논쟁에서 패배하어 정계를 떠난 정치 세력들이 다시 정치에 복귀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치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납세자인 국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민선 의원 설립(民選議院設立)을 요구하였다.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가 도화선이 되어 자유 민권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더욱이 불평 사족들이 일으킨 서남 전쟁에서 정부에 대한 무력적 저항이 실패로 끝나자, 자유 민권 운동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결국 1881년 정부도 민중과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10년 뒤에 헌법과 국회를 설치할 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국회의 개설에 대비해서 지방의 자치 제도나 내각 제도 등을 정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독일에 파견하여 일본에 적합한 헌법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자유 민권 운동 측에서도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을 만들어 헌법체제에 대응하였으나, 메이지 정부는 헌법과 제도의 개혁에 있어서 민간의 의견을 일체 수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정부 주도하에 진행되어, 헌법은 1889년 2월 11일 대일본 제국 헌법으로서 발포되었다.
이 헌법은 주권자인 천황이 만들어 국민에게 내려 준다고 하는 이른바 흠정 헌법(欽定憲法)이었다.
일본은 이 헌법에 근거하여 귀족원과 중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를 1890년에 개설하였다.
3.1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
3.1.1 서양 문화의 섭취
아편 전쟁 후 막부나 유력 다이묘들은 군사력을 충실히 할 필요를 느끼고 서양의 근대 기술의 수용에 힘썼다.
막부 대관인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는 반사로를 만들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고, 사가(佐賀)번이나 사쓰마번 등도 총포를 제조하였다.
막부는 근대 과학을 조직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1856년에 양학소(洋學所)를 번서조소(藩書調所)라고 바꾸고 막부 신하의 자제, 나아가 제번의 유지에게도 문을 열어 난학(蘭學). 영학(英學)을 배우게 하였으며, 후에는 개성소(開城所)라고 고쳐서 어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메이지 새 정부는 막부가 창설한 의학소와 개성소를 계승하는 형태로 후에 양쪽을 합쳐서 도쿄대학(東京大學)을 만들었다.
막말에는 서양 과학과 동양의 도덕 사상의 결합을 주장하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나, 일본이 대국이 되지 말고 전쟁을 막는 '인의(仁義)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같은 사상가가 나왔지만, 메이지 유신 후에는 서양 사상을 소개하는 계몽 사상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학문의 권장》의 저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사쿠마 쇼잔의 가르침을 받은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번서조소를 나온 니시 아마네(西周), 개성소에서 배운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은 1873년에 메이로쿠샤(明六社)를 만들고, 다음 해 《메이로쿠잣시(明六社雜誌)》를 발행하여 널리 근대 사상을 소개하고,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인권이나 입헌 정치를 강조하는 자유 민권 사상에 눈을 떴다.
메이로쿠샤에는 자립의 정신을 주장한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천부 인권설을 소개한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도 있었다.
3.1.2. 지방 자치의 요구
판적 봉환 후 구마모토(熊本)번에서는 요코이 쇼난의 가르침을 받은 부농들이 번정을 장악하고 지번사(知藩事)의 직필로 "백성은 혹한 풍우도 마다하지 않고 ..."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구마모토번에서는 대규모 감세를 실행하고, 사족과 평민을 구별하지 않고 투표로 의원을 선출하여 번의 의원(議院)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도사번도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에 의하여 번의원이 설립되었으나 폐번의 조치로 중단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적 정치에 반대하고 지방 민회의 설립을 요구하는 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 지방 자치의 요구가 높아졌다.
1878년 정부는 삼신법(三新法)을 제정하고 부현회(府縣會)를 설치하였다.
3.1.3 사족의 반란에서 언론 활동으로
폐번 치현 후 과거의 지위를 상실한 사족(士族)들 중에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사족, 과거의 특권을 잊을 수 없었던 사족, 정한론을 지지하는 사족들 사이에서 반정부 감정이 높아졌다.
1874년 사가(佐賀)의 사족이 참의직을 지냈던 정한파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를 수령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사가의 난).
판적 봉환 후, 정부는 화족과 사족의 가록(家祿)을 감액하여 지급함에도 불구하고 가록이 나라의 재정을 압박하자, 1876년 가록을 폐지하고 대신에 금록공채(金祿公債)로 화족과 사족에게 보상해 주었다(질록 처분).
같은 해 폐도령이 발포되어 무사의 상징인 칼을 차지 못하게 되자, 사족의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에서 사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1877년 가고시마(鹿兒島)의 사족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 삼아 일으킨 반란은 규슈의 남쪽 지역 전체에 걸친 내란(사족 반란 또는 西南戰爭)으로 확대되었지만, 근대적 장비를 갖춘 정부의 징병 군인에게 패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하였다.
한편 사족 가운데는 새로운 사상을 기반으로 신문과 같은 언론 기관에서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1875년 정부는 참방률(讒謗律). 신문지 조례 등을 제정하여 언론을 통제하였다.
서남 전쟁 후 사족의 반정부 운동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호소하는 자유 민권 운동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3.1.4 국회 개설의 청원
정한론을 주장하여 참의를 사직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은 1874년 애국공당(愛國公黨)을 결성하고 연서하여 민선 의원 설립(民選議院設立)의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건백을 계기로 국회 개설의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자유 민권 운동의 제1보가 되었다.
건백의 내용은 사족과 호농을 정치에 참가시키자는 것으로, '상류의 민권'이라고 불렸다.
1875년 기도 다카요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복직하고, '점진적으로 국가 헌법의 정체를 수립'한다는 조칙이 나오고, 삼권 분립을 목표로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大審院)이 설치되었으며, 임명된 의관(議官)으로 구성된 원로원(元老院)을 입법의 자문기관으로 삼았다.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결성한 고치(高知)의 입지사(立志社)는 서남 전쟁 중에 국회 개설을 건백하여 자유 민권 운동으로의 전환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자유 민권을 주장하는 민권 정치 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이들 정사의 연합체로서 부활한 애국사(愛國社)는 1880년에 국회 기성 동맹으로 발전하여 국회 개설의 청원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집회 조례(集會條例)를 제정하여 운동을 억압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헌법을 준비하였다.
3.1.5 메이지 14년의 정변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망한 후 최고의 선임 참의가 된 오쿠마 시게노부(大 重信)는, 국회의 조기 개설과 정당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면서 번벌 정권(藩閥政權)의 유지를 꾀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대립하였다.
마침 홋카이도 개척을 목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개척사의 폐지 기한이 다하자, 정부는 개척 사업으로 건설한 대규모 시설을 사쓰마 출신의 정상(政商) 고다이 도모아쓰(五大友厚) 등에게 싸게 불하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런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여론도 권력을 독점하고 정상의 이권만을 챙겨 주는 번벌 정부를 '유사 전제(有司專制)'라고 격렬하게 공격하여 정부는 위기에 빠졌다(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開拓社官有物拂下事件).
이토 히로부미 등은 삿초(薩長) 연합을 만들고 불하를 중지시키는 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를 정부에서 추방하고 칙유(勅諭)를 내려 10년 뒤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함으로써(국회 개설의 칙유) 위기를 겨우 모면하였다.
이것이 곧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다.
3.1.6 사의 헌법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국민의 손으로 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기운이 국민 사이에서 높아졌다.
1880년에 열린 국회기성동맹 제2회 대회에서는 다음 대회까지 헌법 예상 시안을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3.1.7 자유당과 입헌개진당
메이지 14년의 정변 직후 국회기성동맹을 중심으로 이전부터 준비중이던 자유당(自由黨)이 결성되어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총리가 되었다.
이어서 정부에서 하야한 오쿠마 시게노부를 총리로 삼아 도시의 지식인. 실업가 등을 참가시킨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도 결성되었다.
1882년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가 후쿠시마(福島) 현령이 되었을 때, 자유당 간부인 현의회 의장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 등은 내란을 획책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 후쿠시마 사건(福島事件)의 충격으로 자유당은 해당하고, 개진당도 오쿠마 시게노부가 탈당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국 자유민권운동은 국회개설이라는 정치적 약속을 얻어내자 급속히 약화되었고, 정작 민주의 인권을 대변하는 투쟁에는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3.1.8 지치부 곤민당
누에 가격의 하락과 과중한 세금으로 곤궁해지고 고리대의 빚으로 고생하던 농민은 각지에서 곤민당(困民黨)이나 차금당(借金黨)을 결성하였다.
1884년 11월 사이타마(埼玉) 현 지치부(秩父) 지방에서는, 옛 자유당원인 다시로 에이스케(田代榮助) 등이 이끄는 곤민당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농민이 지조 경감, 차입금 면제, 징병 반대를 외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은 농민의 자유와 자치를 이상으로 내걸고 싸웠지만 결국 나가노(長野)현 사쿠(佐久) 지방에서 진압 당하였다(지치부 사건秩父).
이처럼 종식된 것처럼 보였던 자유민권운동이 1886년부터 다시 고양되었다.
다음 해에는 지조 경감, 언론. 집회의 자유, 외교의 회복을 요구하는 ‘삼대 사건 건백서(三大事件建白書)’를 원로원에 제출한 것을 계기로 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三大事件建白運動).
이에 대하여 정부는 보안 조례(保安條例)를 만들어 탄압하였지만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옛 자유당원들은 다시 입헌자유당(立憲自由黨)을 결성하였다.
3.2 대일본 헌법의 제정
3.2.1 제국 헌법의 기초
1882년 국회 개설에 대비해서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어, 베를린의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나 빈의 슈타인(Stein) 등 독일 법학자의 강의를 듣고,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의견을 듣기도 하였다.
귀국 후 이토 히로부미는 남부 독일 바이에른 출신 법학자 로에슬러(Roesler)를 고문으로 하여 군주권이 강한 독일 연방의 헌법을 참고로 헌법과 그 부속 법령을 기초하였다.
3.2.2 정치 제도의 정비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정부는 정치 제도의 정비도 서둘렀다.
1884년에 화족령(華族令)을 정하고,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를 화족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황실을 지키는 특별한 신분으로서 후에는 의회에 설치될 귀족원(貴族院)을 구성하게 된다.
다음 해 태정관제(太政官制)를 폐하고 내각 총리대신(수상)과 국무대신(각 성의 장관)으로 조직된 내각 제도를 창설하였다.
다만 수상은 내각의 수반이지만 다른 대신을 면직시킬 수 없을 정도로 권한이 약하였다.
또 정부와 궁정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궁중의 관리로서 궁내대신과 천황을 보좌하고 조칙 등을 관할하는 내대신(內大臣) 제도를 만들었다.
황실을 재정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주식. 공채. 토지 등을 황실 재산으로 확보하였다.
이것은 모두 천황제를 공고히 하고 천황의 권위가 정치에 의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3.2.3 지방 행정의 독립
정부는 1888년에 시제(市制). 정촌제(町村制)를, 1890년에 부현제(府縣制). 군제(郡制)를 제정하였지만 실시된 시기는 지바에 따라 달랐고, 특히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서는 실시가 늦었다.
3.2.4 헌법 제정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은 추밀원에서 심의한 후에 1889년 2월 11일 천황의 의사에 따라 제정된 헌법(흠정 헌법)으로서 발포되었다.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황위의 계승. 즉위 등 황실에 관한 것을 황실 전범(1889년 제정)으로 정하였다.
제국 헌법은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천황의 대권은 육해군의 통수, 선전.강화.조약 체결 등의 외교, 관제의 제정이나 대신 이하 관리의 임명 등 매우 넓었고, 의회는 이에 관여할 수 없었다.
또 의회의 사후 승인을 전제로 법률에 해당하는 칙령(勅令)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제국 의회는 국민의 선거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된 중의원(衆議院)과 화족 의원 등으로 이루어진 귀족원(貴族院)의 이원제를 채택하였다.
중의원 의원 선거법에서 선거권은, 직접 국세 15엔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로 한정되었다.
참고로 제1회 총선거 당시에 만 25세 이상의 남자 인구는 약 1,000만 명(전 인구의 25%)으로, 그 중 선거 유권자 수는 약 45만 명이었다.
따라서 유권자 수는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사법권은 천황에게 속하여 행정. 입법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행정부의 권한은 의회보다 컸고, 각 국무대신은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다.
3.2.5 각 법전의 편찬
정부는 조약 개정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메이지 초년부터 각종 법전의 편찬을 추진하였다.
1890년 프랑스의 법학자 보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를 고문으로, 프랑스 민법을 모체로 하는 민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민법은 “충효를 죽인다”고 하는 민법전 논쟁으로까지 번졌기 때문에, 일본의 민법은 1898년에 다시 편찬되어 독일 민법을 모법으로 삼은 신민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심화학습>
* 사족(士族)의 반란
메이지 정부의 급속한 서구화 정책으로 과거 무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사족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불평 사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여 하야한 당대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 삼아 정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것이 1877년에 일어난 서남 전쟁(西南戰爭)이었다.
결국 반군은 2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패하고 말았으나, 그렇다고 불평 사족들이 정부의 서구화에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들 불평 사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와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을 벗어나 중국이나 조선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들을 대륙 낭인이라고 한다.
대륙 낭인들은 중국이나 조선에 들어가 그곳의 개혁 운동, 언론 등을 지원하면서 크게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지원하는 별동대 역할을 하였다.
*홋카이도 식민
어로와 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이누는, 본토에서 진출한 수산업자 등의 압박으로 막말에는 이미 현저하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러시아의 동방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개척사(開拓使)를 두고 홋카이도의 방비를 겸하면서 둔전병 촌(屯田兵村)을 각지에 배치하고 군사 도로를 건설하였다.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조수를 홋카이도로 보냈으며, 또 보신 전쟁에서 패한 도호쿠(東北) 제번의 사족이나 북쪽의 농민이 주로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였다.
개척사는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를 만들고 농장. 철도. 공장. 관산을 건설하여 홋카이도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개척으로 아이누의 생활 영역은 점점 좁아졌다.
정부는 1889년 홋카이도 구토인보호법(北海島舊土人保護法)을 제정하고 정부가 제공한 토지에 아이누를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의 민권
17세기 이래 사쓰마번의 압정에 시달려 왔던 오키나와현의 민중은 폐번 치현 때에 정부가 약속한 토지 개혁과 세제 개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부는 폐번 치현에 대한 오키나와 지배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타협적인 ‘구관 온존(舊官溫存)’ 책을 취하였다.
임야 처분에 반대한 오키나와 출신의 농업 기사 자하나 노보루(謝花昇)는 그 후 오키나와 현민의 정치적 권리를 되찾는 운동의 선두에 서서 관헌의 압박에 맞섰다.
1909년에 겨우 부현제가 실시되어 마침내 1912년에 중의원선거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키나와 경제의 후진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취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민을 본토에 동화시키기 위해 예로부터 내려온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였다.
<인물 및 주요용어>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삼신법(三新法), 사족(士族)의 저항, 혁명권, 오다 다메쓰나(小田爲綱),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의외유 사건, 자유민권운동의 격화 사건,
시제(市制).정촌제(町村制), 귀족원(貴族院), 신민법의호주권,
아이누 문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 1835~1901.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 계몽 사상가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그는 개인의 독립이 나라의 독립을 떠받친다고 생각하고, 신분제에 의한 비굴한 사고 방식과 상업을 멸시하는 풍조를 일소하고자 하였다.
제4장 조약 개정과 청.일 전쟁
<시대개관>
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래로 항상 국제 사회에서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을 목표로 근대화에 매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약 개정은 헌법 제정과 함께 메이지 정부가 심혈을 기울였던 과제중의 하나였다.
조약 개정은 막말에 막부가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평등한 조약으로 고치고자 하는 외교적 노력을 의미한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관세 자주권의 회복과 영사 재판 제도의 철폐에 있었다.
조약 개정은 거듭되는 실패 속에 1894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무쓰 무네미쓰 외상에 의해 마침내 성취되었다.
또 일본은 국제적 지위의 상승을 위해 대륙으로의 팽창을 의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는 조선을 놓고 점차 청나라와 갈등의 도를 더해 갔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조선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세율을 높이고 군사비의 지출을 파격적으로 증가시켰다.
결국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청.일 전쟁은, 준비가 충분했던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나친 전리품 획득을 불만스럽게 여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른바 '삼국 간섭'을 통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하였다.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시 러시아와 경쟁하는 구도가 되었다.
<학습목표>
1. 불평등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
2. 조약 개정 과정.
3. 한국의 정변에 대한 일본의 대응.
4. 청.일 전쟁과 일본 국내 정세의 연관성.
4.1 조약 개정 교섭
4.1.1 이노우에 외상 시기
1876년 정부는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에게 조약 개정의 교섭을 개시하게 하였다.
당시의 경제 사정상 수입을 줄일 목적으로 우선 관세 자주권의 회복을 꾀하였지만 영국의 찬성을 얻지 못하여 교섭은 실패하였다.
여론도 치외 법권 철폐(법권 회복)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법률의 정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일본이 문명국임을 보여 주기 위해 구화정책(歐化政策)을 취하고,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상류 계층이 구미의 외교관을 불러 매일 밤 무도회를 여는 등 선진 열국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4.1.2 조약 개정의 실패와 성공
1887년 정부는 자유 민권론자들의 비판을 보안 조례(保安條例)로 탄압하면서 새 내각의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 重信)에게 조약 개정의 중책을 맡겼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교섭 방법을 바꾸어 일본에 호감을 가진 미국. 독일. 러시아를 개별 접촉하여 개정안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오쿠마 시게노부의 개정안에도 대심원(大審院; 대법원)에 외국인 판사를 임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에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는 국권론자에게 습격 당해 중상을 입고 사임하여 교섭은 중지되었다.
그 후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교섭을 재개하였으나, 방일 중인 러시아 황태자가 피습을 당한 사건(오쓰 사건大津事件)이 일어나, 아오키 슈조 외상은 사임하고 조약 개정 교섭은 다시 중단되었다.
1893년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후임 외무대신이 되자 그는 영국과의 교섭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1894년 7월 외국인 거류지를 폐지하고 국내 거주의 자유를 인정함과 동시에 치외 법권을 철폐하는 새로운 영.일 통상 항해 조약(英日通商航海條約)이 조인되었다.
이어서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구미 제국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이 맺어져 1889년에 발효되었다.
그러나 관세 자주권의 완전 회복은 1911년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4.2 청.일 전쟁
4.2.1 초기 의회
1890년 7월 제1회 총선거가 치러지고 11월에 제1회 제국 의회가 열렸다.
아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내각은 1891년 민당의 일부를 와해시키고 예산을 성립시켰다.
4.2.2 청.일 전쟁의 발발
방곡령 사건으로 청.일 관계가 긴장되었던 1894년의 봄에, 종교 결사인 동학(東學) 등이 지도하는 대규모의 농민 전쟁(甲午農民戰爭)이 조선에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의 종속 관계를 끊고 내정을 개혁하도록 요구하면서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였다.
이미 전쟁을 의도하고 있던 일본은 선제 공격과, 7월 25일 아산만의 해전을 계기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8월 1일에 청나라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다.
청.일 전쟁의 개시 후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大本營)을 히로시마(廣島)로 진출시켰다.
4.2.3 시모노세키 조약과 삼국 간섭
결국 청나라가 강화를 요청하여 1895년 4월에 전권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長)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일본에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할양하고 배상금 2억 냥(약 3억 엔)을 지불하는 등의 조건을 인정하였으며, 그밖에 일본은 중국 진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랴오둥 반도의 할양은 만주로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러시아를 자극하였고, 이에 러시아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대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강하게 압력을 가하였다(삼국 간섭).
군사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하였고, 이 때부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시작하였다.
4.2.4 식민지 대만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최초의 정복 식민지인 대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대만의 한족은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을 만들어 식민지화에 저항하였다.
한족에 대한 제압이 끝날 무렵,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을 개시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지조를 확실히 징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물 및 주요용어>
치외 법권의 문제, 초연주의(超然主義), 대만 점령.
제5장 러.일 전쟁과 한국 강점
<시대개관>
청.일 전쟁으로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중국은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킨 사건이 1900년 의화단 세력에 의해 베이징이 포위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하여 서구 열강은 8개국 연합군을 편성하여 베이징에 포위된 외교관들을 구출하였는데, 이 연합군에 일본도 가담하여 국제 무대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의화단 사건은 혼란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곧 이어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영국을 끌어들여 영.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는 더욱 선명하여졌다.
결국 서로의 양보 없이 진행된 러.일 협상은 무위로 끝나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은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해서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포스머스 강화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러나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로 일본이 완벽하게 승리하였다고 믿고 있던 대중은, 일본이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을 알자 국가에 배신당했다는 억울함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른바 히비야 공원의 폭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을 통하여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식민지로 확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서양 열강과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학습목표>
1. 의화단 사건과 동북아시아의 변화와 연관성.
2. 영.일 동맹으로 변화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
3.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이 실시한 한국에 대한 침략 정책.
4.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민중의 반응.
5.1 러.일 전쟁
5.1.1 열강의 중국 분할책과 영.일 동맹
청.일 전쟁 후 유럽의 열강은 일제히 중국 본토의 분할에 나섰다.
러시아는 삼국 간섭의 대가로 뤼순(旅順). 다렌(大連) 지역을 조차하여 만주를 세력권으로 삼았고, 일본은 푸젠성(福建城)에 세력권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중국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종교 결사인 의화단(義和團)은'부청멸양(扶靑滅洋)'을 외치며 봉기하여 1900년 베이징의 열국 공사관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을 주력으로 하는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의화단 전쟁 또는 북청 사변이라고 함).
한편 전란을 틈타 러시아는 대병력을 투입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한국(1897년 조선은 국명을 대한 제국으로, 왕을 황제로 바꾸었다)에도 세력을 뻗쳐서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의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등은 영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고 1902년에 영.일 동맹을 성립시켰다.
영국도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 동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 세기 이상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던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크게 놀랐다.
5.1.2 러.일 전쟁
일본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하여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인정해 줄 터이니 일본의 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태도도 강경하였지만 일본의 국내 여론도 대러시아 개전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 해군은 인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한 후, 러시아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1905년 1월, 포위한 지 7개월만에 뤼순에 있던 러시아군의 항복을 겨우 받아 내었다.
한편 황해에서는 러시아의 뤼순 함대에 타격을 가하고 울산 앞 바다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육군이 만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전쟁은 종결되지 않고 있다가, 1905년 5월 유럽에서 회항해 온 발트 함대를 동해 해전에서 거의 전멸시킨 후에야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5.1.3 전시하의 국민
러.일 전쟁에서 쓴 전비의 총액은 18억 엔 정도로, 개전 전년도인 1903년의 국민 총소득액과 거의 같다.
개전과 함께 간선 철도와 외항 선박의 대부분이 군사 수송을 우선시하였으며, 국내의 상품 유통도 막혀 심한 불황으로 많은 실업자가 나왔다.
군인 가족에 대한 원호 사업이 실시되었지만,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5.1.4 포츠머스 조약
계속된 패전으로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 운동이 고조되었고 국민 사이에 전쟁 반대의 기운이 강해졌다.
일본에서도 병력의 보충과 전비의 조달력이 한계에 달했다.
동해 해전 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의 의뢰를 받아 러.일 양국에 강화를 권하였다.
강화 회의는 러시아의 비테와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의 워싱턴 근처인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렸다.
결국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이 조인되어 러시아는 일본에게 사할린(가라후토樺太) 남쪽을 할양하고 뤼순.다렌 지구의 조차권 및 창춘(長春) 이남의 동청 철도 지선과 그에 부속된 권리를 할양할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지도.보호.감리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
과대한 전비를 부담해 온 국민은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거액의 외채까지 남긴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국민 대회를 열었다.
5.2 러.일 전쟁 후의 일본
5.2.1 게이엔 시대
1907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주가 하락에 의한 공황과 농업 공황이 일어났다.
러.일 전쟁 후 정치에서는 번벌 관료 세력을 대표하는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중의원의 최대 세력인 정우회(政友會)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교대로 정권을 담당하는 게이엔(桂園) 시대가 7년간 계속되었다.
5.2.2 제1차 호헌 운동
1913년은 호헌 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가쓰라 수상은 입헌동지회를 결성하여 반대 세력을 와해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우.국민 양당은 내각 불신임안으로 대항하였다.
5.3. 대한 제국의 몰락
5.3.1 보호 조약의 체결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국외 중립 성명을 무시하고 한국 내에 군대를 진출시켜, 1904년 한.일 의정서(韓日議政書)를 강요하고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편의를 획득하였다.
다음 해에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어...
1905년 방한한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5.3.2 항일 투쟁과 한국의 몰락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한국의 국내에서는 분격의 소리가 높았다.
한국에서는.... 의병 투쟁이 전국에서 고양되었다.
일본 정부는 1910년 한국 정부에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한국 병합).
5.3.3 관둥저우와 만철
포츠머스 조약의 규정에 근거하여 일본 정부는 1906년에 남만주철도....
랴오둥 반도의 일본 조차지인 관둥저우에는...
<심화학습>
*군인 칙유(軍人勅諭)와 군대...
*교육 칙어(敎育勅語)와 학교 ;- 1890년 <교육에 관한 칙어>가 발포되었다. 교육 칙어는 충효의 길이 '국체의 정화(精華)'이고 교육의 연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후 교육 칙어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 되었고, 국경일 등의 식전에서 낭독되면서 <기미가요> 등의 노래와 어우러져 어릴 때부터 천황을 숭상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 일조하였다.
<인물 및 주용용어>
근대 천황제와 국가체제, 8개국 연합군, 총력전과 무기의 발달,
러.일 전쟁으로 인한 증세, 전쟁과 징발, 계엄령의 발포,
충혼비(忠魂碑), 러.일 전쟁 후의 군비 확장, 대역 사건(大逆事件),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 지멘스(Siemens) 사건,
재정 고문 메가타 주타로(目賀田種太郞), 한국 병합.
제6장 일본의 자본주의와 근대 문화
<시대개관>
메이지 시대 초부터 부국 강병과 서구화를 지향한 일본은, 정부의 보호 아래 서양의 자본주의 도입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초기의 인플레이션과 물가의 급등을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긴축 재정정책으로 수습하고, 증세와 정부 사업의 처분을 통해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일본의 중앙 은행인 일본은행이 만들어지고 은본위 화폐 제도가 확립된 것도 이 때였다.
하지만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긴축 정책으로 농민층은 분해되었고, 농촌을 떠난 농민이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자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강행되었고, 자본주의 발달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도 형성되었다.
그밖에 교통 부문에서는 철도의 발달이 눈에 띄었다.
1889년 관영 철도로 일본의 중심선인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을 개통하였고, 민간에 의한 사철도 발달하여 1889년에는 민영이 관영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경공업이 방적업을 중심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고, 청.일 전쟁 후에는 뒤처진 중공업을 일으키기 위하여 관영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에 실업과 저임금, 환경의 오염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났다.
아시오 동산(足尾銅山)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편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과 함께 서구 문화도 일본에 들어와, 메이지 시대는 독특한 메이지 문화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일본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각 분야에 걸쳐서 급속히 서양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서구 문화에 대한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이해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근대 문화의 특질로서 과학적 정신의 중요성이 높아졌고, 동시에 학문. 예술 등이 정치. 도덕. 종교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서양 문화에 대한 반발로 국수주의적인 일본주의가 강하게 제기된 것도 메이지 문화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학습목표>
1.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재정이 초래한 결과.
2. 값싼 노동력의 형성 과정.
3. 자본주의의 발달로 나타난 사회 문제.
4. 일본에 유입된 근대 사상.
6.1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
6.1.1 마쓰카타 재정
관세 자주권이 없는 일본은 수입을 억제할 수 없어서 정화(正貨)의 유출이 계속된 한편, 사족 반란에 전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정부가 불환 지폐를 남발하였기 때문에 통화가 팽창하고 물가가 폭등하였다.
1882년 마쓰카타 마사요시 오쿠라경(大藏卿)은 중앙 은행인 일본은행을 창설하고, 지폐발행을 통일하고, 1885년에 사실상 은본위제에 의한 정화 태환제(正貨兌換制)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국립 은행은 영업 허가 연수가 줄어든 후에 보통 은행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심각한 불황이 일어났다(마쓰카타 디플레).
농촌에서는 면화 등 상품 작물이 수입에 눌려 쇠퇴하였다.
불황과 과중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농민 중에는 빚에 쫓겨 몰락하고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6.1.2 산업 혁명의 진행
1882년 최초의 대규모 면사 방적 공장인 오사카방적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 대규모 방적 공장이 줄이어 건설되고, 1890년에 면사의 생산량이 수입량을 추월하였다.
방적업은 일본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농촌이나 지방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던 제사업에도 증기 기관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계 제사가 퍼져서 근대 산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는 군사적 측면에서 중시되어, 1889년에 개통한 관영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을 포함하여 1901년에 아오모리(靑森)에서 나가사키(長崎)까지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정부는 청.일 전쟁에서 얻은 배상금 등 은(銀) 약 3억 6,000만 엔을 금으로 바꾸어 태환을 준비하고, 1897년에 금본위제를 실시하였다.
금본위제의 채용으로 이미 금본위제를 채용하고 있는 구미 제국과의 경제적 교역에서도 같은 토대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배상금의 대부분은 대러시아 전쟁에 대비하여 군함 제조 등 군비 확장에 사용하였고, 포병 공창(砲兵工廠) 등의 확장과 관영 야하타(八幡) 제철소의 설립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청.일 전쟁 후에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공업의 동력이 인력에서 증기기관으로, 작업도 손작업에서 기계 작업으로 바뀌어 기계제 공업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공장에 의한 대량 생산을 통하여 산업 자본이 성립하였고 자본가 계층이 생겨났다. 한편 기계를 사용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도 생겨났다.
6.1.3 기생 지주제와 사회 문제
수입에 눌려서 상품 작물의 재배가 줄고, 공업에 눌려서 농가의 부업으로 생기는 현금 수입의 기회가 줄어들자, 토지를 포기하는 농민이 늘고 소작농이 증가하였으며, 지주로의 토지 집중이 더욱 진행되었다.
지주는 농촌의 지배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이익을 농업 이외에 투자하는 등, 1900년 전후에 이르러 기생 지주제(奇生地主制)가 확립되었다.
기생 지주제와 함께 빈곤한 소작농이나 영세한 자작농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점하였지만, 이들 농가의 여자는 남자 공원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방적 공장이나 제사 공장에 취직하여 가계를 도왔다.
교육의 보급과 함께 근대적인 기계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출현하고,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심화하여 자신의 손으로 노동자의 생활을 지키고 지위의 향상을 꾀하는 노동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노동 운동을 체험한 다카노 후사타로(高野房太郞),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은 1897년에 노동조합기성회를 결성하였고, 그들의 지도로 철공 조합이 결성되었다.
1898년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등은 사회주의 연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1901년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6.1.4 재벌의 형성
러.일 전쟁 후의 일본 자본주의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기계 공업에서는 조선업이 조선 기술에서 세계 수준에 달했고, '기계를 만드는 기계'인 공작 기계의 생산도 늘어났다.
경공업에서는 여전히 섬유 산업이 중심이어서 총공업 생산액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10년에 52%였다.
나아가 제조업. 포경업. 화학 비료 공업 등에서는 트러스트가 성립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생산과 자본의 집중을 증가시킨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는 지주 회사를 중심으로 금융. 산업. 상업 거래를 통일적으로 지배한, 콘체른 형태를 갖추어, 1910년대 이후 재벌이라고 불리면서 일본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6.1.5 발전소와 화학 공업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5년, 후쿠시마(福島)현의 이나와시로(猪苗代) 발전소에서 도쿄까지 세계 제3위의 초고압 장거리 송전이 성공하였다.
전쟁으로 화학 제품의 수입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화학 비료와 소다. 염료. 화약 등의 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한 화학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6.2 구미 문화와 전통 문화
6.2.1 근대 사상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와 함께 구미의 철학. 문학. 법학. 예술. 과학 기술 등이 들어왔다.
6.2.2 근대 문학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나자 서양의 사상과 독립 운동 등을 제목으로 한 정치 소설이 유행하였다.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 등 《문학계(文學界)》 동인은 개인의 절대화와 내면적 사실의 존중을 주장하는 낭만주의 문학 운동 속에서 인간의 정신 활동을 사회나 국가의 제약으로부터 독립시켜 자유로운 인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여 근대 문학의 길을 넓혔다.
러.일 전쟁 후에는 서양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가주의나 가족 제도 중시에 저항하여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묘사하는 자연주의 소설이 나타났다.
6.2.3 미술. 예능. 과학 기술
문명 개화의 풍조는 전통 미술의 가치를 거의 망각하게 하였다.
서양 음악은 궁내성 아악부와 군악대에서 가르치다가 1887년에 도쿄 음악학교가 설치되었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부국 강병과 근대화를 서두른 정부가 적극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는 정책과 어우러져, 메이지 중기가 되면 창조적인 연구성과가 나타났다.
<심화학습>
아시오 동산 오염 사건(足尾銅山鑛毒事件) : 근대 산업의 급격한 발전과 생산을 우선하는 움직임은 공해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도치기(?木)현 아시오(足尾)에 있는 구리 광산은 메이지 초년에 사업가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의 손에 넘어가 구리의 산출량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와타라세(渡良瀨) 강으로 흐르는 광독이 증가하고 매연의 피해로 인한 산림의 황폐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여 강 주변의 전답에 대한 피해가 급속히 커졌다.
정부는 광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패해 농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 과정에서 노출되는 환경 오염 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군비 확장, 죄수 노동, 기능자 양성, 방적 카르텔, 지주 회사,
'철학' 용어의 등장, 서양 학문의 보급, 구메 필화 사건(久米筆禍事件),
일본화(日本畵)의 개혁, 가부키(歌舞伎)의 발전, 소시 시바이(壯士芝居).
제7장 제1차 세계 대전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개관>
러.일 전쟁 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중국 진출을 엿보던 미국의 관심을 외면함으로써 미.일 관계가 냉각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적 태도는 쑨원을 중심으로 신해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엿보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잘 나타난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의 총성이 전 유럽을 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을 때,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에는 갑작스런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긴 일본은 영국조차 원치 않았던 전면 참전을 독일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와 조차지를 별 저항없이 접수하여,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많은 섬들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이 중국에 강요한 21개조 요구였다.
정부. 군부. 재계의 요구가 모두 포함되어 있던 21개조 요구는 중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지만, 일본의 위협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는 그것을 수용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과 민족적 자각이 높아진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결국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자, 한국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고 곧 이어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대한 아시아 민족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일본이 차지한 대부분의 권익들은 그대로 인정되었고, 워싱턴 회의에서도 일본은 당당하게 세계 5대 강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20년 전반 일본은 워싱턴 체제하에서 협조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평화로운 국제 질서 유지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국내에서는 정당들의 호헌 운동을 통하여 정당 내각이 성립하였고, 1925년 보통선거법이 만들어져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것은 비정당 세력에 대한 정당 세력의 승리였다.
<학습목표>
1. 호헌 운동.
2. 제1차 세계 대전에 일본이 참전한 과정.
3. 전쟁 중 일본이 중국에 요구한 내용.
4.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어난 한국과 중국의 항일 운동의 특징.
7.1 일본과 제1차 세계 대전
7.1.1 일본의 참전
호헌 운동을 전후로 도쿄제국대학 교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와 우에스키 신키치(上杉愼吉) 교수 사이에 천황 기관설(天皇機關說) 논쟁이 전개되어,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주권은 국가에 있다고 하는 미노베 다쓰키치의 주장이 우위를 점하였다.
20세기 초엽 유럽에서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 의한 삼국 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의한 삼국 동맹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 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오쿠마 시게노부(大외重信)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유럽의 대란은 일본 국운의 발전에 ... 천우 신조로 삼아 ... 하늘이 준 기회를 받아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국내에서 비등하고 있던 '폐감세(廢減稅) 등의 정쟁'을 중지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하고 동양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확립하고, 이것을 배경으로 중국 정부를 회유한다. 그야말로 국내외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천재 일우'의 기회다"라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아시아에서의 독일 무장 상선의 수색에 한정해서 일본에 참전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목적을 한정치 않고 전면 참전한다고 전하였다.
영국이 참전 의뢰를 취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8월 23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독일의 세력권인 중국의 자오저우만(규州灣). 산둥 반도를 공격하고, 그 근거지인 칭다오(靑島)를 점령하였으며,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제도를 접수하였다.
7.1.2 대중국 21개조 요구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孫文) 등이 지도하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신해 혁명(辛亥革命)을 일으켜, 다음 해 2월에 청조(靑朝)를 멸망시키고 쑨원을 임시 대총령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난징(南京)에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후 북방 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혁명파를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1915년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 세력이 빠져나간 힘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갑자기 21개조 요구를 들이대었다.
이 요구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머물지 않고 중국의 주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1916년에 제4차 러.일 협약을 맺어 중국이 다른 열강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도록 하였다.
1917년에 일본은 미국의 대독일 참전을 계기로 이시이(石井).랜싱 협정을 맺어 중국에서의 권익을 확보하였다.
*대중국 21개조 요구(5항 21조)
1항 (4개조) : 산둥 문제 / 독일 이권의 처분.
2호 (7개조) : 만주 문제(일본이 가장 중시한 문제)
..............뤼순, 다렌, 만철의 조차 기간을 1999년으로 연장.
7.2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
7.2.1 파리 강화 회의
1918년 11월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다음 해 파리에서 열린 강화 회의에서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국의 일원이 되어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전권 수석으로 하여 파견하였다.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제도의 위임 통치권을 획득하고 산둥성에 있던 독일의 권익을 계승하였다.
강화 회의의 결과 독일에는 식민지 등의 포기와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터키 4개 제국이 해체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평화를 위한 14개조의 원칙에 포함된 민족 자결의 원칙에 근거하여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 동유럽에 많은 독립국이 탄생하였다.
나아가 평화 유지의 국제적 기구로서 국제 연맹(國際聯盟)이 창설되었다.
7.2.2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은 대규모 토지 조사 사업으로 국유지가 증가하는 한편 많은 조선인 농민은 토지를 상실하였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민족 자결의 움직임, 쌀 소동으로 인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붕괴와 같은 정세 속에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집회가 열리자,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은 곧바로 조선 전역에 파급되었다(3.1 독립 운동).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시작되자 중국에서는 학생과 산둥성의 민중이 중심이 되어 독일 이권의 중국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5월 4일 베이징의 학생은 천안문(天安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산둥 반도의 반환', '강화 조약 조인 거부' 등의 슬러건을 내걸고 외국 공사관과 21개조 조약에 조인한 정부의 고관 집을 덮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항의 운동이 고조되었다.
7.2.3 워싱턴 회의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은 미국. 영국에 대한 대항으로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비 확장정책을 취하고 군사비가 국가 예산의 50%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는 주력함의 보유 비율을 미국.영국 5, 일본 3, 프랑스.이탈리아 1.67로 제한하는 해군 군축 조약을 맺었다.
이 밖에 태평양의 영토에 관한 각국의 원칙을 존중할 것을 약속한 4개국 조약, 중국의 주권.독립과 그 영토 보존의 존중, 문호 개방.기회 균등의 원칙을 승인한 9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워싱턴 회의에 따라 일본은 산둥 반도의 권리를 크게 제한 당하고 중국에서의 일본의 독주를 바라지 않는 영국.미국과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워싱턴 체제라고 불리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형성되어 베르사이유 체제와 함께 열강의 협조체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체제와 협조 외교에 반발하는 세력도 이 시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7.3 정당 정치의 출현
7.3.1 쌀 소동과 정당 내각
도야마(富山)만을 둘러싸고 있는 우오즈(魚津)촌 등의 마을에서는 1918년 7월 하순부터 어촌의 부녀자들이 쌀값의 폭등으로 곤궁해지자 이장. 지주. 미곡상 등의 집으로 몰려가 도야마 평야에서 거둔 쌀의 반출 정지와 염가 판매를 요구하였다.
이것을 〈오사카아사히(大坂朝日) 신문〉(8월 5일)이 보도한 것이 전국적인 쌀 소동의 발단이었다.
쌀값의 폭등은 전국으로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상인의 투매와 지주의 매석과 함께 정부의 시베리아 출병 결정이 투기에 박차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쌀값을 인하시키라는 소동은 전국의 촌락에까지 퍼져, 1도 3부 38현에 걸쳐서 70만 명이 참가하였다.
정부의 대응이 늦어서 운동의 절정인 8월 중순이 되어서야 정부는 쌀의 강제 매수에 나섰고, 쌀의 염매를 시작하였다.
쌀 소동의 책임을 지고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직한 후에 원로들에 의한 차기 수상 선임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결국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 총재인 하라 다카시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승인하여 1918년 9월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인 하라다카시 내각이 성립하였다.
하라 내각은 고등 전문학교의 증설, 지방 선로를 중심으로 한 철도의 확장, 국방의 충실 등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을 정우회의 당세 확장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권 정치라는 폐해가 생겨났다.
7.3.2 보선 운동의 고양
쌀 소동을 계기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운동은 1919년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등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민중 운동으로 고양되었다.
이를 보선 운동(普選運動)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하라 내각은 선거인 자격을 직접 국세 3엔으로 인하하고, 소선구제로 고쳤으며, 여당의 안정적 다수를 확보하는 선거법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7.3.3 제2차 호헌 운동
1624년 1월 추밀원 의장인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가 귀족원에 기초를 둔 내각을 만들었다.
그러자 헌정회. 혁신 구락부. 정우회 주류파는 특권 내각 반대, 헌정 옹호, 보통선거 실현을 주장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을 일으켜 호헌 3파의 연합이 성립하였다.
호헌 3파는 정당 정치의 수립과 보통선거의 실현 등을 공약으로 하여 선거전을 치러 464 의석 중에서 284 의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헌정회 총재인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하고 정우회 총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혁신 구락부 당수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殼)가 입각하는 호헌삼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가토 내각은 1925년 3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심적 요구인 이른바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 법은 납세액에 의한 자격 제한을 철폐하고, 25세 이상의 남자에게 선거권을, 30세 이상의 남자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7.3.4 사회 운동과 여성 운동
쌀 소동 후에는 사회 운동이 현저하게 성장하였다.
농민 운동에서는 소작료의 경감과 경작권의 확보를 요구하는 소작 쟁의가 격증하여, 1922년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 등은 최초의 전국적 농민 조직인 일본농민조합(일농日農)을 결성하였다.
또 피차별민의 해방 운동도 각지에서 고양되어, 같은 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을 요구하면서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를 결성하였다.
여성 운동은 이미 1911년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등이 세이토샤(靑 社)를 결성하여 기관지 《세이토(靑 )》를 발행하고 여성 해방을 호소하였다.
1920년 히라쓰카 라이초,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등은 신부인협회(新婦人協會)를 조직하여 여성 참정권 획득 운동을 추진하였다.
또 사회주의 입장에서 야마카와 기쿠에(山川菊榮) 등은 1921년 적란회(赤瀾會)를 결성하였다.
7.4 다이쇼기의 문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정부는 1918년 대학령(大學令). 고등학교령(高等學校令)을 제정하여 고등 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였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 도쿄제국대학 부속 지진연구소 등을 설치하였다.
교육면에서는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의 글짓기 운동,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동요(童謠) 운동이나 시나노 자유 교육 운동(信濃自由敎育運動) 등 아이들의 개성을 키우는 자유 교육이 전개되었다.
7.4.2 근대 문학의 조류
인텔리층의 형성으로 개성과 자아의 확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모리 오가이(三鷗外)가 활약을 계속하는 한편, 잡지는 《시라카바(白樺)》를 중심으로 한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등의 시라카바파는 인도주의. 이상주의를 호소하고, 잡지 《스바루(スバル)》에서 활동한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등 탐미파는 개성적 미의 세계를 전개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의 입장에 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성행하여, 《씨뿌리는 사람》, 《문예전선》 등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전개되었다.
7.4.3 미술. 음악. 연극과 생활의 변화
미술계에서는 문부성 미술 전람회(文展)에 대항해서 이과회(二科會)가 결성되고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 등이 서양화단의 주축이 되었다.
음악에서는 미우라 다마키(三浦環)가 오페라에서 활약하고, 야마다 고사쿠(山田耕ㅁ)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극에서는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 마쓰이 스마코(松井須磨子)를 중심으로 예술좌(藝術座)가 생겨나,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 하지카타 요시(土方與志) 등이 도쿄에서 쓰키지(築地) 소극장을 창립하였다.
산업의 발달은 도시 생활자를 증가시켰다.
도시에서는 빌딩과 백화점이 생겨나고, 도시 생활자의 의식주에는 서양식이 수용되었다.
농촌은 커다란 변화는 없었지만, 청년단을 중심으로 도시의 자유스런 분위기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폐감세법안(廢減稅法案),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이시이. 랜싱 협약,
3.1 독립 운동, 일본의 군비, 쌀 폭동, 치안 유지법, 헌정의 상도(常道),
천정보 지주(千町步地主), 여성 참정권 획득 운동, 자유주의 교육,
모리토(森戶) 사건, 엔폰(円本).
치안 유지법:- 국체의 변혁과 사유 재산 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의 조직자. 가입자. 자금 제공자 등에게 최고형으로서 징역 10년에 형벌을 과하도록 하고 있다.
제8장 군부의 등장과 대륙 침략
<시대개관>
1920년 전반 일본은 워싱턴 체제하에서 협조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평화로운 국제 질서 유지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국내에서는 정당 정치가 꽃필 수 있었다.
호헌 운동을 통하여 정당 내각이 성립한 후 1932년까지 중의원에서 세력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내각을 구성하는 관행이 이루어졌으나, 선거권의 확대로 선거 자금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당 정치는 재벌과 유착하는 금권 정치로 변질되어 갔다.
이것이 정당에 대한 불신을 더욱 조장시켰다.
한편 일본의 대외 정책도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이 개시되었을 때 일본이 산둥에 세 번이나 출병하여 중국의 통일을 방해한 일이나 간토군의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은 협조 외교의 틀을 깨트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 성향이 강한 여론과 군부는 1930년 런던의 해군 군축 회담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1931년 만주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까지 만주에 대한 지배를 고집하여 워싱턴 체제를 붕괴시켰고, 국내에서는 국가주의적 권력 단체의 주도로 정당 정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적 성향이 높아 가는 가운데 과격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이이륙) 사건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가속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학습목표>
1. 중국과 일본의 정세를 배경으로 한 산둥 출병.
2. 만주 사변의 발단과 만주국의 정체.
3. 일본 군부의 성격과 2.26 사건의 관련성.
4. 일본의 외교 방침의 전환과 국내 정치 정세 변화의 연관성.
8.1 워싱턴 체제의 동요
8.1.1 간토 대지진과 금융 공황
1923년 9월 1일 간토(關東) 대지진이 일어났다.
게이힌(京濱) 지방은 파괴되고, 지진과 화재의 대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민족적 편견에 가득 찬 유언 비어가 퍼져, 군대. 경찰과 민중이 약 6,700명의 조선인과 약 700명의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전후 공황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 경제는 이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8.1.2 시데하라 외교와 중국
호헌 삼파 내각 이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외무대신에 취임하여 워싱턴 체제를 중시하고 구미와의 협조를 지키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경제 진출에 중점을 두는 외교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시데하라 외교).
시데하라 외교를 군부. 재계. 정우회는 '연약 외교(軟弱外交)'라고 비판하였다.
8.1.3 다나카 내각과 산둥 출병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다음에는 정우회(政友會)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조각하여 3주간의 모라토리엄(지불 유예령)과 일본은행으로부터 22억엔의 비상 대출을 받아 금융 공황을 수습하였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에 대해서는 적극 정책들 취하여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간섭하고 권익 확보와 일본인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1927년 산둥 반도에 출병하였다(산둥 출병).
지난(濟南)에서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충돌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지난 사건).
같은 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도쿄에서 군부. 외무성. 오쿠라쇼(대장성) 등의 간부를 모아서 동방회의(東方會議)를 열고, "만몽(滿蒙)을 일본인의 안주의 땅으로 삼을 것, 이 지방의 특수한 지위와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 행사도 불사한다"고 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만몽을 지배하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이용하려고 북벌군과 대립하는 장쭤린을 펑톈(奉天)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관둥군(關東軍)이 장쭤린을 폭살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만주에서 반일 운동을 한층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2 만주 사변과 '만주국'
8.2.1 런던 해군 군축 회의
정부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1만 톤 이하 보조함의 제한을 둘러싸고 해군 군령부(海軍軍令部)의 주장을 누르고 조약에 조인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군부. 민간 우익. 정우회는 정부에 의한 병력의 결정은 천황의 퉁수권을 침범한 것이라고 공격하자, 추밀원. 귀족원의 일부도 동조하였다(통수권 간범 문제統帥權干犯問題).
그러나 정부는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와 여론의 지지를 얻어 조약을 비준하였다.
8.2.2 세계 대공황
1929년 10월에 미국에서 시작한 세계 대공황은 영.미 양국의 경기를 침체시켜, 생사. 견제품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영.미 및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을 격감시켰다(쇼와 공황昭和恐慌).
8.2.3 만주 사변
만주에서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국권 회복 운동이 일어나, 만철 병행선(滿鐵竝行線)의 건설 등 만철의 독점적 경영에 대한 반발이 강화되었다.
한편 만철은 세계 공황의 영향을 받아서 경영이 악화되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는 만주에서의 이러한 동향에 위기감을 갖고 '만몽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18일 밤, 간토군(關東軍)은 펑톈(奉天) 교외에서 만철 노선을 폭파시키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장쉐량(張學良)군을 공격하여 다음 날에는 펑톈성을 점령하였다(유조호 사건柳條湖事件).
간토군은 계획적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개전 반년 후에는 만주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였다(만주 사변).
이렇게 해서 일본과 중국의 15년에 걸친 전쟁(15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8.3 군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
8.3.1 파시즘의 등장
1931년 군인과 민간 우익에 의한 군부 정권 수립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3월 사건. 10월 사건).
다음 해인 1932년에는 급진적 우익인 혈맹단원(血盟團員)에게 전 오쿠라(大藏)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고메이(三井合命) 회사 이사장 단 다쿠마(團琢磨)가 암살되었다(혈맹단 사건 血盟團事件).
더욱이 같은 해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수상 관저 등을 습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大養殼) 수상을 암살하였다(5.15 사건).
이것은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국가 개조를 꾀하는 파시즘 운동이었다.
국제 연맹 탈퇴 후 육군 내에서는 국가 총력전 체제의 수립을 지향하는 통제파(統制派)가 군부의 중추를 차지하자, 천황의 친정(親政)을 외치는 과격한 황도파(皇道派)의 청년 장교는 위기감을 느끼고 1936년 2월 26일 약 1,400명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오쿠라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 등을 살해하고 4일간이나 수상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관저와 의사당 등을 점거하였다(2.26 사건).
반란 진압 후 군부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現役武官제)를 부활시켰다.
또 독.일 방공 협정(獨日防共協定)을 체결하게 하고, 엄청난 군비 확장비를 요구하여 정치 체제의 군국주의화를 결정적인 것으로 하였다.
8.3.2 중.일 전쟁의 발발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盧構橋) 부근에서 중.일 양군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루거우차오 사건).
더욱이 8월에는 샹하이에서도 중.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였다.
9월에 중국에서 제2차 국공 합작이 정식으로 성립하자 일본은 선전 포고도 하지 않은 채 전면 전쟁에 돌입하였다(중.일 전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 전쟁을 북지 사변 또는 지나 사변이라고 하여 대내외적으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려고 하였다.
8.3.3 난징 대학살과 전쟁 경제
1937년 12월 일본군은 국민 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그 후 수 주간에 걸쳐서 일본군은 난징시 내외에서 포로. 투항병을 비롯하여 부녀자를 포함한 중국인 30만 명을 살해하고 침략. 방화와 부녀자 폭행을 자행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국내에는 일체 알려지지 않았고, 구미에서 〈뉴욕 타임스〉지가 "포로 전원이 죽임을 당하다"라고 보도하여 국제적인 비난이 비등하였다(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이 확대되자 군수품의 발주를 받은 재벌은 급성장을 하였으나, 재정 지출은 격증하고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국민 생활은 어려워졌다.
<인물 및 주요용어>
간토 대지진, 국공 합작(國共合作),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
금본위제(金本位制), 런던 해군 군축 회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헌법 해석, 시안 사건(西安事件),
난징 대학살(南京大虐殺).
제9장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패망
<시대개관>
1930년대 중반은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독재체제를 굳혀 가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정당 정치가 종식되고 군부를 중심으로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1936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삼아 방공 협정을 맺어 이른바 추축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워싱턴 체제와 베르사이유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세계정세를 배경으로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중.일 전쟁은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국공 합작을 이룬 중국의 저항이 예상보다 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국가 총동원법을 만들고 이어서 국민징병령도 실시하여 전시 총동원 체제로 돌입하였지만 중국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만 극도로 악화되어 미.일 통상 조약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밖으로부터의 자원 조달이 어려워진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대정익찬회를 만들어 일국 일당 체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마지막 선택은 1941년 12월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과의 전쟁은 초반에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에 이어, 8월에는 일본도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로써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학습목표>
1. 파시즘 체제가 확립된 과정.
2. 국가 총동원 체제하의 생활.
3.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당시 일본의 외교 전략.
4.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질 무렵 이루어진 국제 회의.
9.1 파시즘 체제의 확립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전후로 재중국 독일 대사에 의한 평화공작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군부의 강경론에 밀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수상은 1938년 1월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 정부와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 차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의 우한(武漢). 광둥(廣東) 작전으로 중국의 중요 도시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근위 사단 1개만 남겨 두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한계에 이르렀다.
중국 전선에서의 타개책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소련도 가상 적국으로 설정하고 1938년 만주. 소련 국경의 장고봉(張鼓峰)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하였다(장고봉 사건).
또 다음 해 5월에는 만주. 몽고 국경의 노몽한에서 소련군. 몽고군과 간토군이 충돌하여 대패를 당하였다(노몽한 사건).
노몽한 사건의 절정인 8월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9월 3일에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9.1.2 독.이.일 삼국의 군사 동맹과 남진론
1940년 4월 이후의 독일의 군사적 성공을 보고 국내에서는 일.독(日獨) 동맹론이 일어났다.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崗洋右)는 같은 해 9월 독.이.일 삼국 군사 동맹(獨伊日三國軍事同盟)을 베를린에서 조인하였다.
또 동남아시아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식민지 종주국이 독일에 패전한 사실을 배경으로 일본에서는 중.일 전쟁을 타개하기 위한 '원장(援蔣) 루트' 차단과 석유. 철광석. 고무 등의 전략 물자를 획득하자고 하는 '남진론(남진론)'이 나왔다.
9.1.3 파시즘 체제의 확립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고노에 측근의 그룹. 군부. 정당 등 저마다 다른 의도 속에서 '일국 일당'적인 신정당의 수립을 지향하는 신체제 운동을 추진하였다.
기성 정당이 잇달아 해산한 후, 1940년 10월에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결성하여 이를 정점으로 하는 국민 통제 조직을 완성함으로써 익찬 체제를 중핵으로 한 일본형 파시즘 체제를 확립하였다.
대정익찬회는 수상을 총재로 하였는데, 이후에는 도부현 지사를 지부장으로 하고 그 아래에 이제까지의 정내회(町內會). 부락회(部落會) 나아가 도나리구미(隣組)를 갖춘 관료적 조직이 되었다.
9.2 전시하의 학문과 생활
9.2.1 1930년대의 학문과 교육
일본의 사회과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도입됨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다.
중.일 전쟁이 시작하자 학문. 교육. 사상에 대한 통제는 한층 강화되었다.
1937년 문부성은 《국체의 본의(國體の本義)》를 작성하여 국체의 존엄을 강조하였다.
《국체의 본의》에서는 만세 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은 신의 나라라고 하여 천황 중심의 황국 사관을 강요하고 있다.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이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바뀌었다.
국민학교는 천황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의 육성을 목표로 국민과. 체련과(體鍊科) 등의 교과목이 강조되었다.
9.2.2 문화계의 움직임
전쟁이 시작되자 내일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났다.
허무주의적인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순간적인 삶이 유행하고, 카페. 댄스홀 등이 성행하였다.
9.2.3 생활의 약화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소비 물자는 점점 부족해져서 밥 한가운데에 매실 장아찌 1개만을 반찬으로 한 '히노마루 도시락'이 권장되었다.
패전 당시에 병사로 소집된 자는 약 720만 명이었고, 국민징병령으로 징용된 노동자와 중학생 이상의 학생, 그리고 미혼 여성, 조선인 등은 패전 당시 약 600만 명에 달하였다.
군사비의 증대와 공채의 남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국민 생활은 압박을 받아 국민의 전의는 떨어지고 염전(厭戰)의 기분이 퍼졌다.
9.3 일본의 패망
9.3.1 태평양 전쟁의 발발
제2차 고노에 내각은 남진 정책과 삼국 군사 동맹에 의해 악화된 미.일 관계를 타개하기 위하여 1941년 4월부터 워싱턴에서 미.일 교섭을 개시하였다.
9월 6일 어전 회의에서는 미.일 교섭을 계속 시도하는 한편, 10월 하순까지 대미.영 전쟁의 준비를 완료하기로 하고 대미.영 전쟁의 개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였다.
10월에 고노에 수상은 미.일 교섭 타결의 중요한 조건인 중국 본토로부터의 철병에 반대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육상과 대립하여 사직하였다.
뒤이어 성립한 도조 내각은 11월 5일의 어전 회의에서 최종적인 미.일 교섭안을 결정하였지만, 이것은 미국이 주장하는 국무장관의 각서(헐 Hull 노트)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어서 미.일 관계는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개전으로 돌입하여, 육군은 영국의 식민지인 말레이시아 반도 북부의 코타발 지역에 기습 상륙하고, 해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의 함선을 모두 침몰시켰다.
그 날 일본 정부는 미국. 영국에 선전을 포고하고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였다.
9.3.2 오키나와 전투와 본토 공습
1942년 6월 일본 해군은, 태평양을 완전히 제압하고 미군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한편 독.소 전쟁에서는 1943년 2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퇴하자 소련군은 반격을 개시하였다.
같은 해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은 1945년 5월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 때, 1943년에 미국. 영국. 중국의 연합국 수뇌는 전쟁 종결 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대일 선언(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1944년 11월 이후 마리아나 제도로부터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 공습을 개시하여 대도시. 공업 지대를 집중적으로 폭격하였다.
1945년 3월 하순, 약 55만의 미군이 오키나와 공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군은 겨우 9만 6,000명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섬의 일반인을 소집하여 지구전을 전개하였다.
현의 주민은 3개월에 걸친 '철의 폭풍'이라고 하는 격렬한 전투에 휩쓸려 들어갔다.
오키나와전은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유일한 지상전이었다.
오키나와에서 12만 명을 넘는 현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 희생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6월 말에 수비군은 거의 괴멸당하고 오키나와 섬은 미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9.3.3 패전
1945년 2월 미국. 소련. 영국의 연합국 수뇌는 얄타 회담을 열고 비밀 협정으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독일 항복 후인 7월 미국. 영국. 중국은 3국 동맹으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고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소련을 통해서 종전 공작을 획책하고 있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내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은 8일 선전 포고를 하고 9일에는 만주. 조선으로 침입하여 간토군을 괴멸시켰다.
이 날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천황제 유지의 확증을 둘러싸고 패전의 결단을 늦추고 있던 일본 정부. 군부도 8월 14일 무조건 항복하고 15일 정오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라는 이례적인 수단으로 패전을 국민에게 알렸다.
1931년부터 15년에 걸친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와 붕괴로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이 입은 참화는 정말 심대한 것으로 사망자는 약 2,000만 명을 넘었는데, 그것은 일본인의 사망자 수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적. 물적 피해도 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인물 및 주용용어>
일본군의 만행, 반전 운동, 식량 배급, 염전(厭戰)의 기운,
소.일 중립 조약(蘇日中立條約), 간토군 특종 연습(관특연),
미.일 교섭, 헐 노트(Hull Note), 태평양 전쟁, 카이로 선언,
일본 본토 공습, 오키나와 전투, 포츠담 선언, 강제 연행, 전쟁의 피해.
제10장 점령기의 개혁과 냉전 세계
<시대개관>
일본은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연합군의 일본 지배는 연합국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인 GHQ가 담당하였다.
그 최고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초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점령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그것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일본인 내각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
GHQ의 점령 정책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에 있었다.
따라서 육해군의 해체, 전범의 체포, 천황제 비판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사상 경찰의 폐지 등 과감한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천황의 인간 선언은 당시의 민주화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경제에 있어서도 군사 산업과 재벌에 규제가 가해졌고 독과점금지법 등이 만들어졌다.
또 농지 개혁이 추진되어 기생 지주가 사라졌다.
이 헌법은 전쟁 포기 조항이 들어 있어 평화 헌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전 분야에 걸쳐 GHQ의 개혁이 단행되었지만 모든 개혁 정책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후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거세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냉전 체제가 시작되자 일본의 역할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즉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방파제로서의 역할이 일본에 부여되었다.
이제는 일본의 경제 재건과 재무장이 무엇보다 우선되었다.
이처럼 점령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 일본을 전쟁으로 이끌었던 정치가들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정치는 갑자기 보수화되었고, GHQ의 민주화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자위대라는 군대를 보유하면서 경제를 희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학습목표>
1. GHQ의 성격.
2. 패전 후 민주적 개혁의 내용.
3. 도쿄 군사 재판의 진행 상황.
4. 냉전 체제와 6.25 사변의 관련성.
5. 미.일 안보 조약의 성격.
10.1 점령하의 개혁
10.1. 동서 대립 속의 일본 점령
포츠담 선언 후에 성립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ㅁㅁ彦) 내각은 1억인 총참회,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치며 지도자의 전쟁 책임을 묻지도 않고 종례의 정치 체제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 독일과 싸운 연합국 50여 국가는 1945년 6월 국제 연합 헌장에 조인하고 28개국의 비준을 얻어 10월에 국제 연합을 탄생시켰다.
9월 2일에 항복 문서의 조인이 있었고, 10월 2일 연합국군 사령관 총사령부(GHQ)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미국의 직접적인 군정을 받게 된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일본의 정부 기구를 이용한 간접 통치의 형태로 점령 정치가 시작되었다.
10.1.2 초기 점령 정치와 민주적 개혁
1945년 9월 27일 쇼와(昭和) 천황은 맥아더를 방문하였다.
천황은 왜 맥아더를 방문하였고 그것은 점령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초기 점령 정치의 기본 방침은 포츠담 선언에 근거해야 한다고 명기한 미국 통합참모본부지령 등에 나타나 있다.
이것에 근거하여 1945년 10월 GHQ는 치안유지법 폐지 등 인권 지령(人權指令)에 이어서, 여성 해방, 노동조합의 육성, 교육의 민주화, 압제적인 사법.경찰 제도의 폐지,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5대 개혁 지령을 발표하였다.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은 인권 지령의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총사직하고,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내각으로 바뀌었다.
또 1945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주요 전쟁 범죄인(A급 전범) 용의자를 체포하고, 다음 해인 1946년 5월부터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서 천황을 제소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부터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이 급속하게 일어나, 1946년에는 전일본 산업별 노동조합회의(산별).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 일본농민조합 등 전국 조직이 결성되었다.
또 각 정당의 활동도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GHQ의 농지 개혁 지령에 의하여 농지조정법이 성립하였지만(제1차 농지 개혁), GHQ는 보다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1946년 10월 자작농창설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제2차 농지 개혁).
10.2 일본국 헌법과 냉전 체제
10.2.1 패전과 국민
1945년 12월 실시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비탄과 충격 속에서도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안도감이 번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식량난과 인플레이션은 가차없이 국민을 덮쳤다.
이런 가운데 1946년에 새 헌법 초안이 공표되었는데, 국민의 70%가 전쟁 포기 조항을 지지하였다.
10.2.2 헌법과 교육 개혁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1946년 2월 종래의 천황 대권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헌법 개정 요강을 GHQ에 제출하였지만, 맥아더는 독자적인 헌법안의 기초를 서둘러 그것을 정부에 보이고 수락을 설득하였다.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GHQ 안을 토대로 제국 헌법 개정 초안 요강을 결정하고 3월에 발표하였다.
제국 의회의 심의를 거쳐 일본국 헌법이 가결.성립하였고, 11월 3일 공포하여 다음 해인 1947년 5월 3일부터 시행되었다.
심의 과정에서 국민 주권을 명확히 할 것과 생존권 규정이 추가되는 등의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새 헌법은 국민주의, 전쟁포기,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대원칙으로 삼고, 국회를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천황은 통치권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살아남았다.
1945년 10월 이후 GHQ는 교육 칙어(敎育勅語)에 근거한 교육을 금지하는 지령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또 1947년에 신민법이 제정되어 호주권과 가독상속권(家督相續權)을 축으로 한 종래의 가족 제도는 폐지되었다.
1947년에는 노동기준법이 제정되어 노동 3법이 정비되었다.
10.3 냉전 체제의 전개
10.3.1 점령 정책의 변화
1946년 2월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금융긴급조치령을 발포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을부터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거세졌다.
1947년 2월 1일을 기하여 제네스토(2.1 스트라이크)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GHQ의 지령으로 스트라이크는 중지되었다.
10.3.2 경제와 노동 운동
미국은 일본을 자본주의 진영의 안정된 일원으로 삼기 위하여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8년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은 당시 325개사에 적용되어야 하였지만, 실제로 분할된 것은 11개사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은행은 분할되지 않았다.
1949년 2월에 도지(Joseph Morrell Dodge)가 GHQ의 경제 고문으로서 일본에 와 경제 9원칙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의 수습을 꾀하는 사이에, 같은 해 4월 1달러=360엔의 단일 환율이 설정되었다(도지-라인).
이러한 정책의 결과 일본 경제는 1949년 후반부터 심한 불황에 빠져 중소 기업의 도산, 실업자의 증대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다.
정부는 그 가운데 '행정 정리'. '기업 정비'를 내걸고 관공청 약 26만 명, 민간 기업 약 30만 명이나 되는 대량 해고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국철이나 도시바(東芝) 등의 노동 조합에서는 해고 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0.3.3 일본군의 재군비
1948년 11월 도쿄 재판에서 사망 또는 면소가 된 3명을 제외한 25명 피고 전원에게 유죄의 판결이 내려져 7명의 교수형이 12월 23일에 집행되었다.
그 다음 날 구치 중인 A급 전범 용의자 전원이 석방되어 전쟁 범죄의 추궁은 끝났다.
6.25 사변의 개전 직후인 7월 8일 맥아더는 요시다 시게루 수상에게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의 창설과 해상보안청 정원을 8,000명 증가시키는 것을 인정하는 서한을 보냈다.
한국 전쟁의 개전 직전에 GHQ는 일본 공산당의 전중앙위원의 공직 추방을 지시하고 모든 정치 집회와 데모 행진을 무기한 금지시켰다.
또 1950년 7월 이후 관공청이나 언론 기관. 대기업으로부터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를 추방하는 레드 퍼지(red purge)를 취하였다.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기지가 되어 무기 그 밖의 군수품의 생산. 수리. 수송을 위하여 일본의 공장. 선박. 철도가 최대한 동원되었다.
이러한 특수에 의하여 도지 라인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경제는 단번에 호경기로 바뀌었다.
10.4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
10.4.1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9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의 초청장이 55개국에 보내졌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의 내용은 주로
① 일본의 주권 회복,
② 한국의 독립의 승인,
③ 대만. 펑후(澎湖) 제도. 치시마(千島) 제도. 남사할린의 영토권의 방기
④ 북위 29도 이남의 남서 제도와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미국의 시정권(施政權) 행사의 계속,
⑤ 일본과 연합국에 속한 나라 사이의 협정에 의한 외국 군대 주류의 승인,
⑥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연합국측의 배상 청구권의 방기 등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은 일본의 재군비 제한 조항이 없다는 것과 배상 청구권 방기에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거의 초안 그대로 요시다 시게루 수상 등 일본 전권과 48개국 사이에 조인되었다.
10.4.2 국제 사회로의 복귀
1952년 4월 28일 강화 조약이 발효하여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 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1952년에 경찰예비대를 보안대로 고치고 해상경비대를 신설하였다.
1956년 10월 소.일 공동 선언에 조인하고, 같은 해 12월 일본은 국제 연합의 가입이 인정되었다.
10.4.3 평화 공존의 기운과 평화 운동
6.25 사변의 휴전에 이어서 1954년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10.4.4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1960년 1월 워싱턴에서 새로운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교섭에 들어갔다.
1960년 4월 이후 신안보 조약 반대의 운동은 급속히 높아졌다.
결국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강경한 자세를 바꾸지 않고 6월 23일 비준서가 교환되어 조약은 발효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제1, 2차 농지 개혁, 잔류 고아, 헌법 초안,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
경제 안정 9원칙, 세제 개혁 권고, 시모야마(下山) 사건과
미타카(三鷹) 사건, 6.25 사변과 일본 경제, 경찰의 중앙 집권화,
소.일 공동 선언, 네루의 평화 5원칙,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교섭
제11장 경제 성장과 현대 일본
<시대개관>
1950년대 말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제3세계가 등장함에 따라 세계는 미.소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정치는 보수당인 자민당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일본은 한때 자주 외교를 주장하여 소련과 국교를 맺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과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 발전을 꾀하는 노선을 취하였다.
전국적인 반대 투쟁 속에서 강행된 미국과의 안보 조약 체결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기본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미국과의 협조 체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연평균 10%에 달하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산업 구조도 선진국과 같은 제2,3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구조로 바뀌었다.
물론 무역에 있어서도 1960년대 전반을 제외하고는 계속적으로 무역 흑자를 증가시켜, 1970년대 전반에는 세계 제2위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경제 발전 과정에는 바다. 하천의 오염과 자연 파괴와 같은 공해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한 국민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일본은 주변 국가들과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문제들을 그대로 떠안고 있었다.
한국과도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을 맺어 국교를 재개하였지만, 당시 현안이었던 독도 문제나 전후 보상 문제 등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었다.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하여 일본은 정부 차원의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무반성이 주변 국가와의 미래 지향적 관계를 저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스스로 단죄할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정치 세력이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하겠다.
<학습목표>
1. 일본의 고도 성장.
2. 베트남 전쟁과 일본과의 관계.
3. 일본의 대중 문화의 특징.
4. 전후 오키나와의 문제.
11.1 19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1.1.1 고도 경제 성장
일본 여자 배구팀이 금메달을 딴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고 있던 일본을 세계에 알리는 큰 행사였다.
진무(神武) 경기라고 불리는 1950년대 후반부터 연 10%를 넘는 경제의 고도 성장이 시작되었다.
11.1.2 베트남 전쟁과 일본
일본의 미군 기지는 베트남 전쟁의 후방 기지로서 활용되었다.
이것에 대하여 베트남 반전 운동, 미군의 무기.군용품 수송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키나와의 기지로부터는 미군의 폭격기가 직접 베트남 폭격에 나섰다.
11.2 전후 문화의 발자취
11.2.1 전후 문화의 출발
패전에 따라 학문.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사라져 학문.문화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11.2.2 텔레비죤.만화.주간지
1953년부터 시작된 TV 방송은 거대한 매스컴으로 발전하고 문화의 형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요계에서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등이 활약하였다.
출판물에서는 주간지와 만화가 성행하였다.
1980년대에는 비디오가 보급되었고, 1985년에는 패미콘(Family Computer)이 등장하였다.
11.2.3 문화와 학술의 발전
경제의 발전과 함께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도 진행되었다.
1955년에는 원자력기본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원자력연구소가 발족되었다.
1956년부터 남극 관측을 시작하였고, 1970년에는 일본 최초의 인공 위성 '오스미'를 발사하였다.
이 때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는 1965년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를 비롯하여 노벨상의 수상자가 연이어 나왔다.
<심화학습>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인물 및 주요용어>
탄광의 합리화, IMF 조인 8개국, 배상 협정, 농업 인구의 감소,
공해 문제, 미국의 베트남 참전, 베트남 평화 협정,
한.일 기본 조약, 원자력 기본법.
제1장 개국과 에도 막부의 멸망
<시대개관>
개국 후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외압이 거세지고 안으로는 막부의 권위가 추락하여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유례 없는 동요와 혼란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체제의 말기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본의 많은 지사들은 선조 대대로 지켜 온 쇄국의 국시를 막부가 깨뜨린 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번의 테두리를 뛰쳐나와 구국을 위한 충정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막부의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들의 사상적 토대는 존왕양이론이었다.
혼란기에 오히려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고 있던 천황과는 달리, 점차 궁지에 몰린 막부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른바 공무 합체 운동이었다.
막부는 공무 합체 운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기울어져 가는 대세를 막지는 못하였다.
막부에 저항하는 세력이 막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토막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막부는 대정 봉환을 통해 이름만이라도 남기고자 했으나 결국 반막부 세력에 의해 제거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학습목표>
1. 페리의 출현이 일본에 미친 영향.
2. 존왕양이 운동의 내용과 주체.
3. 공무 합체 운동이 일어난 과정.
4. 토막 운동과 존왕양이 운동의 차이.
5. 유신 세력이 대정 봉환을 거부한 이유.
1.1 흑선의 출현
1.1.1 막부 말기의 일본
1853년 남부번(岩手縣: 이와타현)의 태평양 연안 농민들이 번의 학정에 대항해서 잇키(一揆)를 일으키고 옆의 센다이(仙臺)로 도망쳐 들어갔다.
남부번의 산헤이이 잇키(三閉伊一揆)는 농민의 승리로 돌아갔다.
막번체제는 흑선의 출현과 농민 잇키 등으로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1.2 일본의 개국
산헤이이 잇키가 한창 진행중인 1853년 에도만(江戶灣)의 우라가(浦賀)에 페리(M.C. Perry)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출현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일본에 개국을 재촉하였다.
서부를 개척하여 태평양 연안에 다다른 미국은 1848년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을 계기로 본격적인 서부 개발에 나섰다.
또 석유 램프가 보급되기 이전, 고래의 기름이 등유와 초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포경업은 중요한 산업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포경선이나 중국 항로의 기항지로서 일본을 개국시킬 필요가 있었다.
1854년 페리가 다시 내항하자, 로주(老中)인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개국을 결의하고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막부는 미. 일 화친 조약에 이어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화친 조약을 맺고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館)의 개항, 영사의 주재, 편무적 최혜국 조항 등을 인정하였다.
아편 전쟁의 승리로 영국이 홍콩을 차지하고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시키는 등 유럽 열강의 중국 침략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 농민의 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고 영국은 주룽(九龍)반도를 할양받았다.
청국의 정세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에 부임한 미국 총영사 해리스(Harris)가 로주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에게 통상 조약의 체결을 독촉하자, 막부의 행정 책임자인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1858년에 미국과 미. 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다른 4개국과도 같은 조약(安政의 5개국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가나가와(神奈川). 나가사키(長崎). 니가타(新潟). 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江戶). 오사카(大板)의 개시(開市)를 약속하였다.
또 막부는 재류 외국인에게 영사재판권(치외법권)과 협정을 통해 관세율을 정하는 방식(관세자주권의 방기)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불평등한 조약이 되고 말았다.
1.1.3 안세이노 다이고쿠
페리의 개국 요구를 받았을 때, 아베 마시히로는 막정(幕政: 막부 정치)의 관행을 깨고 이것을 조정에 알린 후 각 다이묘(大名)에게 의견을 올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조정과 유력 다이묘에게 막정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부적절한 조치였다.
막부 내에서는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德川家定)의 후계자를 놓고, 유력 다이묘들이 중심이 된 히토쓰바씨파(一橋派)와, 보수적인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이 중심이 된 난키파(南紀派)가 대립하였다.
난키파의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가 되자, 그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쇼군의 후계자로 정하고 칙허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미.일 통상 조약에 조인하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자 쇼군 후계 문제와 조약의 칙허 문제가 얽혀서 조정. 막부.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유력 다이묘의 가신과 재야의 지사들이 가담하였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유력 다이묘나 지사들을 탄압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를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の大獄)라고 한다.
그러나 막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자신의 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번을 뛰쳐나와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존왕양이파를 탄압하던 이이 나오스케는 1860년 미토(水戶)번의 로시(浪士: 탈번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것이 곧 사쿠라다몬(櫻田門) 밖의 변(變)이다.
1.2 막부의 붕괴
1.2.1 개국 후의 경제 변동
개국 후의 무역의 중심지는 요코하마(橫濱)였고, 당시의 무역은 수출 초과로 생사(生絲)와 차 등이 수출되었고, 모직물. 면직물과 무기 등이 수입되었다.
국내 소비용의 수공업 제품이 수출되자 물자의 부족으로 물가가 상승하였기 때문에, 막부는 고힌에도마와시레이(五品江戶廻令)를 반포하여 잡곡. 수유(水油). 밀(蠟). 포목. 생사 다섯 품목을 생산지에서 일단 에도로 회송시켜 시중의 수요를 충족시키려 하였다.
또 일본에서는 금. 은의 가격 비율이 1:5, 구미에서는 1:15였다.
이처럼 금의 가격이 구미보다 지나치게 쌌기 때문에 금이 대량으로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무사계급, 도시 하층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이런 경제적 곤란도 양이론(攘夷論)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1.2.2 공무 합체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고 존왕양이론을 억누르기 위해 고심하던 막부는 공무합체(公武合體)정책을 취하여 조정과의 융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로주인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등은 고메이(孝明) 천황의 누이동생 가즈노미야(和宮)를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의 부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지만, 1862년 안도 노부마사는 이 정책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자 사직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사카시타몬(板下門) 밖의 변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슈번. 사쓰마번 등과 같이 일부 번의 지도층 세력은 공무 합체에 참가하여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례로 1862년 사쓰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에도로 올라가서 막정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1.2.3 양이 실행
사쓰마번과 사이가 좋지 않던 조슈번은 처음에 '항해원략설(航海遠略說)'을 주장하여 막부의 개국론을 지지하였지만, 존왕양이파의 반대로 번론이 존왕양이로 뒤집어졌다.
그리고 조정에 공작하여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등 급진파 구게(公家)를 끌어들인 후 막부에 양이를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계속된 조정의 요구에 못 이겨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1863년 3월에 교토에 올라와 5월 10일을 기하여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5월 10일 양이의 명령이 막부로부터 내려지기가 무섭게, 조슈번은 그 날로 시모노세키(下關) 해협을 지나는 외국선에 포격을 개시하여 번의 위상을 높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공무 합체론에 서 있던 사쓰마번은 8월 18일에 아이즈(會津)번과 함께 조정의 주위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산조 사네토미 등 급진파의 구게를 추방하여 조정에서 조슈번의 영향력을 일소하였다.
이 사건을 8월 18일 정변이라고 한다.
다음 해 교토에서 밀려난 존왕양이파는 막부의 교토 경비대인 신센구미(新撰組)가 존왕양이파를 공격한 이케다야(池田屋) 사건을 계기로 교토로 진격하여 공무 합체를 지지하는 사쓰마번 등과 교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긴몬禁門의 변).
이 때 존왕양이파의 주력은 조슈의 병사였다.
1.2.4 대정 봉환
1863년에 나마무기(生麥) 사건의 보복 조치로 발발한 사쓰에이(薩英) 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은 사쓰마번은, 양이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서양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조슈번 역시 1864년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에 의해 조슈번의 포대가 파괴되고 시모노세키가 점령당하자 양이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슈와 사쓰마 두 번은 신식의 무기를 영국에서 수입하여 전력을 강화하면서 서로 접근하다가 1866년에는 삿초 군사 비밀 동맹(薩長軍事秘密同盟)을 맺었다.
1866년 막부는 다시 반막부 세력의 중심인 조슈번을 누르기 위하여 제2차 조슈 토벌군을 일으켰으나, 막부군은 근대 병기로 무장한 조슈번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 중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병사하자 그것을 이유로 막부는 전쟁을 중지하였다.
이 전쟁으로, 곳곳에서 쌀값이 폭등하고, 쇼군이 출진해 있던 오사카를 비롯하여 에도 등에서 파괴와 요나오시잇키(世直し一揆)가 일어났다.
나아가 공무 합체론의 효메이 천황도 급사하자 토막(討幕)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1867년(慶應 3)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자, 구게 중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꾀하여 그 해 10월 13일에는 사쓰마번에, 14일에는 조슈번에 토막의 밀칙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14일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가 제출한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에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제출하여 수리를 받았다.
<심화학습>
* 데라다야(寺田屋) 사건 : 사쓰마번이 공무 합체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던 차에 사쓰마번의 존왕양이파는 서쪽 지방의 존왕양이파와 연대를 꾀하고 토막의 군대를 일으키기 위하여 교토에 모였다.
당시 유명한 술집의 하나였던 데라다야에는 전국에서 70명 정도의 존왕양이론자가 모여 있었는데, 이것은 막부의 감시를 피해 모인 비밀 회의였다.
당시 사쓰마번을 공무 합체 운동으로 이끌고자 했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는 측근을 보내어 만류하도록 하였으나, 사쓰마를 대표하는 7인의 존왕양이파가 "지금 궐기하는 것이 시마즈 히사미쓰님의 미래를 여는 길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자, 그 자리에서 7명 모두를 살해하였다.
당시는 이와 같은 혼란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토막 운동은 이러한 난세를 정리하겠다는 최후의 해결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물 및 용어해설>
히토쓰바시파(一橋派), 안세이노 다이고쿠(安政の大獄),
휴스켄 암살 사건, 영국 공사관(公使館) 기습 사건,
시마즈 다이묘 행차 중 영국인 살해,
8월 18일 정변과 천주조(天誅組)의 변, 이쿠노(生野)의 변,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와 삿초 동맹(薩長同盟),
요나오시잇키(世直し一揆),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사이즈 다이묘 행차 중 영국인 살해: 1862년 8월 21일 나마무기(生麥)에서 시마즈 행렬에 대하여 영국 상인이 무리하게 굴었다고 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영국은 사쓰마번에 시비를 걸어 이른바 사쓰에이(薩英)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쓰마번은 무려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시마즈 히사미쓰는 센다이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濟淋*)의 동생으로서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이기 했다.
공무 합체의 지지자로서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나가와(神奈川)의 나마무기(生麥)에서 영국인을 살상하는 나마무기 사건을 일으켰다.
제2장 메이지 유신과 부국 강병
<시대개관>
1868년에 성립한 새 정부는 보신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 이어 수도를 도쿄로 정하고 천황을 도쿄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새 정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과거의 제도들을 과감히 개혁하였다.
예를 들어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등의 조치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다이묘. 번주들은 과거의 특권과 지위를 상실하였다.
또 과거의 신분제가 폐지되고 새롭게 화족. 사족. 평민 신분이 생겨났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새 정부는 질록처분을 단행하여 다이묘와 사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일시에 해소하였다.
이처럼 정부는 과거의 구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하는 한편, 부국 강병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도들을 도입하였다.
징병령을 통해 근대적인 군대의 창설을 도모하였고, 교육 제도를 정비하여 국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부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지조개혁을 단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가 나타났다.
이러한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정부는 보다 손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화의 방향은 경제 개혁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화폐 제도와 은행의 설립, 방적 공장과 군수 공장의 건설, 그리고 우편 제도와 철도 교통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서구의 산업화를 본받고자 하는 메이지 새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학습목표>
1. 중앙 집권 정부의 탄생 과정.
2. 판적 봉환과 폐번 치현의 의미.
3. 메이지 정부가 실시한 근대화의 정책.
4. 지조 개혁으로 초래된 소유 형태의 변화.
2.1 중앙 집권 정부의 성립
2.1.1. 왕정 복고
1867년 12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貝視),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키치(大久利通) 등은 무력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쓰마번의 군대가 경호하는 천황의 거처에서 사쓰마. 도사(土佐). 아키(安藝). 오와리(尾張). 에치렌(越前)의 5개 번이 참가하는 회의를 열고 왕정 복고(王政復古)를 선언하는 다이고레이(大號令)를 발포하였다.
그 날밤의 회의에서 도사번 등의 반대를 누르고 쇼군의 관위와 영지를 조정에 몰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고고쇼 회의(小禦所會議)라고 한다.
또 사이고는 구막부측에 시비를 걸기 위하여 에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공작을 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바(鳥羽). 후시미(伏見)의 전투에서 삿초(薩長) 연합군에게 패해 에도로 돌아갔다.
2.1.2 메이지 새 정부
왕정 복고로 총재(總裁). 의정(議政). 참여(參與)의 3직으로 이루어진 새 정부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1868년 4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지시를 받고 에도를 지키던 가쓰 야스요시(勝安芳: 뒤에 가이슈海舟로 개명)는 새 정부의 지휘관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견한 후 전투없이 에도성을 열어 주어 에도를 전화로부터 구하였다.
새 정부는 아이즈번 등 오우에쓰번(奧羽越藩) 동맹에 가담한 도호쿠(東北)의 여러 번들을 쳐부수고, 다음 해 5월에 하코다테(涵*館)의 고료카쿠(五稜郭)까지 막부의 신하 에노모토 다케아키( 本武揚) 등을 항복시켜 내란을 종식시켰다(보신전쟁; 戊辰戰爭).
이 사이 정부는 1868년 3월 천황이 신에게 맹세하는 형식으로 5개조의 서문을 반포하고 정책의 기본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민중에 대해서는 '오방(五榜)의 서문'을 반포하여 단속할 의사를 드러냈다.
이어서 삼권 분립을 지향하는 7관제의 태정관제(太政官制)를 정하고, 7월에 에도(江戶)의 명칭을 도쿄(東京)로 바꾸고, 9월에 메이지(明治)로 개원하여 일세일원(一世一元) 제도를 만들었다.
다음 해 천황은 거처를 옮겨 수도로 삼았다.
2.1.3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번은 무진 전쟁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새 정부 내에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이들 번을 대표하는 개혁파 무사들이 정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기도 다카요시 등은 번을 없애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1869년 1월 삿초도히(薩長土肥) 네 번주를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판적(版籍:토지와 인민)을 봉환하게 하였다.
다른 번들도 이에 따랐기 때문에, 6월에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고 옛 번주들을 지번사(知藩事)에 임명하여 행정을 맡기고 번정을 개혁하였다.
이를 판적 봉환(版籍奉還)이라고 한다.
하지만 판적 봉환 후에도 번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7월에 태정관제를 개정하여 2관 6성제로 바꾸고, 정책을 결정하는 대신(大臣). 참의(參議)와 각 성(省)의 장관인 경(卿) 등의 관직을 만들었다.
동시에 정부는 지금까지의 신분 제도를 바꾸어 구게(公家)나 다이묘를 화족(華族)으로, 옛 막부의 신하나 번사를 사족(士族)으로, 농공상을 평민으로 삼았다.
이것은 에도 시대의 철저한 신분제에 비하면 커다란 변화였기 때문에 사민(士民) 평등이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사쓰만. 조슈. 도사 세 번의 실권을 잡은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협의하여 1871년 2월, 세 번의 병사 약 1만명을 정부의 친병(후에 근위병)으로 삼았다.
친병의 무력을 배경으로 정부는 7월에 폐번 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여 옛 번주를 도쿄로 이주시키고 정부의 관리나 부지사(府知事: 縣令)에 임명하여 행정을 맡겼다.
폐번 치현을 통해 에도 시대의 근간인 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1.4 징병령
조슈번 출신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내란을 겪으면서 무사가 근대적 군대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기헤이타이(奇兵隊) 등 민병대의 전투력이 강력했던 사실을 교훈으로 징병 제도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구파의 무사에게 암살 당하였으나, 이전에 기헤이타이의 총지휘관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서구의 군사 제도를 연구하여 징병 제도를 주장하자, 1872년에 징병 고유(懲兵告諭)가, 다음 해에 징병령이 제정되었다.
징병령은 국민 개병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면제의 규정이 많아 농가의 대부분이 그 부담을 지게 되었다.
농민 가운데는 납세 이외의 부담에 대한 반대와 징병 고유에 대한 오해가 겹쳐서 각지에서 혈세 잇키(血稅一揆)가 일어났다.
2.1.5 지조 개정
새 정부의 재정은 옛 막부의 연공 징수권을 계승한 이외에, 부족한 부분을 공채의 발행이나 호상(豪商)으로부터의 차입금, 불환 지폐인 태정관찰(太政官札)의 발행으로 보충하였다.
주된 재원인 연공은 쌀로 내는 미납이거나 시가에 의한 금납이었기 때문에 세입은 쌀값의 변동이나 풍.흉작의 영향을 받아 매우 불안정하였다.
정부는 세제의 개혁을 추진하여 1871년 전답 조성 자유화를 인정하였다.
또 다음 해에 전답영대매매금지령(田畓永代賣買禁止令)을 해제하고 지권(地券)을 교부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 개념이 도입되었다.
1873년 정부는 지조개정조례(地租改正條例)를 포고하여 지조를 지가의 100분의 3으로 정하고 6년 뒤 지조 개정 사업을 거의 마무리지었다.
지조 개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과세의 표준을 수확량에서 지가로 변경.
② 물납을 금납으로 고치고, 세율을 지가의 3%로 결정함.
③ 토지 소유자가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지조 개정으로 정부는 매년 정액의 지조를 현금으로 징수하게 되어 예산 제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부담 총액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증세가 된 지역도 있었다.
1876년 미에(三重)현 등에서 지조 반대 잇키(伊勢暴動)가 일어나 정부는 다음 해 지조를 100분의 2.5로 경감하였다.
그래도 농민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아 지조 경감의 요구는 후에 전개되는 자유 민권 운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2.1.6 식산 흥업
부국 강병을 실현하고자 서두르던 정부는 옛 막부의 요코스카(橫須賀) 제철소를 해군 조선소로, 에도 세키구치(江戶關口) 대포 제작소를 도쿄 포병 공창으로 삼고, 나아가 관영 군사 공장을 신설하고, 또 1870년에는 공부성(工部省)을 설치하여 옛 막부 등에서 인수한 광산을 관영으로 삼았다.
또 나가사키(長崎) 제철소의 기계를 옮겨서 오사카(大板) 포병창을 만들고, 사도(佐渡) 금산, 미이케(三池)의 탄광, 오사카(小坂)의 동산, 가마이시(釜石)의 철산 등을 관영으로 삼았다.
정부는 주요 수출품인 생사의 품질을 개량하기 위하여 서양식의 관영 도미오카 제사(富岡製絲) 공장을 만들어 여공을 양성하고, 견사나 모직물의 수입을 줄이기 위하여 방적 기계를 수입하는 한 편, 센주 제융소(千住製絨所)를 건설하였다.
도미오카 제사 공장은 민간 공장으로, 센주 제융소는 관영 군사 공장으로 존속하였지만, 다른 공장의 상당수는 당시의 국내 사정에 맞지 않아 실패하였다.
또 1872년에 신바시(新橋)-요코하마(橫浜) 간의 철도가 개통되고, 1874년에는 아오모리(靑森)-도쿄(東京)-나가사키(長崎) 사이가 전부 개통되었다.
1871년에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편 제도를 제정하고, 1877년 만국우편연합에도 가입하였다.
이 해에 일본에 처음으로 전화가 수입되었다.
나아가 정부는 근대적인 화폐 제도를 채용하여, 1871년에 신화조례(新貨條例), 다음 해에 국립은행조례를 제정하고, 국립 은행에 금본위제에 의한 태환 은행권의 발행을 인정하였다.
2.2 문명 개화와 복고
2.2.1 소학교의 탄생
메이지 유신 전후부터 종래의 개인이 운영하던 데라코야(寺子屋)와 달리, 지역의 유지들이 발기하여 공립의 향학을 설립하고 교원을 초빙하여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 각지에서 실시되었다.
향학은 데라코야와 달리 공공성. 개방성과 교육의 계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근대 학교 교육의 선구가 되었다.
폐번 치현 직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정부 수뇌가 많은 수행원과 함께 구미를 순방하여 구미의 제도 문물을 시찰하고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에 참가한 육군 고관은 학교 교육과 징병제를 중시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1872년 학제를 발포하여 국민 모두가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학제는 전국적으로 단일한 제도였기 때문에 각 지방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점도 있고 설립비나 수업료의 부담도 컸다.
1879년 교육령으로 의무 교육이나 취학 조건은 완화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개정되었다.
이처럼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 착오와 제도의 수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2.2.2 국가 신도
왕정 복고에서 출발한 정부의 내부에는 복고주의적인 경향도 여전히 강해, 천황 친정. 제정 일치 등을 주장하며 신도(神道)를 국교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70년에는 대교 선포(大敎宣布)의 조칙을 내려 신도에 의한 국민 교화정책을 취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황실의 조상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사하는 이세 신궁(伊世神宮)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를 서열화하고 천황이 최고의 제사장으로서 국가가 제사를 관장하고 신직(神職)을 정부가 임명한다고 하는 국가 신도의 제도가 확립되었다.
정부는 막부의 기리시탄 금지정책을 계승하여, 에도 시대부터 신앙을 지켜왔던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 기리시탄을 적발. 탄압하여 우라카미 구즈레(浦上崩れ) 사건을 일으켰다.
2.2.3 사민 평등과 문명 개화
판적 봉환 후 정부는 평민에게 성씨를 허락하고, 거주나 직업 선택의 자유, 신분을 넘어선 혼인. 문무 관리가 되는 것을 인정하였다.
또 1871년에는 종래의 에타(穢多). 히닌(非人)의 호칭을 폐하고 평민으로 부르게 하여 형식상 황족을 제외하고 사민 평등이 실현되었다.
1872년에는 태음력을 폐하고 태양력의 채용을 포고하여 시각의 표시를 하루 24시제로 통일하고, 관청에서는 일요일 휴일제를 채용하였다.
민간에서도 도시에는 문명 개화의 풍속이 들어왔지만, 도쿄의 서민층이나 농촌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종래와 거의 바뀌지 않아서, 여러 가지 민속 행사를 행하고 전통적인 관습을 지켰으며, 농경 생활 속에서는 음력을 계속 사용하였다.
2.3 메이지 초기의 대외 관계
2.3.1 국경의 확정
통일 정부를 갖고 주권 국가가 된 일본은 국경의 확정을 서둘렀다.
1854년의 러.일 화친 조약은 에토로후(擇捉)섬 서쪽의 제도를 일본령으로 하고 가라후토(樺太: 사할린)에 대해서는 소속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일 양국 사이에 종종 분쟁이 일어나 러.일 관계를 긴장시켰다.
정부는 교섭의 결과, 사할린을 러시아에 양보하고 1875년에 우룻푸(得撫)섬 동쪽의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전부를 일본령, 가라후토를 러시아령으로 하는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을 맺었다.
2.3.2 류큐 처분
사쓰마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류큐 왕국(琉球王國)은 동시에 청나라와도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1871년에 상호 평등한 청.일 수호 조약을 맺었지만 류큐의 귀속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는 1872년에 류큐번을 설치하고, 류큐의 표류민이 대만의 선주민에게 살해당한 1871년의 사건을 이유로 1874년에 청국령의 대만에 출병하여 류큐가 일본령인 것을 청나라에 알렸다(대만 출병).
1879년 정부는 군대를 류큐에 보내 무력을 배경으로 번과 왕부(王府)를 폐하고 오키나와(沖繩)현을 설치하였다.
2.3.3 조.일 수호조약
일본과 조선은 에도 시대에 국교를 맺어 양국 간에 국경 문제는 없었다.
정부는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조선의 지위를 낮게 보고 국교를 조정하고자 하였다.
조선과의 외교권을 쓰시마(對馬)번으로부터 접수하고 막부가 맺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조선은 일본을 '무법의 나라'로 비난하였고, 이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1873년 불평 사족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제기하였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외유하던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 등 남아서 정부를 지키던 자들이 정한으로 기울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이 내치 우선을 주장하여 정한에 반대하였다.
정한론에 패한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참의를 사임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러나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오쿠보 도시미치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킨 후 함대를 파견하고 조선 정부에 강요하여 1876년 조.일 수호 조약을 맺고 조선을 개항시켰다.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인천. 원산)를 개항하고,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도 가혹한 조건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다.
2.3.4 임오 군란과 갑신 정변
조선은 그 후에 구미 각국에게도 개국하여 청국. 일본. 미국. 러시아의 세력이 조선에서 이권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구미 상품의 중개 무역을 주로 하였던 일본으로 조선의 금이 유출되자, 조선에서는 물가가 폭등하고 재정이 궁핍하여졌다.
치외 법권을 악용하는 일본 상인도 적지 않아, 조선에서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1882년(壬午年)에 구식 군대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을 덮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조정으로 일본은 공사관의 경비를 위하여 군대를 상주시킬 권리를 얻었지만, 그 결과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는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1884년(甲申年) 일본의 근대화정책을 배운 김옥균 등 개혁파가 청나라를 등에 업은 보수파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개혁파의 정권수립을 돕기 위해서 일본은 주류하고 있던 군대를 움직였지만, 청국군에 패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한다.
그 결과 청.일 간에는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파병시에는 사전 통고를 한다고 하는 톈진 조약(天津條約)이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사이에 맺어졌다.
1889년의 방곡령 사건의 배후에 청나라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 일본 정부는, 청나라와의 개전을 신중하게 검토하게 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일 간의 군사적 대립이 깊어 갔다.
<심화학습>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유신 초기에는 햇병아리 새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 세력이 아직도 전국에 잔존하고 있었고, 새 정권의 내부에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요직과 감투를 놓고 각 파벌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처럼 내부 분열의 위험 속에서도 신출내기 메이지 정부는 서양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문명개화’의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메이지 유신의 핵심 멤버와 유학생, 수행원을 포함하여 106명으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2년에 걸쳐서 미국과 유럽을 둘러볼 예정으로 1871년 9월 요코하마를 출발하였다.
아직 정부의 정통성과 정치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의 핵심들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결심한 것은 서양의 문명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불안한 정부를 동료들에게 맡기고 장기간 나라를 비운다는 것은 정치적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태정관제(太政官制), 징병령, 지권(地券), 지조개정(地租改正),
기독교의 전래, 차별 부락민 문제, 서구 문명의 도입, 북방 영토 문제,
재정 문제와 위관군 사건(僞官軍事件),
지권(地券): 지권은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증서로서 연공 부담자에게 주어졌다.
이로써 근대적 토지 소유의 개넘이 도입되었지만, 1886년에 새롭게 등기법이 실시되자 폐지되었다.
지조개정(地租改正): 지조 개정은 연평균 수확량 또는 소작료를 토지의 이자로 보고 그 근본에 해당하는 땅값을 산정하여 지조와 민비(民費; 지방세, 지조의 3분의 1)를 징수하는 제도였다.
서구 문명의 도입: 짧은 머리에 중산모, 양복.구두.양산을 사용하고 소고기 전골을 먹는 등의 풍속이 유행하였다.
도쿄 긴자(銀座)의 벽돌 건물로 된 시가지를 마차가 달리고, 거리에서는 가로등으로 가스등이, 실내에서는 석유 램프가 불을 밝혔지만, 이러한 변화는 대도시 일부의 현상이었다.
제3장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
<시대개관>
일본은 1870년대 중반에서 188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자유 민권 운동으로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자유 민권 운동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정한론 논쟁에서 패배하어 정계를 떠난 정치 세력들이 다시 정치에 복귀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치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납세자인 국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민선 의원 설립(民選議院設立)을 요구하였다.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가 도화선이 되어 자유 민권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더욱이 불평 사족들이 일으킨 서남 전쟁에서 정부에 대한 무력적 저항이 실패로 끝나자, 자유 민권 운동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결국 1881년 정부도 민중과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10년 뒤에 헌법과 국회를 설치할 것을 천황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국회의 개설에 대비해서 지방의 자치 제도나 내각 제도 등을 정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독일에 파견하여 일본에 적합한 헌법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자유 민권 운동 측에서도 자유당과 입헌개진당을 만들어 헌법체제에 대응하였으나, 메이지 정부는 헌법과 제도의 개혁에 있어서 민간의 의견을 일체 수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정부 주도하에 진행되어, 헌법은 1889년 2월 11일 대일본 제국 헌법으로서 발포되었다.
이 헌법은 주권자인 천황이 만들어 국민에게 내려 준다고 하는 이른바 흠정 헌법(欽定憲法)이었다.
일본은 이 헌법에 근거하여 귀족원과 중의원으로 이루어진 국회를 1890년에 개설하였다.
3.1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
3.1.1 서양 문화의 섭취
아편 전쟁 후 막부나 유력 다이묘들은 군사력을 충실히 할 필요를 느끼고 서양의 근대 기술의 수용에 힘썼다.
막부 대관인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는 반사로를 만들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고, 사가(佐賀)번이나 사쓰마번 등도 총포를 제조하였다.
막부는 근대 과학을 조직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1856년에 양학소(洋學所)를 번서조소(藩書調所)라고 바꾸고 막부 신하의 자제, 나아가 제번의 유지에게도 문을 열어 난학(蘭學). 영학(英學)을 배우게 하였으며, 후에는 개성소(開城所)라고 고쳐서 어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메이지 새 정부는 막부가 창설한 의학소와 개성소를 계승하는 형태로 후에 양쪽을 합쳐서 도쿄대학(東京大學)을 만들었다.
막말에는 서양 과학과 동양의 도덕 사상의 결합을 주장하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나, 일본이 대국이 되지 말고 전쟁을 막는 '인의(仁義)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같은 사상가가 나왔지만, 메이지 유신 후에는 서양 사상을 소개하는 계몽 사상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학문의 권장》의 저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사쿠마 쇼잔의 가르침을 받은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번서조소를 나온 니시 아마네(西周), 개성소에서 배운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은 1873년에 메이로쿠샤(明六社)를 만들고, 다음 해 《메이로쿠잣시(明六社雜誌)》를 발행하여 널리 근대 사상을 소개하고,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인권이나 입헌 정치를 강조하는 자유 민권 사상에 눈을 떴다.
메이로쿠샤에는 자립의 정신을 주장한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천부 인권설을 소개한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도 있었다.
3.1.2. 지방 자치의 요구
판적 봉환 후 구마모토(熊本)번에서는 요코이 쇼난의 가르침을 받은 부농들이 번정을 장악하고 지번사(知藩事)의 직필로 "백성은 혹한 풍우도 마다하지 않고 ..."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구마모토번에서는 대규모 감세를 실행하고, 사족과 평민을 구별하지 않고 투표로 의원을 선출하여 번의 의원(議院)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도사번도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에 의하여 번의원이 설립되었으나 폐번의 조치로 중단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적 정치에 반대하고 지방 민회의 설립을 요구하는 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 지방 자치의 요구가 높아졌다.
1878년 정부는 삼신법(三新法)을 제정하고 부현회(府縣會)를 설치하였다.
3.1.3 사족의 반란에서 언론 활동으로
폐번 치현 후 과거의 지위를 상실한 사족(士族)들 중에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사족, 과거의 특권을 잊을 수 없었던 사족, 정한론을 지지하는 사족들 사이에서 반정부 감정이 높아졌다.
1874년 사가(佐賀)의 사족이 참의직을 지냈던 정한파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를 수령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사가의 난).
판적 봉환 후, 정부는 화족과 사족의 가록(家祿)을 감액하여 지급함에도 불구하고 가록이 나라의 재정을 압박하자, 1876년 가록을 폐지하고 대신에 금록공채(金祿公債)로 화족과 사족에게 보상해 주었다(질록 처분).
같은 해 폐도령이 발포되어 무사의 상징인 칼을 차지 못하게 되자, 사족의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에서 사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1877년 가고시마(鹿兒島)의 사족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 삼아 일으킨 반란은 규슈의 남쪽 지역 전체에 걸친 내란(사족 반란 또는 西南戰爭)으로 확대되었지만, 근대적 장비를 갖춘 정부의 징병 군인에게 패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하였다.
한편 사족 가운데는 새로운 사상을 기반으로 신문과 같은 언론 기관에서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1875년 정부는 참방률(讒謗律). 신문지 조례 등을 제정하여 언론을 통제하였다.
서남 전쟁 후 사족의 반정부 운동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호소하는 자유 민권 운동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3.1.4 국회 개설의 청원
정한론을 주장하여 참의를 사직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은 1874년 애국공당(愛國公黨)을 결성하고 연서하여 민선 의원 설립(民選議院設立)의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건백을 계기로 국회 개설의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자유 민권 운동의 제1보가 되었다.
건백의 내용은 사족과 호농을 정치에 참가시키자는 것으로, '상류의 민권'이라고 불렸다.
1875년 기도 다카요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복직하고, '점진적으로 국가 헌법의 정체를 수립'한다는 조칙이 나오고, 삼권 분립을 목표로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大審院)이 설치되었으며, 임명된 의관(議官)으로 구성된 원로원(元老院)을 입법의 자문기관으로 삼았다.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결성한 고치(高知)의 입지사(立志社)는 서남 전쟁 중에 국회 개설을 건백하여 자유 민권 운동으로의 전환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자유 민권을 주장하는 민권 정치 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이들 정사의 연합체로서 부활한 애국사(愛國社)는 1880년에 국회 기성 동맹으로 발전하여 국회 개설의 청원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집회 조례(集會條例)를 제정하여 운동을 억압하는 한편 독자적으로 헌법을 준비하였다.
3.1.5 메이지 14년의 정변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사망한 후 최고의 선임 참의가 된 오쿠마 시게노부(大 重信)는, 국회의 조기 개설과 정당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면서 번벌 정권(藩閥政權)의 유지를 꾀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대립하였다.
마침 홋카이도 개척을 목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개척사의 폐지 기한이 다하자, 정부는 개척 사업으로 건설한 대규모 시설을 사쓰마 출신의 정상(政商) 고다이 도모아쓰(五大友厚) 등에게 싸게 불하하기로 각의에서 결정하였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이런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여론도 권력을 독점하고 정상의 이권만을 챙겨 주는 번벌 정부를 '유사 전제(有司專制)'라고 격렬하게 공격하여 정부는 위기에 빠졌다(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開拓社官有物拂下事件).
이토 히로부미 등은 삿초(薩長) 연합을 만들고 불하를 중지시키는 대신에 오쿠마 시게노부를 정부에서 추방하고 칙유(勅諭)를 내려 10년 뒤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함으로써(국회 개설의 칙유) 위기를 겨우 모면하였다.
이것이 곧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다.
3.1.6 사의 헌법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국민의 손으로 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기운이 국민 사이에서 높아졌다.
1880년에 열린 국회기성동맹 제2회 대회에서는 다음 대회까지 헌법 예상 시안을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3.1.7 자유당과 입헌개진당
메이지 14년의 정변 직후 국회기성동맹을 중심으로 이전부터 준비중이던 자유당(自由黨)이 결성되어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총리가 되었다.
이어서 정부에서 하야한 오쿠마 시게노부를 총리로 삼아 도시의 지식인. 실업가 등을 참가시킨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도 결성되었다.
1882년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가 후쿠시마(福島) 현령이 되었을 때, 자유당 간부인 현의회 의장 고노 히로나카(河野廣中) 등은 내란을 획책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 후쿠시마 사건(福島事件)의 충격으로 자유당은 해당하고, 개진당도 오쿠마 시게노부가 탈당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국 자유민권운동은 국회개설이라는 정치적 약속을 얻어내자 급속히 약화되었고, 정작 민주의 인권을 대변하는 투쟁에는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3.1.8 지치부 곤민당
누에 가격의 하락과 과중한 세금으로 곤궁해지고 고리대의 빚으로 고생하던 농민은 각지에서 곤민당(困民黨)이나 차금당(借金黨)을 결성하였다.
1884년 11월 사이타마(埼玉) 현 지치부(秩父) 지방에서는, 옛 자유당원인 다시로 에이스케(田代榮助) 등이 이끄는 곤민당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농민이 지조 경감, 차입금 면제, 징병 반대를 외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은 농민의 자유와 자치를 이상으로 내걸고 싸웠지만 결국 나가노(長野)현 사쿠(佐久) 지방에서 진압 당하였다(지치부 사건秩父).
이처럼 종식된 것처럼 보였던 자유민권운동이 1886년부터 다시 고양되었다.
다음 해에는 지조 경감, 언론. 집회의 자유, 외교의 회복을 요구하는 ‘삼대 사건 건백서(三大事件建白書)’를 원로원에 제출한 것을 계기로 운동은 전국으로 퍼졌다(三大事件建白運動).
이에 대하여 정부는 보안 조례(保安條例)를 만들어 탄압하였지만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고, 옛 자유당원들은 다시 입헌자유당(立憲自由黨)을 결성하였다.
3.2 대일본 헌법의 제정
3.2.1 제국 헌법의 기초
1882년 국회 개설에 대비해서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어, 베를린의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나 빈의 슈타인(Stein) 등 독일 법학자의 강의를 듣고,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Bismarck)의 의견을 듣기도 하였다.
귀국 후 이토 히로부미는 남부 독일 바이에른 출신 법학자 로에슬러(Roesler)를 고문으로 하여 군주권이 강한 독일 연방의 헌법을 참고로 헌법과 그 부속 법령을 기초하였다.
3.2.2 정치 제도의 정비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정부는 정치 제도의 정비도 서둘렀다.
1884년에 화족령(華族令)을 정하고,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를 화족에 포함시켰다.
이들은 황실을 지키는 특별한 신분으로서 후에는 의회에 설치될 귀족원(貴族院)을 구성하게 된다.
다음 해 태정관제(太政官制)를 폐하고 내각 총리대신(수상)과 국무대신(각 성의 장관)으로 조직된 내각 제도를 창설하였다.
다만 수상은 내각의 수반이지만 다른 대신을 면직시킬 수 없을 정도로 권한이 약하였다.
또 정부와 궁정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궁중의 관리로서 궁내대신과 천황을 보좌하고 조칙 등을 관할하는 내대신(內大臣) 제도를 만들었다.
황실을 재정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주식. 공채. 토지 등을 황실 재산으로 확보하였다.
이것은 모두 천황제를 공고히 하고 천황의 권위가 정치에 의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3.2.3 지방 행정의 독립
정부는 1888년에 시제(市制). 정촌제(町村制)를, 1890년에 부현제(府縣制). 군제(郡制)를 제정하였지만 실시된 시기는 지바에 따라 달랐고, 특히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서는 실시가 늦었다.
3.2.4 헌법 제정
대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은 추밀원에서 심의한 후에 1889년 2월 11일 천황의 의사에 따라 제정된 헌법(흠정 헌법)으로서 발포되었다.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황위의 계승. 즉위 등 황실에 관한 것을 황실 전범(1889년 제정)으로 정하였다.
제국 헌법은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천황의 대권은 육해군의 통수, 선전.강화.조약 체결 등의 외교, 관제의 제정이나 대신 이하 관리의 임명 등 매우 넓었고, 의회는 이에 관여할 수 없었다.
또 의회의 사후 승인을 전제로 법률에 해당하는 칙령(勅令)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제국 의회는 국민의 선거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된 중의원(衆議院)과 화족 의원 등으로 이루어진 귀족원(貴族院)의 이원제를 채택하였다.
중의원 의원 선거법에서 선거권은, 직접 국세 15엔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로 한정되었다.
참고로 제1회 총선거 당시에 만 25세 이상의 남자 인구는 약 1,000만 명(전 인구의 25%)으로, 그 중 선거 유권자 수는 약 45만 명이었다.
따라서 유권자 수는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사법권은 천황에게 속하여 행정. 입법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행정부의 권한은 의회보다 컸고, 각 국무대신은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다.
3.2.5 각 법전의 편찬
정부는 조약 개정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메이지 초년부터 각종 법전의 편찬을 추진하였다.
1890년 프랑스의 법학자 보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를 고문으로, 프랑스 민법을 모체로 하는 민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민법은 “충효를 죽인다”고 하는 민법전 논쟁으로까지 번졌기 때문에, 일본의 민법은 1898년에 다시 편찬되어 독일 민법을 모법으로 삼은 신민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심화학습>
* 사족(士族)의 반란
메이지 정부의 급속한 서구화 정책으로 과거 무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사족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불평 사족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여 하야한 당대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 삼아 정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것이 1877년에 일어난 서남 전쟁(西南戰爭)이었다.
결국 반군은 2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패하고 말았으나, 그렇다고 불평 사족들이 정부의 서구화에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들 불평 사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와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을 벗어나 중국이나 조선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들을 대륙 낭인이라고 한다.
대륙 낭인들은 중국이나 조선에 들어가 그곳의 개혁 운동, 언론 등을 지원하면서 크게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지원하는 별동대 역할을 하였다.
*홋카이도 식민
어로와 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었던 아이누는, 본토에서 진출한 수산업자 등의 압박으로 막말에는 이미 현저하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러시아의 동방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개척사(開拓使)를 두고 홋카이도의 방비를 겸하면서 둔전병 촌(屯田兵村)을 각지에 배치하고 군사 도로를 건설하였다.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조수를 홋카이도로 보냈으며, 또 보신 전쟁에서 패한 도호쿠(東北) 제번의 사족이나 북쪽의 농민이 주로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였다.
개척사는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를 만들고 농장. 철도. 공장. 관산을 건설하여 홋카이도를 개발하였다.
이러한 개척으로 아이누의 생활 영역은 점점 좁아졌다.
정부는 1889년 홋카이도 구토인보호법(北海島舊土人保護法)을 제정하고 정부가 제공한 토지에 아이누를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의 민권
17세기 이래 사쓰마번의 압정에 시달려 왔던 오키나와현의 민중은 폐번 치현 때에 정부가 약속한 토지 개혁과 세제 개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부는 폐번 치현에 대한 오키나와 지배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하여 타협적인 ‘구관 온존(舊官溫存)’ 책을 취하였다.
임야 처분에 반대한 오키나와 출신의 농업 기사 자하나 노보루(謝花昇)는 그 후 오키나와 현민의 정치적 권리를 되찾는 운동의 선두에 서서 관헌의 압박에 맞섰다.
1909년에 겨우 부현제가 실시되어 마침내 1912년에 중의원선거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키나와 경제의 후진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책을 취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현민을 본토에 동화시키기 위해 예로부터 내려온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였다.
<인물 및 주요용어>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삼신법(三新法), 사족(士族)의 저항, 혁명권, 오다 다메쓰나(小田爲綱),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의외유 사건, 자유민권운동의 격화 사건,
시제(市制).정촌제(町村制), 귀족원(貴族院), 신민법의호주권,
아이누 문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 1835~1901.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 계몽 사상가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그는 개인의 독립이 나라의 독립을 떠받친다고 생각하고, 신분제에 의한 비굴한 사고 방식과 상업을 멸시하는 풍조를 일소하고자 하였다.
제4장 조약 개정과 청.일 전쟁
<시대개관>
메이지 정부는 유신 이래로 항상 국제 사회에서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을 목표로 근대화에 매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약 개정은 헌법 제정과 함께 메이지 정부가 심혈을 기울였던 과제중의 하나였다.
조약 개정은 막말에 막부가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평등한 조약으로 고치고자 하는 외교적 노력을 의미한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관세 자주권의 회복과 영사 재판 제도의 철폐에 있었다.
조약 개정은 거듭되는 실패 속에 1894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무쓰 무네미쓰 외상에 의해 마침내 성취되었다.
또 일본은 국제적 지위의 상승을 위해 대륙으로의 팽창을 의도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는 조선을 놓고 점차 청나라와 갈등의 도를 더해 갔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조선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이런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세율을 높이고 군사비의 지출을 파격적으로 증가시켰다.
결국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청.일 전쟁은, 준비가 충분했던 일본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나친 전리품 획득을 불만스럽게 여긴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이른바 '삼국 간섭'을 통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하였다.
이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시 러시아와 경쟁하는 구도가 되었다.
<학습목표>
1. 불평등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
2. 조약 개정 과정.
3. 한국의 정변에 대한 일본의 대응.
4. 청.일 전쟁과 일본 국내 정세의 연관성.
4.1 조약 개정 교섭
4.1.1 이노우에 외상 시기
1876년 정부는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에게 조약 개정의 교섭을 개시하게 하였다.
당시의 경제 사정상 수입을 줄일 목적으로 우선 관세 자주권의 회복을 꾀하였지만 영국의 찬성을 얻지 못하여 교섭은 실패하였다.
여론도 치외 법권 철폐(법권 회복)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법률의 정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일본이 문명국임을 보여 주기 위해 구화정책(歐化政策)을 취하고,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상류 계층이 구미의 외교관을 불러 매일 밤 무도회를 여는 등 선진 열국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4.1.2 조약 개정의 실패와 성공
1887년 정부는 자유 민권론자들의 비판을 보안 조례(保安條例)로 탄압하면서 새 내각의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 重信)에게 조약 개정의 중책을 맡겼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교섭 방법을 바꾸어 일본에 호감을 가진 미국. 독일. 러시아를 개별 접촉하여 개정안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오쿠마 시게노부의 개정안에도 대심원(大審院; 대법원)에 외국인 판사를 임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에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는 국권론자에게 습격 당해 중상을 입고 사임하여 교섭은 중지되었다.
그 후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교섭을 재개하였으나, 방일 중인 러시아 황태자가 피습을 당한 사건(오쓰 사건大津事件)이 일어나, 아오키 슈조 외상은 사임하고 조약 개정 교섭은 다시 중단되었다.
1893년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후임 외무대신이 되자 그는 영국과의 교섭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1894년 7월 외국인 거류지를 폐지하고 국내 거주의 자유를 인정함과 동시에 치외 법권을 철폐하는 새로운 영.일 통상 항해 조약(英日通商航海條約)이 조인되었다.
이어서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구미 제국과도 같은 내용의 조약이 맺어져 1889년에 발효되었다.
그러나 관세 자주권의 완전 회복은 1911년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4.2 청.일 전쟁
4.2.1 초기 의회
1890년 7월 제1회 총선거가 치러지고 11월에 제1회 제국 의회가 열렸다.
아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내각은 1891년 민당의 일부를 와해시키고 예산을 성립시켰다.
4.2.2 청.일 전쟁의 발발
방곡령 사건으로 청.일 관계가 긴장되었던 1894년의 봄에, 종교 결사인 동학(東學) 등이 지도하는 대규모의 농민 전쟁(甲午農民戰爭)이 조선에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의 종속 관계를 끊고 내정을 개혁하도록 요구하면서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였다.
이미 전쟁을 의도하고 있던 일본은 선제 공격과, 7월 25일 아산만의 해전을 계기로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8월 1일에 청나라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다.
청.일 전쟁의 개시 후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大本營)을 히로시마(廣島)로 진출시켰다.
4.2.3 시모노세키 조약과 삼국 간섭
결국 청나라가 강화를 요청하여 1895년 4월에 전권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長)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일본에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할양하고 배상금 2억 냥(약 3억 엔)을 지불하는 등의 조건을 인정하였으며, 그밖에 일본은 중국 진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였다.
랴오둥 반도의 할양은 만주로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러시아를 자극하였고, 이에 러시아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대해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강하게 압력을 가하였다(삼국 간섭).
군사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하였고, 이 때부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시작하였다.
4.2.4 식민지 대만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최초의 정복 식민지인 대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대만의 한족은 대만민주국(臺灣民主國)을 만들어 식민지화에 저항하였다.
한족에 대한 제압이 끝날 무렵, 총독부는 토지 조사 사업을 개시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지조를 확실히 징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물 및 주요용어>
치외 법권의 문제, 초연주의(超然主義), 대만 점령.
제5장 러.일 전쟁과 한국 강점
<시대개관>
청.일 전쟁으로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중국은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킨 사건이 1900년 의화단 세력에 의해 베이징이 포위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하여 서구 열강은 8개국 연합군을 편성하여 베이징에 포위된 외교관들을 구출하였는데, 이 연합군에 일본도 가담하여 국제 무대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의화단 사건은 혼란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곧 이어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싶어하는 영국을 끌어들여 영.일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는 더욱 선명하여졌다.
결국 서로의 양보 없이 진행된 러.일 협상은 무위로 끝나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은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렇게 해서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포스머스 강화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그러나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로 일본이 완벽하게 승리하였다고 믿고 있던 대중은, 일본이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을 알자 국가에 배신당했다는 억울함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이른바 히비야 공원의 폭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을 통하여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식민지로 확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서양 열강과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학습목표>
1. 의화단 사건과 동북아시아의 변화와 연관성.
2. 영.일 동맹으로 변화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
3.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이 실시한 한국에 대한 침략 정책.
4.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일본 민중의 반응.
5.1 러.일 전쟁
5.1.1 열강의 중국 분할책과 영.일 동맹
청.일 전쟁 후 유럽의 열강은 일제히 중국 본토의 분할에 나섰다.
러시아는 삼국 간섭의 대가로 뤼순(旅順). 다렌(大連) 지역을 조차하여 만주를 세력권으로 삼았고, 일본은 푸젠성(福建城)에 세력권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중국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농민의 종교 결사인 의화단(義和團)은'부청멸양(扶靑滅洋)'을 외치며 봉기하여 1900년 베이징의 열국 공사관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을 주력으로 하는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의화단 전쟁 또는 북청 사변이라고 함).
한편 전란을 틈타 러시아는 대병력을 투입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한국(1897년 조선은 국명을 대한 제국으로, 왕을 황제로 바꾸었다)에도 세력을 뻗쳐서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의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등은 영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고 1902년에 영.일 동맹을 성립시켰다.
영국도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일 동맹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 세기 이상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던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크게 놀랐다.
5.1.2 러.일 전쟁
일본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하여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인정해 줄 터이니 일본의 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태도도 강경하였지만 일본의 국내 여론도 대러시아 개전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1904년 2월 일본 해군은 인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한 후, 러시아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1905년 1월, 포위한 지 7개월만에 뤼순에 있던 러시아군의 항복을 겨우 받아 내었다.
한편 황해에서는 러시아의 뤼순 함대에 타격을 가하고 울산 앞 바다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육군이 만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전쟁은 종결되지 않고 있다가, 1905년 5월 유럽에서 회항해 온 발트 함대를 동해 해전에서 거의 전멸시킨 후에야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5.1.3 전시하의 국민
러.일 전쟁에서 쓴 전비의 총액은 18억 엔 정도로, 개전 전년도인 1903년의 국민 총소득액과 거의 같다.
개전과 함께 간선 철도와 외항 선박의 대부분이 군사 수송을 우선시하였으며, 국내의 상품 유통도 막혀 심한 불황으로 많은 실업자가 나왔다.
군인 가족에 대한 원호 사업이 실시되었지만,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5.1.4 포츠머스 조약
계속된 패전으로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 운동이 고조되었고 국민 사이에 전쟁 반대의 기운이 강해졌다.
일본에서도 병력의 보충과 전비의 조달력이 한계에 달했다.
동해 해전 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의 의뢰를 받아 러.일 양국에 강화를 권하였다.
강화 회의는 러시아의 비테와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의 워싱턴 근처인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열렸다.
결국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이 조인되어 러시아는 일본에게 사할린(가라후토樺太) 남쪽을 할양하고 뤼순.다렌 지구의 조차권 및 창춘(長春) 이남의 동청 철도 지선과 그에 부속된 권리를 할양할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지도.보호.감리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
과대한 전비를 부담해 온 국민은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거액의 외채까지 남긴 강화 조약에 반대하여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국민 대회를 열었다.
5.2 러.일 전쟁 후의 일본
5.2.1 게이엔 시대
1907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주가 하락에 의한 공황과 농업 공황이 일어났다.
러.일 전쟁 후 정치에서는 번벌 관료 세력을 대표하는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중의원의 최대 세력인 정우회(政友會)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교대로 정권을 담당하는 게이엔(桂園) 시대가 7년간 계속되었다.
5.2.2 제1차 호헌 운동
1913년은 호헌 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가쓰라 수상은 입헌동지회를 결성하여 반대 세력을 와해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우.국민 양당은 내각 불신임안으로 대항하였다.
5.3. 대한 제국의 몰락
5.3.1 보호 조약의 체결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국외 중립 성명을 무시하고 한국 내에 군대를 진출시켜, 1904년 한.일 의정서(韓日議政書)를 강요하고 군사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편의를 획득하였다.
다음 해에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어...
1905년 방한한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5.3.2 항일 투쟁과 한국의 몰락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한국의 국내에서는 분격의 소리가 높았다.
한국에서는.... 의병 투쟁이 전국에서 고양되었다.
일본 정부는 1910년 한국 정부에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한국 병합).
5.3.3 관둥저우와 만철
포츠머스 조약의 규정에 근거하여 일본 정부는 1906년에 남만주철도....
랴오둥 반도의 일본 조차지인 관둥저우에는...
<심화학습>
*군인 칙유(軍人勅諭)와 군대...
*교육 칙어(敎育勅語)와 학교 ;- 1890년 <교육에 관한 칙어>가 발포되었다. 교육 칙어는 충효의 길이 '국체의 정화(精華)'이고 교육의 연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후 교육 칙어는 학교 교육의 기본이 되었고, 국경일 등의 식전에서 낭독되면서 <기미가요> 등의 노래와 어우러져 어릴 때부터 천황을 숭상하는 습관을 기르는 데 일조하였다.
<인물 및 주용용어>
근대 천황제와 국가체제, 8개국 연합군, 총력전과 무기의 발달,
러.일 전쟁으로 인한 증세, 전쟁과 징발, 계엄령의 발포,
충혼비(忠魂碑), 러.일 전쟁 후의 군비 확장, 대역 사건(大逆事件),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 지멘스(Siemens) 사건,
재정 고문 메가타 주타로(目賀田種太郞), 한국 병합.
제6장 일본의 자본주의와 근대 문화
<시대개관>
메이지 시대 초부터 부국 강병과 서구화를 지향한 일본은, 정부의 보호 아래 서양의 자본주의 도입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초기의 인플레이션과 물가의 급등을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긴축 재정정책으로 수습하고, 증세와 정부 사업의 처분을 통해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일본의 중앙 은행인 일본은행이 만들어지고 은본위 화폐 제도가 확립된 것도 이 때였다.
하지만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긴축 정책으로 농민층은 분해되었고, 농촌을 떠난 농민이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자층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강행되었고, 자본주의 발달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도 형성되었다.
그밖에 교통 부문에서는 철도의 발달이 눈에 띄었다.
1889년 관영 철도로 일본의 중심선인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을 개통하였고, 민간에 의한 사철도 발달하여 1889년에는 민영이 관영을 앞지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경공업이 방적업을 중심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고, 청.일 전쟁 후에는 뒤처진 중공업을 일으키기 위하여 관영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에 실업과 저임금, 환경의 오염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났다.
아시오 동산(足尾銅山)의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한편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과 함께 서구 문화도 일본에 들어와, 메이지 시대는 독특한 메이지 문화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일본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각 분야에 걸쳐서 급속히 서양의 근대 문화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서구 문화에 대한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이해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근대 문화의 특질로서 과학적 정신의 중요성이 높아졌고, 동시에 학문. 예술 등이 정치. 도덕. 종교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서양 문화에 대한 반발로 국수주의적인 일본주의가 강하게 제기된 것도 메이지 문화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학습목표>
1.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재정이 초래한 결과.
2. 값싼 노동력의 형성 과정.
3. 자본주의의 발달로 나타난 사회 문제.
4. 일본에 유입된 근대 사상.
6.1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
6.1.1 마쓰카타 재정
관세 자주권이 없는 일본은 수입을 억제할 수 없어서 정화(正貨)의 유출이 계속된 한편, 사족 반란에 전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정부가 불환 지폐를 남발하였기 때문에 통화가 팽창하고 물가가 폭등하였다.
1882년 마쓰카타 마사요시 오쿠라경(大藏卿)은 중앙 은행인 일본은행을 창설하고, 지폐발행을 통일하고, 1885년에 사실상 은본위제에 의한 정화 태환제(正貨兌換制)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국립 은행은 영업 허가 연수가 줄어든 후에 보통 은행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심각한 불황이 일어났다(마쓰카타 디플레).
농촌에서는 면화 등 상품 작물이 수입에 눌려 쇠퇴하였다.
불황과 과중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농민 중에는 빚에 쫓겨 몰락하고 소작농이 되거나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6.1.2 산업 혁명의 진행
1882년 최초의 대규모 면사 방적 공장인 오사카방적회사가 설립되었다.
이후 대규모 방적 공장이 줄이어 건설되고, 1890년에 면사의 생산량이 수입량을 추월하였다.
방적업은 일본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농촌이나 지방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던 제사업에도 증기 기관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계 제사가 퍼져서 근대 산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철도는 군사적 측면에서 중시되어, 1889년에 개통한 관영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을 포함하여 1901년에 아오모리(靑森)에서 나가사키(長崎)까지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정부는 청.일 전쟁에서 얻은 배상금 등 은(銀) 약 3억 6,000만 엔을 금으로 바꾸어 태환을 준비하고, 1897년에 금본위제를 실시하였다.
금본위제의 채용으로 이미 금본위제를 채용하고 있는 구미 제국과의 경제적 교역에서도 같은 토대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배상금의 대부분은 대러시아 전쟁에 대비하여 군함 제조 등 군비 확장에 사용하였고, 포병 공창(砲兵工廠) 등의 확장과 관영 야하타(八幡) 제철소의 설립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청.일 전쟁 후에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고, 공업의 동력이 인력에서 증기기관으로, 작업도 손작업에서 기계 작업으로 바뀌어 기계제 공업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공장에 의한 대량 생산을 통하여 산업 자본이 성립하였고 자본가 계층이 생겨났다. 한편 기계를 사용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층도 생겨났다.
6.1.3 기생 지주제와 사회 문제
수입에 눌려서 상품 작물의 재배가 줄고, 공업에 눌려서 농가의 부업으로 생기는 현금 수입의 기회가 줄어들자, 토지를 포기하는 농민이 늘고 소작농이 증가하였으며, 지주로의 토지 집중이 더욱 진행되었다.
지주는 농촌의 지배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이익을 농업 이외에 투자하는 등, 1900년 전후에 이르러 기생 지주제(奇生地主制)가 확립되었다.
기생 지주제와 함께 빈곤한 소작농이나 영세한 자작농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점하였지만, 이들 농가의 여자는 남자 공원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방적 공장이나 제사 공장에 취직하여 가계를 도왔다.
교육의 보급과 함께 근대적인 기계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출현하고, 그들은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심화하여 자신의 손으로 노동자의 생활을 지키고 지위의 향상을 꾀하는 노동 운동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노동 운동을 체험한 다카노 후사타로(高野房太郞), 가타야마 센(片山潛) 등은 1897년에 노동조합기성회를 결성하였고, 그들의 지도로 철공 조합이 결성되었다.
1898년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등은 사회주의 연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1901년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6.1.4 재벌의 형성
러.일 전쟁 후의 일본 자본주의는 중공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전을 보였다.
기계 공업에서는 조선업이 조선 기술에서 세계 수준에 달했고, '기계를 만드는 기계'인 공작 기계의 생산도 늘어났다.
경공업에서는 여전히 섬유 산업이 중심이어서 총공업 생산액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10년에 52%였다.
나아가 제조업. 포경업. 화학 비료 공업 등에서는 트러스트가 성립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생산과 자본의 집중을 증가시킨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는 지주 회사를 중심으로 금융. 산업. 상업 거래를 통일적으로 지배한, 콘체른 형태를 갖추어, 1910년대 이후 재벌이라고 불리면서 일본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6.1.5 발전소와 화학 공업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15년, 후쿠시마(福島)현의 이나와시로(猪苗代) 발전소에서 도쿄까지 세계 제3위의 초고압 장거리 송전이 성공하였다.
전쟁으로 화학 제품의 수입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화학 비료와 소다. 염료. 화약 등의 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한 화학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6.2 구미 문화와 전통 문화
6.2.1 근대 사상
자유 민권 운동의 전개와 함께 구미의 철학. 문학. 법학. 예술. 과학 기술 등이 들어왔다.
6.2.2 근대 문학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나자 서양의 사상과 독립 운동 등을 제목으로 한 정치 소설이 유행하였다.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 등 《문학계(文學界)》 동인은 개인의 절대화와 내면적 사실의 존중을 주장하는 낭만주의 문학 운동 속에서 인간의 정신 활동을 사회나 국가의 제약으로부터 독립시켜 자유로운 인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여 근대 문학의 길을 넓혔다.
러.일 전쟁 후에는 서양의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가주의나 가족 제도 중시에 저항하여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묘사하는 자연주의 소설이 나타났다.
6.2.3 미술. 예능. 과학 기술
문명 개화의 풍조는 전통 미술의 가치를 거의 망각하게 하였다.
서양 음악은 궁내성 아악부와 군악대에서 가르치다가 1887년에 도쿄 음악학교가 설치되었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부국 강병과 근대화를 서두른 정부가 적극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는 정책과 어우러져, 메이지 중기가 되면 창조적인 연구성과가 나타났다.
<심화학습>
아시오 동산 오염 사건(足尾銅山鑛毒事件) : 근대 산업의 급격한 발전과 생산을 우선하는 움직임은 공해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도치기(?木)현 아시오(足尾)에 있는 구리 광산은 메이지 초년에 사업가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의 손에 넘어가 구리의 산출량이 증대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와타라세(渡良瀨) 강으로 흐르는 광독이 증가하고 매연의 피해로 인한 산림의 황폐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여 강 주변의 전답에 대한 피해가 급속히 커졌다.
정부는 광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패해 농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 과정에서 노출되는 환경 오염 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군비 확장, 죄수 노동, 기능자 양성, 방적 카르텔, 지주 회사,
'철학' 용어의 등장, 서양 학문의 보급, 구메 필화 사건(久米筆禍事件),
일본화(日本畵)의 개혁, 가부키(歌舞伎)의 발전, 소시 시바이(壯士芝居).
제7장 제1차 세계 대전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개관>
러.일 전쟁 후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중국 진출을 엿보던 미국의 관심을 외면함으로써 미.일 관계가 냉각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적 태도는 쑨원을 중심으로 신해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엿보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도 잘 나타난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의 총성이 전 유럽을 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을 때,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에는 갑작스런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긴 일본은 영국조차 원치 않았던 전면 참전을 독일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독일의 식민지와 조차지를 별 저항없이 접수하여,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많은 섬들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이 중국에 강요한 21개조 요구였다.
정부. 군부. 재계의 요구가 모두 포함되어 있던 21개조 요구는 중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지만, 일본의 위협에 저항할 힘이 없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는 그것을 수용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과 민족적 자각이 높아진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결국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자, 한국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고 곧 이어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나, 일본에 대한 아시아 민족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일본이 차지한 대부분의 권익들은 그대로 인정되었고, 워싱턴 회의에서도 일본은 당당하게 세계 5대 강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20년 전반 일본은 워싱턴 체제하에서 협조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평화로운 국제 질서 유지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국내에서는 정당들의 호헌 운동을 통하여 정당 내각이 성립하였고, 1925년 보통선거법이 만들어져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것은 비정당 세력에 대한 정당 세력의 승리였다.
<학습목표>
1. 호헌 운동.
2. 제1차 세계 대전에 일본이 참전한 과정.
3. 전쟁 중 일본이 중국에 요구한 내용.
4.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어난 한국과 중국의 항일 운동의 특징.
7.1 일본과 제1차 세계 대전
7.1.1 일본의 참전
호헌 운동을 전후로 도쿄제국대학 교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와 우에스키 신키치(上杉愼吉) 교수 사이에 천황 기관설(天皇機關說) 논쟁이 전개되어,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주권은 국가에 있다고 하는 미노베 다쓰키치의 주장이 우위를 점하였다.
20세기 초엽 유럽에서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 의한 삼국 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의한 삼국 동맹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 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되는 사건을 계기로, 1914년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오쿠마 시게노부(大외重信)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 "이번 유럽의 대란은 일본 국운의 발전에 ... 천우 신조로 삼아 ... 하늘이 준 기회를 받아 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국내에서 비등하고 있던 '폐감세(廢減稅) 등의 정쟁'을 중지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하고 동양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확립하고, 이것을 배경으로 중국 정부를 회유한다. 그야말로 국내외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천재 일우'의 기회다"라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아시아에서의 독일 무장 상선의 수색에 한정해서 일본에 참전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목적을 한정치 않고 전면 참전한다고 전하였다.
영국이 참전 의뢰를 취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8월 23일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독일의 세력권인 중국의 자오저우만(규州灣). 산둥 반도를 공격하고, 그 근거지인 칭다오(靑島)를 점령하였으며,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제도를 접수하였다.
7.1.2 대중국 21개조 요구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孫文) 등이 지도하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신해 혁명(辛亥革命)을 일으켜, 다음 해 2월에 청조(靑朝)를 멸망시키고 쑨원을 임시 대총령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난징(南京)에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후 북방 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혁명파를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1915년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 세력이 빠져나간 힘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갑자기 21개조 요구를 들이대었다.
이 요구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머물지 않고 중국의 주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1916년에 제4차 러.일 협약을 맺어 중국이 다른 열강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도록 하였다.
1917년에 일본은 미국의 대독일 참전을 계기로 이시이(石井).랜싱 협정을 맺어 중국에서의 권익을 확보하였다.
*대중국 21개조 요구(5항 21조)
1항 (4개조) : 산둥 문제 / 독일 이권의 처분.
2호 (7개조) : 만주 문제(일본이 가장 중시한 문제)
..............뤼순, 다렌, 만철의 조차 기간을 1999년으로 연장.
7.2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세계
7.2.1 파리 강화 회의
1918년 11월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다음 해 파리에서 열린 강화 회의에서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국의 일원이 되어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전권 수석으로 하여 파견하였다.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이유 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 제도의 위임 통치권을 획득하고 산둥성에 있던 독일의 권익을 계승하였다.
강화 회의의 결과 독일에는 식민지 등의 포기와 거액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터키 4개 제국이 해체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평화를 위한 14개조의 원칙에 포함된 민족 자결의 원칙에 근거하여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 동유럽에 많은 독립국이 탄생하였다.
나아가 평화 유지의 국제적 기구로서 국제 연맹(國際聯盟)이 창설되었다.
7.2.2 3.1 독립 운동과 5.4 운동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은 대규모 토지 조사 사업으로 국유지가 증가하는 한편 많은 조선인 농민은 토지를 상실하였다.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민족 자결의 움직임, 쌀 소동으로 인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붕괴와 같은 정세 속에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집회가 열리자,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은 곧바로 조선 전역에 파급되었다(3.1 독립 운동).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시작되자 중국에서는 학생과 산둥성의 민중이 중심이 되어 독일 이권의 중국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5월 4일 베이징의 학생은 천안문(天安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산둥 반도의 반환', '강화 조약 조인 거부' 등의 슬러건을 내걸고 외국 공사관과 21개조 조약에 조인한 정부의 고관 집을 덮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항의 운동이 고조되었다.
7.2.3 워싱턴 회의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은 미국. 영국에 대한 대항으로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비 확장정책을 취하고 군사비가 국가 예산의 50%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 회의에서는 주력함의 보유 비율을 미국.영국 5, 일본 3, 프랑스.이탈리아 1.67로 제한하는 해군 군축 조약을 맺었다.
이 밖에 태평양의 영토에 관한 각국의 원칙을 존중할 것을 약속한 4개국 조약, 중국의 주권.독립과 그 영토 보존의 존중, 문호 개방.기회 균등의 원칙을 승인한 9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워싱턴 회의에 따라 일본은 산둥 반도의 권리를 크게 제한 당하고 중국에서의 일본의 독주를 바라지 않는 영국.미국과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워싱턴 체제라고 불리는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형성되어 베르사이유 체제와 함께 열강의 협조체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체제와 협조 외교에 반발하는 세력도 이 시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7.3 정당 정치의 출현
7.3.1 쌀 소동과 정당 내각
도야마(富山)만을 둘러싸고 있는 우오즈(魚津)촌 등의 마을에서는 1918년 7월 하순부터 어촌의 부녀자들이 쌀값의 폭등으로 곤궁해지자 이장. 지주. 미곡상 등의 집으로 몰려가 도야마 평야에서 거둔 쌀의 반출 정지와 염가 판매를 요구하였다.
이것을 〈오사카아사히(大坂朝日) 신문〉(8월 5일)이 보도한 것이 전국적인 쌀 소동의 발단이었다.
쌀값의 폭등은 전국으로 일어났는데, 그 원인은 상인의 투매와 지주의 매석과 함께 정부의 시베리아 출병 결정이 투기에 박차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쌀값을 인하시키라는 소동은 전국의 촌락에까지 퍼져, 1도 3부 38현에 걸쳐서 70만 명이 참가하였다.
정부의 대응이 늦어서 운동의 절정인 8월 중순이 되어서야 정부는 쌀의 강제 매수에 나섰고, 쌀의 염매를 시작하였다.
쌀 소동의 책임을 지고 데라우치 내각이 총사직한 후에 원로들에 의한 차기 수상 선임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결국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 총재인 하라 다카시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승인하여 1918년 9월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인 하라다카시 내각이 성립하였다.
하라 내각은 고등 전문학교의 증설, 지방 선로를 중심으로 한 철도의 확장, 국방의 충실 등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을 정우회의 당세 확장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권 정치라는 폐해가 생겨났다.
7.3.2 보선 운동의 고양
쌀 소동을 계기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운동은 1919년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등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민중 운동으로 고양되었다.
이를 보선 운동(普選運動)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하라 내각은 선거인 자격을 직접 국세 3엔으로 인하하고, 소선구제로 고쳤으며, 여당의 안정적 다수를 확보하는 선거법을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7.3.3 제2차 호헌 운동
1624년 1월 추밀원 의장인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가 귀족원에 기초를 둔 내각을 만들었다.
그러자 헌정회. 혁신 구락부. 정우회 주류파는 특권 내각 반대, 헌정 옹호, 보통선거 실현을 주장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을 일으켜 호헌 3파의 연합이 성립하였다.
호헌 3파는 정당 정치의 수립과 보통선거의 실현 등을 공약으로 하여 선거전을 치러 464 의석 중에서 284 의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헌정회 총재인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수상으로 하고 정우회 총재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혁신 구락부 당수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殼)가 입각하는 호헌삼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가토 내각은 1925년 3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심적 요구인 이른바 보통선거법을 성립시켰다.
이 법은 납세액에 의한 자격 제한을 철폐하고, 25세 이상의 남자에게 선거권을, 30세 이상의 남자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7.3.4 사회 운동과 여성 운동
쌀 소동 후에는 사회 운동이 현저하게 성장하였다.
농민 운동에서는 소작료의 경감과 경작권의 확보를 요구하는 소작 쟁의가 격증하여, 1922년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 등은 최초의 전국적 농민 조직인 일본농민조합(일농日農)을 결성하였다.
또 피차별민의 해방 운동도 각지에서 고양되어, 같은 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을 요구하면서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를 결성하였다.
여성 운동은 이미 1911년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등이 세이토샤(靑 社)를 결성하여 기관지 《세이토(靑 )》를 발행하고 여성 해방을 호소하였다.
1920년 히라쓰카 라이초,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등은 신부인협회(新婦人協會)를 조직하여 여성 참정권 획득 운동을 추진하였다.
또 사회주의 입장에서 야마카와 기쿠에(山川菊榮) 등은 1921년 적란회(赤瀾會)를 결성하였다.
7.4 다이쇼기의 문화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정부는 1918년 대학령(大學令). 고등학교령(高等學校令)을 제정하여 고등 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였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 도쿄제국대학 부속 지진연구소 등을 설치하였다.
교육면에서는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의 글짓기 운동,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동요(童謠) 운동이나 시나노 자유 교육 운동(信濃自由敎育運動) 등 아이들의 개성을 키우는 자유 교육이 전개되었다.
7.4.2 근대 문학의 조류
인텔리층의 형성으로 개성과 자아의 확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모리 오가이(三鷗外)가 활약을 계속하는 한편, 잡지는 《시라카바(白樺)》를 중심으로 한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등의 시라카바파는 인도주의. 이상주의를 호소하고, 잡지 《스바루(スバル)》에서 활동한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등 탐미파는 개성적 미의 세계를 전개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자의 입장에 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성행하여, 《씨뿌리는 사람》, 《문예전선》 등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전개되었다.
7.4.3 미술. 음악. 연극과 생활의 변화
미술계에서는 문부성 미술 전람회(文展)에 대항해서 이과회(二科會)가 결성되고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 등이 서양화단의 주축이 되었다.
음악에서는 미우라 다마키(三浦環)가 오페라에서 활약하고, 야마다 고사쿠(山田耕ㅁ)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극에서는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 마쓰이 스마코(松井須磨子)를 중심으로 예술좌(藝術座)가 생겨나,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 하지카타 요시(土方與志) 등이 도쿄에서 쓰키지(築地) 소극장을 창립하였다.
산업의 발달은 도시 생활자를 증가시켰다.
도시에서는 빌딩과 백화점이 생겨나고, 도시 생활자의 의식주에는 서양식이 수용되었다.
농촌은 커다란 변화는 없었지만, 청년단을 중심으로 도시의 자유스런 분위기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폐감세법안(廢減稅法案),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이시이. 랜싱 협약,
3.1 독립 운동, 일본의 군비, 쌀 폭동, 치안 유지법, 헌정의 상도(常道),
천정보 지주(千町步地主), 여성 참정권 획득 운동, 자유주의 교육,
모리토(森戶) 사건, 엔폰(円本).
치안 유지법:- 국체의 변혁과 사유 재산 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의 조직자. 가입자. 자금 제공자 등에게 최고형으로서 징역 10년에 형벌을 과하도록 하고 있다.
제8장 군부의 등장과 대륙 침략
<시대개관>
1920년 전반 일본은 워싱턴 체제하에서 협조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평화로운 국제 질서 유지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국내에서는 정당 정치가 꽃필 수 있었다.
호헌 운동을 통하여 정당 내각이 성립한 후 1932년까지 중의원에서 세력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내각을 구성하는 관행이 이루어졌으나, 선거권의 확대로 선거 자금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당 정치는 재벌과 유착하는 금권 정치로 변질되어 갔다.
이것이 정당에 대한 불신을 더욱 조장시켰다.
한편 일본의 대외 정책도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이 개시되었을 때 일본이 산둥에 세 번이나 출병하여 중국의 통일을 방해한 일이나 간토군의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은 협조 외교의 틀을 깨트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 성향이 강한 여론과 군부는 1930년 런던의 해군 군축 회담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1931년 만주를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면서까지 만주에 대한 지배를 고집하여 워싱턴 체제를 붕괴시켰고, 국내에서는 국가주의적 권력 단체의 주도로 정당 정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주의적 성향이 높아 가는 가운데 과격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이이륙) 사건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가속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학습목표>
1. 중국과 일본의 정세를 배경으로 한 산둥 출병.
2. 만주 사변의 발단과 만주국의 정체.
3. 일본 군부의 성격과 2.26 사건의 관련성.
4. 일본의 외교 방침의 전환과 국내 정치 정세 변화의 연관성.
8.1 워싱턴 체제의 동요
8.1.1 간토 대지진과 금융 공황
1923년 9월 1일 간토(關東) 대지진이 일어났다.
게이힌(京濱) 지방은 파괴되고, 지진과 화재의 대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하는 민족적 편견에 가득 찬 유언 비어가 퍼져, 군대. 경찰과 민중이 약 6,700명의 조선인과 약 700명의 중국인을 학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전후 공황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 경제는 이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8.1.2 시데하라 외교와 중국
호헌 삼파 내각 이래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외무대신에 취임하여 워싱턴 체제를 중시하고 구미와의 협조를 지키면서 중국에 대해서는 경제 진출에 중점을 두는 외교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시데하라 외교).
시데하라 외교를 군부. 재계. 정우회는 '연약 외교(軟弱外交)'라고 비판하였다.
8.1.3 다나카 내각과 산둥 출병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다음에는 정우회(政友會)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조각하여 3주간의 모라토리엄(지불 유예령)과 일본은행으로부터 22억엔의 비상 대출을 받아 금융 공황을 수습하였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에 대해서는 적극 정책들 취하여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간섭하고 권익 확보와 일본인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1927년 산둥 반도에 출병하였다(산둥 출병).
지난(濟南)에서 일본군은 국민혁명군과 충돌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지난 사건).
같은 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도쿄에서 군부. 외무성. 오쿠라쇼(대장성) 등의 간부를 모아서 동방회의(東方會議)를 열고, "만몽(滿蒙)을 일본인의 안주의 땅으로 삼을 것, 이 지방의 특수한 지위와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 행사도 불사한다"고 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만몽을 지배하는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이용하려고 북벌군과 대립하는 장쭤린을 펑톈(奉天)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관둥군(關東軍)이 장쭤린을 폭살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만주에서 반일 운동을 한층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8.2 만주 사변과 '만주국'
8.2.1 런던 해군 군축 회의
정부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서 1만 톤 이하 보조함의 제한을 둘러싸고 해군 군령부(海軍軍令部)의 주장을 누르고 조약에 조인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군부. 민간 우익. 정우회는 정부에 의한 병력의 결정은 천황의 퉁수권을 침범한 것이라고 공격하자, 추밀원. 귀족원의 일부도 동조하였다(통수권 간범 문제統帥權干犯問題).
그러나 정부는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헌법학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와 여론의 지지를 얻어 조약을 비준하였다.
8.2.2 세계 대공황
1929년 10월에 미국에서 시작한 세계 대공황은 영.미 양국의 경기를 침체시켜, 생사. 견제품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영.미 및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을 격감시켰다(쇼와 공황昭和恐慌).
8.2.3 만주 사변
만주에서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국권 회복 운동이 일어나, 만철 병행선(滿鐵竝行線)의 건설 등 만철의 독점적 경영에 대한 반발이 강화되었다.
한편 만철은 세계 공황의 영향을 받아서 경영이 악화되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는 만주에서의 이러한 동향에 위기감을 갖고 '만몽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18일 밤, 간토군(關東軍)은 펑톈(奉天) 교외에서 만철 노선을 폭파시키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장쉐량(張學良)군을 공격하여 다음 날에는 펑톈성을 점령하였다(유조호 사건柳條湖事件).
간토군은 계획적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개전 반년 후에는 만주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였다(만주 사변).
이렇게 해서 일본과 중국의 15년에 걸친 전쟁(15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8.3 군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
8.3.1 파시즘의 등장
1931년 군인과 민간 우익에 의한 군부 정권 수립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3월 사건. 10월 사건).
다음 해인 1932년에는 급진적 우익인 혈맹단원(血盟團員)에게 전 오쿠라(大藏)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와 미쓰이 고메이(三井合命) 회사 이사장 단 다쿠마(團琢磨)가 암살되었다(혈맹단 사건 血盟團事件).
더욱이 같은 해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수상 관저 등을 습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大養殼) 수상을 암살하였다(5.15 사건).
이것은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국가 개조를 꾀하는 파시즘 운동이었다.
국제 연맹 탈퇴 후 육군 내에서는 국가 총력전 체제의 수립을 지향하는 통제파(統制派)가 군부의 중추를 차지하자, 천황의 친정(親政)을 외치는 과격한 황도파(皇道派)의 청년 장교는 위기감을 느끼고 1936년 2월 26일 약 1,400명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오쿠라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 등을 살해하고 4일간이나 수상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관저와 의사당 등을 점거하였다(2.26 사건).
반란 진압 후 군부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現役武官제)를 부활시켰다.
또 독.일 방공 협정(獨日防共協定)을 체결하게 하고, 엄청난 군비 확장비를 요구하여 정치 체제의 군국주의화를 결정적인 것으로 하였다.
8.3.2 중.일 전쟁의 발발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盧構橋) 부근에서 중.일 양군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루거우차오 사건).
더욱이 8월에는 샹하이에서도 중.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였다.
9월에 중국에서 제2차 국공 합작이 정식으로 성립하자 일본은 선전 포고도 하지 않은 채 전면 전쟁에 돌입하였다(중.일 전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 전쟁을 북지 사변 또는 지나 사변이라고 하여 대내외적으로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려고 하였다.
8.3.3 난징 대학살과 전쟁 경제
1937년 12월 일본군은 국민 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그 후 수 주간에 걸쳐서 일본군은 난징시 내외에서 포로. 투항병을 비롯하여 부녀자를 포함한 중국인 30만 명을 살해하고 침략. 방화와 부녀자 폭행을 자행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국내에는 일체 알려지지 않았고, 구미에서 〈뉴욕 타임스〉지가 "포로 전원이 죽임을 당하다"라고 보도하여 국제적인 비난이 비등하였다(난징 대학살).
중.일 전쟁이 확대되자 군수품의 발주를 받은 재벌은 급성장을 하였으나, 재정 지출은 격증하고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국민 생활은 어려워졌다.
<인물 및 주요용어>
간토 대지진, 국공 합작(國共合作),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
금본위제(金本位制), 런던 해군 군축 회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헌법 해석, 시안 사건(西安事件),
난징 대학살(南京大虐殺).
제9장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패망
<시대개관>
1930년대 중반은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독재체제를 굳혀 가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정당 정치가 종식되고 군부를 중심으로 국가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1936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삼아 방공 협정을 맺어 이른바 추축 진영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워싱턴 체제와 베르사이유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세계정세를 배경으로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중.일 전쟁은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국공 합작을 이룬 중국의 저항이 예상보다 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국가 총동원법을 만들고 이어서 국민징병령도 실시하여 전시 총동원 체제로 돌입하였지만 중국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만 극도로 악화되어 미.일 통상 조약이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밖으로부터의 자원 조달이 어려워진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대정익찬회를 만들어 일국 일당 체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마지막 선택은 1941년 12월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과의 전쟁은 초반에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에 이어, 8월에는 일본도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로써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학습목표>
1. 파시즘 체제가 확립된 과정.
2. 국가 총동원 체제하의 생활.
3.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당시 일본의 외교 전략.
4.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질 무렵 이루어진 국제 회의.
9.1 파시즘 체제의 확립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전후로 재중국 독일 대사에 의한 평화공작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군부의 강경론에 밀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수상은 1938년 1월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 정부와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 차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의 우한(武漢). 광둥(廣東) 작전으로 중국의 중요 도시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근위 사단 1개만 남겨 두고 있어서 군사적으로 한계에 이르렀다.
중국 전선에서의 타개책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은 소련도 가상 적국으로 설정하고 1938년 만주. 소련 국경의 장고봉(張鼓峰)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하였다(장고봉 사건).
또 다음 해 5월에는 만주. 몽고 국경의 노몽한에서 소련군. 몽고군과 간토군이 충돌하여 대패를 당하였다(노몽한 사건).
노몽한 사건의 절정인 8월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9월 3일에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9.1.2 독.이.일 삼국의 군사 동맹과 남진론
1940년 4월 이후의 독일의 군사적 성공을 보고 국내에서는 일.독(日獨) 동맹론이 일어났다.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崗洋右)는 같은 해 9월 독.이.일 삼국 군사 동맹(獨伊日三國軍事同盟)을 베를린에서 조인하였다.
또 동남아시아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등 식민지 종주국이 독일에 패전한 사실을 배경으로 일본에서는 중.일 전쟁을 타개하기 위한 '원장(援蔣) 루트' 차단과 석유. 철광석. 고무 등의 전략 물자를 획득하자고 하는 '남진론(남진론)'이 나왔다.
9.1.3 파시즘 체제의 확립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고노에 측근의 그룹. 군부. 정당 등 저마다 다른 의도 속에서 '일국 일당'적인 신정당의 수립을 지향하는 신체제 운동을 추진하였다.
기성 정당이 잇달아 해산한 후, 1940년 10월에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결성하여 이를 정점으로 하는 국민 통제 조직을 완성함으로써 익찬 체제를 중핵으로 한 일본형 파시즘 체제를 확립하였다.
대정익찬회는 수상을 총재로 하였는데, 이후에는 도부현 지사를 지부장으로 하고 그 아래에 이제까지의 정내회(町內會). 부락회(部落會) 나아가 도나리구미(隣組)를 갖춘 관료적 조직이 되었다.
9.2 전시하의 학문과 생활
9.2.1 1930년대의 학문과 교육
일본의 사회과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도입됨에 따라 크게 발전하였다.
중.일 전쟁이 시작하자 학문. 교육. 사상에 대한 통제는 한층 강화되었다.
1937년 문부성은 《국체의 본의(國體の本義)》를 작성하여 국체의 존엄을 강조하였다.
《국체의 본의》에서는 만세 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은 신의 나라라고 하여 천황 중심의 황국 사관을 강요하고 있다.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이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바뀌었다.
국민학교는 천황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국민의 육성을 목표로 국민과. 체련과(體鍊科) 등의 교과목이 강조되었다.
9.2.2 문화계의 움직임
전쟁이 시작되자 내일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났다.
허무주의적인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순간적인 삶이 유행하고, 카페. 댄스홀 등이 성행하였다.
9.2.3 생활의 약화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소비 물자는 점점 부족해져서 밥 한가운데에 매실 장아찌 1개만을 반찬으로 한 '히노마루 도시락'이 권장되었다.
패전 당시에 병사로 소집된 자는 약 720만 명이었고, 국민징병령으로 징용된 노동자와 중학생 이상의 학생, 그리고 미혼 여성, 조선인 등은 패전 당시 약 600만 명에 달하였다.
군사비의 증대와 공채의 남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국민 생활은 압박을 받아 국민의 전의는 떨어지고 염전(厭戰)의 기분이 퍼졌다.
9.3 일본의 패망
9.3.1 태평양 전쟁의 발발
제2차 고노에 내각은 남진 정책과 삼국 군사 동맹에 의해 악화된 미.일 관계를 타개하기 위하여 1941년 4월부터 워싱턴에서 미.일 교섭을 개시하였다.
9월 6일 어전 회의에서는 미.일 교섭을 계속 시도하는 한편, 10월 하순까지 대미.영 전쟁의 준비를 완료하기로 하고 대미.영 전쟁의 개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였다.
10월에 고노에 수상은 미.일 교섭 타결의 중요한 조건인 중국 본토로부터의 철병에 반대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육상과 대립하여 사직하였다.
뒤이어 성립한 도조 내각은 11월 5일의 어전 회의에서 최종적인 미.일 교섭안을 결정하였지만, 이것은 미국이 주장하는 국무장관의 각서(헐 Hull 노트)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어서 미.일 관계는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개전으로 돌입하여, 육군은 영국의 식민지인 말레이시아 반도 북부의 코타발 지역에 기습 상륙하고, 해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의 함선을 모두 침몰시켰다.
그 날 일본 정부는 미국. 영국에 선전을 포고하고 태평양 전쟁을 개시하였다.
9.3.2 오키나와 전투와 본토 공습
1942년 6월 일본 해군은, 태평양을 완전히 제압하고 미군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한편 독.소 전쟁에서는 1943년 2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퇴하자 소련군은 반격을 개시하였다.
같은 해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독일은 1945년 5월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 때, 1943년에 미국. 영국. 중국의 연합국 수뇌는 전쟁 종결 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대일 선언(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1944년 11월 이후 마리아나 제도로부터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 공습을 개시하여 대도시. 공업 지대를 집중적으로 폭격하였다.
1945년 3월 하순, 약 55만의 미군이 오키나와 공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군은 겨우 9만 6,000명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섬의 일반인을 소집하여 지구전을 전개하였다.
현의 주민은 3개월에 걸친 '철의 폭풍'이라고 하는 격렬한 전투에 휩쓸려 들어갔다.
오키나와전은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유일한 지상전이었다.
오키나와에서 12만 명을 넘는 현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 희생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6월 말에 수비군은 거의 괴멸당하고 오키나와 섬은 미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9.3.3 패전
1945년 2월 미국. 소련. 영국의 연합국 수뇌는 얄타 회담을 열고 비밀 협정으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독일 항복 후인 7월 미국. 영국. 중국은 3국 동맹으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고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소련을 통해서 종전 공작을 획책하고 있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내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은 8일 선전 포고를 하고 9일에는 만주. 조선으로 침입하여 간토군을 괴멸시켰다.
이 날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천황제 유지의 확증을 둘러싸고 패전의 결단을 늦추고 있던 일본 정부. 군부도 8월 14일 무조건 항복하고 15일 정오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라는 이례적인 수단으로 패전을 국민에게 알렸다.
1931년부터 15년에 걸친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와 붕괴로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이 입은 참화는 정말 심대한 것으로 사망자는 약 2,000만 명을 넘었는데, 그것은 일본인의 사망자 수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적. 물적 피해도 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인물 및 주용용어>
일본군의 만행, 반전 운동, 식량 배급, 염전(厭戰)의 기운,
소.일 중립 조약(蘇日中立條約), 간토군 특종 연습(관특연),
미.일 교섭, 헐 노트(Hull Note), 태평양 전쟁, 카이로 선언,
일본 본토 공습, 오키나와 전투, 포츠담 선언, 강제 연행, 전쟁의 피해.
제10장 점령기의 개혁과 냉전 세계
<시대개관>
일본은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연합군의 일본 지배는 연합국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인 GHQ가 담당하였다.
그 최고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초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점령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그것은 직접 지배가 아니라 일본인 내각을 통한 간접 지배였다.
GHQ의 점령 정책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에 있었다.
따라서 육해군의 해체, 전범의 체포, 천황제 비판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사상 경찰의 폐지 등 과감한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천황의 인간 선언은 당시의 민주화 정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경제에 있어서도 군사 산업과 재벌에 규제가 가해졌고 독과점금지법 등이 만들어졌다.
또 농지 개혁이 추진되어 기생 지주가 사라졌다.
이 헌법은 전쟁 포기 조항이 들어 있어 평화 헌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전 분야에 걸쳐 GHQ의 개혁이 단행되었지만 모든 개혁 정책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후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거세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냉전 체제가 시작되자 일본의 역할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즉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방어하는 방파제로서의 역할이 일본에 부여되었다.
이제는 일본의 경제 재건과 재무장이 무엇보다 우선되었다.
이처럼 점령 정책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 일본을 전쟁으로 이끌었던 정치가들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정치는 갑자기 보수화되었고, GHQ의 민주화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자위대라는 군대를 보유하면서 경제를 희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학습목표>
1. GHQ의 성격.
2. 패전 후 민주적 개혁의 내용.
3. 도쿄 군사 재판의 진행 상황.
4. 냉전 체제와 6.25 사변의 관련성.
5. 미.일 안보 조약의 성격.
10.1 점령하의 개혁
10.1. 동서 대립 속의 일본 점령
포츠담 선언 후에 성립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ㅁㅁ彦) 내각은 1억인 총참회,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치며 지도자의 전쟁 책임을 묻지도 않고 종례의 정치 체제를 계속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 독일과 싸운 연합국 50여 국가는 1945년 6월 국제 연합 헌장에 조인하고 28개국의 비준을 얻어 10월에 국제 연합을 탄생시켰다.
9월 2일에 항복 문서의 조인이 있었고, 10월 2일 연합국군 사령관 총사령부(GHQ)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미국의 직접적인 군정을 받게 된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일본의 정부 기구를 이용한 간접 통치의 형태로 점령 정치가 시작되었다.
10.1.2 초기 점령 정치와 민주적 개혁
1945년 9월 27일 쇼와(昭和) 천황은 맥아더를 방문하였다.
천황은 왜 맥아더를 방문하였고 그것은 점령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초기 점령 정치의 기본 방침은 포츠담 선언에 근거해야 한다고 명기한 미국 통합참모본부지령 등에 나타나 있다.
이것에 근거하여 1945년 10월 GHQ는 치안유지법 폐지 등 인권 지령(人權指令)에 이어서, 여성 해방, 노동조합의 육성, 교육의 민주화, 압제적인 사법.경찰 제도의 폐지,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5대 개혁 지령을 발표하였다.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은 인권 지령의 실시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총사직하고,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내각으로 바뀌었다.
또 1945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주요 전쟁 범죄인(A급 전범) 용의자를 체포하고, 다음 해인 1946년 5월부터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서 천황을 제소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부터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이 급속하게 일어나, 1946년에는 전일본 산업별 노동조합회의(산별).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 일본농민조합 등 전국 조직이 결성되었다.
또 각 정당의 활동도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GHQ의 농지 개혁 지령에 의하여 농지조정법이 성립하였지만(제1차 농지 개혁), GHQ는 보다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1946년 10월 자작농창설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제2차 농지 개혁).
10.2 일본국 헌법과 냉전 체제
10.2.1 패전과 국민
1945년 12월 실시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비탄과 충격 속에서도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안도감이 번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식량난과 인플레이션은 가차없이 국민을 덮쳤다.
이런 가운데 1946년에 새 헌법 초안이 공표되었는데, 국민의 70%가 전쟁 포기 조항을 지지하였다.
10.2.2 헌법과 교육 개혁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1946년 2월 종래의 천황 대권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헌법 개정 요강을 GHQ에 제출하였지만, 맥아더는 독자적인 헌법안의 기초를 서둘러 그것을 정부에 보이고 수락을 설득하였다.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GHQ 안을 토대로 제국 헌법 개정 초안 요강을 결정하고 3월에 발표하였다.
제국 의회의 심의를 거쳐 일본국 헌법이 가결.성립하였고, 11월 3일 공포하여 다음 해인 1947년 5월 3일부터 시행되었다.
심의 과정에서 국민 주권을 명확히 할 것과 생존권 규정이 추가되는 등의 수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새 헌법은 국민주의, 전쟁포기,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대원칙으로 삼고, 국회를 국권의 최고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천황은 통치권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살아남았다.
1945년 10월 이후 GHQ는 교육 칙어(敎育勅語)에 근거한 교육을 금지하는 지령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또 1947년에 신민법이 제정되어 호주권과 가독상속권(家督相續權)을 축으로 한 종래의 가족 제도는 폐지되었다.
1947년에는 노동기준법이 제정되어 노동 3법이 정비되었다.
10.3 냉전 체제의 전개
10.3.1 점령 정책의 변화
1946년 2월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은 금융긴급조치령을 발포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을부터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거세졌다.
1947년 2월 1일을 기하여 제네스토(2.1 스트라이크)에 돌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GHQ의 지령으로 스트라이크는 중지되었다.
10.3.2 경제와 노동 운동
미국은 일본을 자본주의 진영의 안정된 일원으로 삼기 위하여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8년 과도경제력집중배제법은 당시 325개사에 적용되어야 하였지만, 실제로 분할된 것은 11개사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은행은 분할되지 않았다.
1949년 2월에 도지(Joseph Morrell Dodge)가 GHQ의 경제 고문으로서 일본에 와 경제 9원칙의 구체화를 꾀하였다.
이렇게 인플레이션의 수습을 꾀하는 사이에, 같은 해 4월 1달러=360엔의 단일 환율이 설정되었다(도지-라인).
이러한 정책의 결과 일본 경제는 1949년 후반부터 심한 불황에 빠져 중소 기업의 도산, 실업자의 증대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였다.
정부는 그 가운데 '행정 정리'. '기업 정비'를 내걸고 관공청 약 26만 명, 민간 기업 약 30만 명이나 되는 대량 해고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국철이나 도시바(東芝) 등의 노동 조합에서는 해고 반대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0.3.3 일본군의 재군비
1948년 11월 도쿄 재판에서 사망 또는 면소가 된 3명을 제외한 25명 피고 전원에게 유죄의 판결이 내려져 7명의 교수형이 12월 23일에 집행되었다.
그 다음 날 구치 중인 A급 전범 용의자 전원이 석방되어 전쟁 범죄의 추궁은 끝났다.
6.25 사변의 개전 직후인 7월 8일 맥아더는 요시다 시게루 수상에게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의 창설과 해상보안청 정원을 8,000명 증가시키는 것을 인정하는 서한을 보냈다.
한국 전쟁의 개전 직전에 GHQ는 일본 공산당의 전중앙위원의 공직 추방을 지시하고 모든 정치 집회와 데모 행진을 무기한 금지시켰다.
또 1950년 7월 이후 관공청이나 언론 기관. 대기업으로부터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를 추방하는 레드 퍼지(red purge)를 취하였다.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기지가 되어 무기 그 밖의 군수품의 생산. 수리. 수송을 위하여 일본의 공장. 선박. 철도가 최대한 동원되었다.
이러한 특수에 의하여 도지 라인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경제는 단번에 호경기로 바뀌었다.
10.4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
10.4.1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9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의 초청장이 55개국에 보내졌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의 내용은 주로
① 일본의 주권 회복,
② 한국의 독립의 승인,
③ 대만. 펑후(澎湖) 제도. 치시마(千島) 제도. 남사할린의 영토권의 방기
④ 북위 29도 이남의 남서 제도와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미국의 시정권(施政權) 행사의 계속,
⑤ 일본과 연합국에 속한 나라 사이의 협정에 의한 외국 군대 주류의 승인,
⑥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연합국측의 배상 청구권의 방기 등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은 일본의 재군비 제한 조항이 없다는 것과 배상 청구권 방기에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거의 초안 그대로 요시다 시게루 수상 등 일본 전권과 48개국 사이에 조인되었다.
10.4.2 국제 사회로의 복귀
1952년 4월 28일 강화 조약이 발효하여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 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1952년에 경찰예비대를 보안대로 고치고 해상경비대를 신설하였다.
1956년 10월 소.일 공동 선언에 조인하고, 같은 해 12월 일본은 국제 연합의 가입이 인정되었다.
10.4.3 평화 공존의 기운과 평화 운동
6.25 사변의 휴전에 이어서 1954년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10.4.4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1960년 1월 워싱턴에서 새로운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교섭에 들어갔다.
1960년 4월 이후 신안보 조약 반대의 운동은 급속히 높아졌다.
결국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강경한 자세를 바꾸지 않고 6월 23일 비준서가 교환되어 조약은 발효되었다.
<인물 및 주요용어>
제1, 2차 농지 개혁, 잔류 고아, 헌법 초안,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
경제 안정 9원칙, 세제 개혁 권고, 시모야마(下山) 사건과
미타카(三鷹) 사건, 6.25 사변과 일본 경제, 경찰의 중앙 집권화,
소.일 공동 선언, 네루의 평화 5원칙,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교섭
제11장 경제 성장과 현대 일본
<시대개관>
1950년대 말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제3세계가 등장함에 따라 세계는 미.소 양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일본의 정치는 보수당인 자민당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일본은 한때 자주 외교를 주장하여 소련과 국교를 맺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미국과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 발전을 꾀하는 노선을 취하였다.
전국적인 반대 투쟁 속에서 강행된 미국과의 안보 조약 체결은 이러한 일본 정부의 기본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미국과의 협조 체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연평균 10%에 달하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산업 구조도 선진국과 같은 제2,3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구조로 바뀌었다.
물론 무역에 있어서도 1960년대 전반을 제외하고는 계속적으로 무역 흑자를 증가시켜, 1970년대 전반에는 세계 제2위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경제 발전 과정에는 바다. 하천의 오염과 자연 파괴와 같은 공해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한 국민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일본은 주변 국가들과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문제들을 그대로 떠안고 있었다.
한국과도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을 맺어 국교를 재개하였지만, 당시 현안이었던 독도 문제나 전후 보상 문제 등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었다.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하여 일본은 정부 차원의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무반성이 주변 국가와의 미래 지향적 관계를 저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스스로 단죄할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정치 세력이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하겠다.
<학습목표>
1. 일본의 고도 성장.
2. 베트남 전쟁과 일본과의 관계.
3. 일본의 대중 문화의 특징.
4. 전후 오키나와의 문제.
11.1 19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1.1.1 고도 경제 성장
일본 여자 배구팀이 금메달을 딴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고 있던 일본을 세계에 알리는 큰 행사였다.
진무(神武) 경기라고 불리는 1950년대 후반부터 연 10%를 넘는 경제의 고도 성장이 시작되었다.
11.1.2 베트남 전쟁과 일본
일본의 미군 기지는 베트남 전쟁의 후방 기지로서 활용되었다.
이것에 대하여 베트남 반전 운동, 미군의 무기.군용품 수송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키나와의 기지로부터는 미군의 폭격기가 직접 베트남 폭격에 나섰다.
11.2 전후 문화의 발자취
11.2.1 전후 문화의 출발
패전에 따라 학문.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사라져 학문.문화는 새로운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11.2.2 텔레비죤.만화.주간지
1953년부터 시작된 TV 방송은 거대한 매스컴으로 발전하고 문화의 형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요계에서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등이 활약하였다.
출판물에서는 주간지와 만화가 성행하였다.
1980년대에는 비디오가 보급되었고, 1985년에는 패미콘(Family Computer)이 등장하였다.
11.2.3 문화와 학술의 발전
경제의 발전과 함께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도 진행되었다.
1955년에는 원자력기본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원자력연구소가 발족되었다.
1956년부터 남극 관측을 시작하였고, 1970년에는 일본 최초의 인공 위성 '오스미'를 발사하였다.
이 때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는 1965년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를 비롯하여 노벨상의 수상자가 연이어 나왔다.
<심화학습>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인물 및 주요용어>
탄광의 합리화, IMF 조인 8개국, 배상 협정, 농업 인구의 감소,
공해 문제, 미국의 베트남 참전, 베트남 평화 협정,
한.일 기본 조약, 원자력 기본법.
출처 : 방송대 일본학과 길나장이
글쓴이 : 不備 윤기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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